'권리를 면제하다'라는 표현은 이상하다. 책임 또는 의무는 면제할 수 있어도 권리는 면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특허(지재권) 면제' 같은 말은 우리 어법상 이치에 맞지 않는, 성립하기 어려운 표현인 셈이다.
지난 5월 5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그는 “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 면제’를 지지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즉각 전 세계 언론에 알려져 큰 반향을 몰고 왔다. 백신의 특허 보호를 풀어 세계 각국에서 복제 백신을 쉽게 만들게 하면 백신 보급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면제란 책임·의무를 지지 않게 하는 것한국시간 5월 6일 새벽 4시14분. 연합뉴스가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관련 소식을 속보로 띄웠다. 핵심어는 ‘지재권 면제’였다. 그런데 국내 언론은 후속 보도를 하면서 ‘백신특허 면제/포기/유예/해제/중단’ 등 용어상의 혼란을 보였다. ‘특허 면제’와 ‘포기’ 또는 ‘유예’ 등의 표현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상식적으로 어법상의 타당성만 살펴보기로 하자.우선 ‘권리를 면제하다’라는 표현은 이상하다. 직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 ‘권리’와 ‘면제’를 결합시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면제’라는 말은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것을 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세금 면제, 지하철 요금 면제 같은 데에 이 말을 쓴다. 그런데 권리란 통상 책임이나 의무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책임 또는 의무는 면제할 수 있어도 권리는 면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특허(지재권) 면제’ 같은 말은 우리 어법상 이치에 맞지 않는, 성립하기 어려운 표현인 셈이다.
외신을 통해 들어온 원어는 ‘waiver(웨이버: 권리 등의 포기)’다. 웨이버는 ‘권리와 의무’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개념을 함께 담고 있는 말이다. 용어의 주체를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어떤 말이 선택될지 결정되는 특징이 있다. 가령 권리자(특허권자 등 지재권자)를 주체로 보면 웨이버는 ‘권리포기’에 해당한다. 권리로 묶어놓은 것을 풀어 자유롭게 한다는 점에서 ‘해제’를 쓸 수도 있다. 이때 포기나 해제를 한시적으로 하는 것이므로 맥락에 따라 ‘지재권 행사(또는 보호) 유예/유보’ 따위를 써도 뜻이 통한다. 고유어 ‘풀다’ 동사 쓰면 이해하기도 쉬워특허 또는 지식재산을 사용하는 쪽을 주체로 삼으면, ‘의무 면제’에 해당한다. 사안에 따라 책임이나 의무를 지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로 ‘면책’을 쓸 수도 있다. ‘책(責)’이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이때 ‘책’ 또는 ‘의무’는 핵심개념이라 생략할 수 없다. 그러니 ‘특허 면제’만으로는 말이 안 되고, ‘의무’를 반드시 함께 써야 한다. 즉 정확한 표현은 ‘특허 의무 면제’인 셈이다.
정리하면, 권리 뒤에는 ‘포기/유예/유보/해제’ 같은 말이 와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에 비해 ‘권리+면제’의 결합은 어색하다. 서로 의미자질이 어울리지 않아 비문인 셈이다.
특허권 면제든 포기든 또는 유예든, 독자가 가장 알기 쉬운 말은 동사 ‘풀다’를 써서 나타낸 표현이다. ‘미 백신특허 푼다.’ ‘지재권 풀면 코로나19 잡힐까?’ 이런 표현은 면제나 포기, 유예 같은 딱딱한 한자어를 쓴 것보다 친근하고 이해하기에도 쉽다.
우리가 글을 이해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단어의 뜻을 파악해서 아는 것보다 주로 통합체(소쉬르의 개념)상의 맥락을 통해 이뤄진다. 어떤 말 뒤에 뭐가 올지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단어 간에 서로 밀접하게 호응하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합 체계가 단단할수록 언어의 생태계는 건강하다. 그런 점에서 ‘지재권 면제’ ‘특허 면제’라는 표현은 자칫 우리말 체계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 간의 조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