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라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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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밥 한번 먹자" 남발해선 안되는 까닭
우리말에서 대표적 ‘친교어’ 중 하나로 꼽히는 “밥 한번 먹자”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얼마 전 국회 국정감사 기간 중 있었던 한 국회의원의 자녀 결혼식 논란으로 인해서다. 우리가 주목하는 건 그의 해명 가운데 한 대목이다. 그는 본인이 위원장으로 있는 상임위 행정실 직원들에게 청첩장을 돌린 데 대해 “시간 되면 밥 한 끼 먹으러 오라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가 이 말을 가볍게 예의상 한 것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듣는 이에겐 많은 생각거리를 던질 만했다. 상황 따라 친목어가 수행어로 바뀌어우선,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읽히지 않는다. 우리말에서 “밥 한번 먹자”라는 표현은 특수한 위치에 있다. 대개는 실제로 밥을 같이 먹자는 얘기가 아니라 상투적으로 하는 ‘친교어’로 쓰인다. 누군가에게 “담에 밥 먹자” “담에 연락할게”라고 할 때, 이는 굳이 답을 듣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가면서 자주 못 보던 이에게 예의상 하는 말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반갑게 “안녕하세요. 어디 가세요?”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남이 어디 가는지 사생활을 캐묻는 말이 아니다. 상대방도 그것을 잘 알기에 그냥 지나치고 만다.하지만 “밥 한번 먹자”가 직장같이 위계질서가 있는 곳에서 나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때는 단순한 친교문도 수행문으로 바뀔 수 있다. ‘수행문(수행어)’이란 어떤 평가나 판단, 규정을 행하는 문장이다. “정부는 오늘부터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전히 해제했습니다.” 이걸 리포터가 말했다면 그것은 진술문이다. 그는 발화를 통해 단순히 정보를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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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접속어 '다만'의 용법 이해하기
“깔따구 유충으로 의심되는 물질이 발견된 황금정수장과 김천시 관내 배수장에서는 환경청과 낙동강 수도지원센터 관계자 등이 깔따구 유충 유입 경로를 확인하는 역학조사 중이다. 다만 오는 25일 개막을 앞둔 김천김밥축제 용수 공급에는 비상이 걸렸다.” 지난달 25일과 26일 이틀간 15만여 명이 방문해 폭발적 관심을 보인 김천김밥축제가 개최를 앞두고 한때 긴급 상황을 맞았다. 언론에서도 집중 조명을 했는데, 예문은 그중 한 대목이다. 여기에 그냥 넘어가기엔 어색한 말이 눈에 띈다.예외적 사항이나 조건 덧붙일 때 써‘다만’이란 표현이 그것이다. ‘다만’은 문장과 문장을 이어주는 접속어다. 이 말의 용법을 주목해야 할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남발되고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의미상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글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고, 의미 전달을 어색하게 한다. 군더더기로 작용하는 셈이다.우선 ‘다만’의 용법에 대해 알아보자. 부사 ‘다만’은 문장 안과 문장 앞에서 쓰이는데, 각각 의미 기능이 조금씩 다르다. 문장 안에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란 의미를 띤다. “내 수중에 있는 것은 다만 1만 원뿐이다.” 문장 앞에 쓰일 때도 흔하다. 접속부사로 쓰인 용법인데,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쓰임새다. 이때는 (앞의 말을 받아) ‘예외적 사항이나 조건을 덧붙이는’ 기능을 한다. ‘단지’로 바꿔 쓸 수 있다.접속부사 ‘다만’의 전형적 쓰임새는 한글 맞춤법 규정에 많이 나타난다. 한글 맞춤법에 그만큼 예외나 단서 조항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를 보면, 제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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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주차용량 200본' vs '주차용량 200대'
2023년 12월 부산 가덕도 신공항의 운명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2030 부산 엑스포’ 유치가 실패로 끝나자 신공항 건설사업에도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가덕도 신공항에 3500m 규모의 활주로 1본을 조성해 기존 3200m, 2700m 활주로 2본을 갖추고 있는 김해공항과 연계한다는 계획이었다.” 생활 속 낯설고 어려운 단위어 ‘본’우리말 중에 어디서 들어본 듯한데 “이게 맞나” 싶은 표현이 있다. 활주로 개수를 말할 때 쓰는 ‘본’도 그중 하나다. 우리말에서 이 ‘본’의 쓰임새는 의외로 다양하다. 그러면서도 특정 표현에선 용법이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말로 쓰인다. 단일한 쓰임새로 굳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종의 ‘방황하는 말’이라고 할 만하다.한자어 ‘본’은 本(밑 본)에서 온 말이다. 이 글자는 본래 木(나무 목) 자의 아랫부분에 점을 찍어 ‘나무의 뿌리’를 가리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사물을 구성하는 토대라는 의미에서 ‘근본’ ‘밑바탕’이란 뜻이 나왔고 다시 고향, 관향(시조가 난 곳. “본이 어디냐?”라고 할 때 쓰는 말이다)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나무에서 비롯된 글자라 자연스럽게 ‘초목을 세는 단위’로도 쓰인다.‘본’은 명사, 의존명사, 관형사, 접두사, 접미사 등으로 쓰여 우리말을 풍성하게 해준다. 본보기, 본전 등을 뜻하는 말 ‘본’은 명사다. 소나무 10본, 채송화 30본 같은 데서는 단위를 나타내는 의존명사로 쓰였다. 본 협회니 본 사건이니 할 때는 관형사다. 본계약, 본고장 등에서는 접두사이며, 인쇄본이나 교정본 따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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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범죄 경력'과 '온난화 기여'의 어색함
2000년대 들어 지구온난화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면서 ‘탄소중립’이란 용어가 주목받았다. 이는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흡수량(또는 감축량)을 늘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배출량과 흡수량이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탄소 ‘중립’이라고 부른다. 2006년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이 말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다. 이와 함께 떠오른 말이 ‘온난화 기여도’다.의미와 실제 용법 간 괴리 생겨“우리는 삶의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를 소비한다. 어떤 에너지를 얼마나 쓰는가에 따라 ‘탄소발자국’의 크기가 달라진다. 탄소발자국이 크면 클수록 지구온난화 기여도가 높다.” 이 문장에 보이는 ‘지구온난화 기여도’는 무심코 쓰는 말이지만 의미를 생각하면 좀 이상한 표현이다.‘온난화’란 지구 기온이 높아지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를 막기 위해 각국 정부는 탄소중립 정책 등 갖은 노력을 펼친다. 여기에 결합한 ‘기여’란 ‘도움이 되도록 이바지함’을 뜻한다. “한국문학에 대한 기여가 크다”처럼 쓴다. ‘공헌’과 비슷하다. 수출 기여도니 우승 기여도니 하는 말은 가능해도 ‘온난화 기여’는 자연스럽지 않다. 의미자질이 서로 부정과 긍정으로 정반대이기 때문이다.온난화를 ‘막기 위해’ 어떠한 기여를 했다는 뜻으로 ‘온난화 방지 기여도’라고 하면 말이 된다. 이에 비해 ‘온난화 기여도’라고 하는 말은 온난화에 끼친 ‘나쁜 영향’의 정도를 말한다. 이는 ‘기여’가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불러온 ‘책임’이나 ‘원인’ ‘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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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훈민정음으로 읽는 우리말 역사
10월 9일로 우리 글자 한글이 세상에 빛을 본 지 579돌을 맞았다. 애초 ‘훈민정음(訓民正音)’이란 이름을 달고 태어났다.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고유명사로서의 훈민정음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1443년에 세종이 창제한 우리나라 글자를 이른다. 다른 하나는 3년 뒤 세종 28년(1446년)에 이를 널리 반포할 때 찍어낸 판각 원본을 가리킨다. 이 책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의 취지를 밝힌 어제서문(御製序文), 자음자와 모음자의 음가와 운용 방법을 설명한 예의(例義), 훈민정음을 해설한 해례, 정인지 서(序)로 되어 있다.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 국보이기도 하다. 훈민정음 ‘해례본’과 ‘언해본’의 가치이 대목에서 종종 오해하는 게 있다.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 곧 한글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는 잘못된 믿음이 그것이다. 가령 “유네스코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우리말(또는 한글)이 무분별한 외래어와 정체불명의 신조어로 신음하고 있다” 식으로 말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는 우리말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잘 가꿔나가야 한다는 뜻에서 한 말이지만, 잘못된 표현이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한글이나 우리말이 아니라 ‘훈민정음’ 판각본이기 때문이다.유네스코는 특정한 나라의 언어나 문자를 기록유산으로 지정하지 않는다. 한글, 즉 글자로서의 훈민정음이 등록된 게 아니라 ‘훈민정음 해례본’, 즉 책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된 것이다. 해설과 용례를 담고 있어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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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국어사전 주춧돌 놓은 한글학회 '117돌 성상'
1908년 8월 31일, 서울 돈의문 밖 봉원사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는 국어 강습소 졸업생을 비롯해 우리말 연구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겨레의 말과 글을 지키고 살려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 자리에서 ‘국어연구학회’가 탄생했다.“낱말 하나하나에 겨레의 얼 담아”훗날 조선어학회(1931년)로, 다시 한글학회(1949년)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렀으니 올해로 117돌을 맞았다. 이것만으로도 국내 최고(最古)의 학술 단체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글학회의 연원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한글학회 전신의 최초 모임은 아마도 ‘국문동식회’가 아닐까 싶다. 국문동식회는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한 후 5월 독립신문사 내에 주시경이 만든 철자법 연구 모임이다. 선생은 서재필 박사가 창간한 독립신문에 초기부터 참여해 언문조필로 활동하면서 한글 쓰기의 토대를 놓았다. 한글 표기법의 표준화 작업이 태동하던 시절이었다.선생은 1911년 최남선이 주도한 조선광문회에서 우리말 사전 편찬에 착수했다. ‘말모이’(말을 모은 것)라는 순우리말 이름의 사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김슬옹 세종국어문화원장의 강연록 ‘낱말 하나하나에 담은 겨레의 얼’에 따르면, 이는 민족 스스로 자기 말의 사전을 만들려 한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또한 훗날 한글학회가 펴낸 <조선말 큰사전>의 밑거름이 됐다.일제강점기 국어의 수난사는 곧 우리 민족이 겪어낸 질곡의 역사였다. 그중에서도 1942년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은 우리말을 절체절명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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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진짜' '사실' 남발이 왜곡하는 우리말
지금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지만, 한때 ‘원조’를 달고 호객 행위를 하는 식당이 많던 시절이 있었다. ‘원조××식당’ ‘원조◇◇국밥’ 하는 식이다. 하도 ‘원조’가 많다 보니 ‘참원조△△아구탕’ 식으로 차별화하기도 한다. ‘원조’란 어떤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한테 쓰는 말이다. 여러 곳에서 스스로 원조임을 주장하니 어디가 진짜인지 알 수도 없고, 맛도 비슷해 손님 입장에선 헷갈릴 뿐이었다. ‘원조’ 남발이 단어 본래의 의미를 헝클어뜨리고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로서의 ‘권위’를 약해지게 만드는 것이다.‘진짜 대한민국’은 부정적 표현우리말에도 이처럼 남발에 의해 본래 의미에서 왜곡된 채 쓰이는 말이 꽤 있다. “진짜 대한민국”이란 구호가 있다. 현 정부에서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부터 내세워온 공식 슬로건이다. 이 말은 구호로 나오기까지 정치적 취지야 이해하지만, 우리 어법에는 그리 좋은 표현이 아니다. 자칫 그동안 이어진 대한민국 성장사 전체가 부정되는 결과를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진짜’는 워낙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이라, ‘진짜 대한민국’도 대부분 별생각 없이 상투적으로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이 말은 문장 속에서 두 가지로 쓰인다. 가령 “진짜 예쁘다(아프다/잘생겼다/힘들다)”처럼 말할 때는 문장 안에서 부사로 사용된 것이다. 이때의 ‘진짜’는 ‘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으로’란 뜻이다. 다른 하나는 명사로 쓰인 구조다. “너의 진짜 속셈은 무엇이냐?” “진짜 도자기” “진짜 보석이네”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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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이중니죽]과 [이주기죽], 그리고 [이기주기기죽]
‘학여울역, 늑막염, 밤이슬, 순이익, 연이율, 괴담이설, 이죽이죽 ….’ 토박이말과 한자어가 섞인 이 말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모두 합성어란 점은 비교적 쉽게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조금 주의 깊게 살피면 또 다른 공통점이 보인다. 우리말 발음 현상 중 하나인 ‘ㄴ음 첨가’가 일어나는 말들이란 점이다. 이들을 발음해보면 각각 [항녀울력] [능망념] [밤니슬] [순니익] [연니율] [괴담니설] [이중니죽]으로 소리 난다. 이게 원래 올바른 표준발음이다.‘순이익’ 발음 [순니익]과 [수니익]하지만 현실 어법에서 이들을 정확히 발음하기는 쉽지 않다. 외려 [하겨울력] [능마겸] [바미슬] [수니익] [여니율] [괴다미설] [이주기죽] 식으로 받침을 흘려 발음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도 그런 발음이 많다 보니 일부는 규범으로 인정돼 복수 표준발음이 된 것도 꽤 있다.2017년 여름 국립국어원에서는 우리말 발음에서 바로 이 ‘ㄴ음 첨가’ 현상을 놓고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이 자리에서 ‘밤이슬, 순이익, 연이율, 괴담이설’ 같은 말의 발음이 복수 발음으로 허용됐다. 즉 [밤니슬/바미슬] [순니익/수니익] [연니율/여니율] [괴담니설/괴다미설] 식으로 양쪽 다 표준발음으로 인정한 것이다. 애초 ‘ㄴ음 첨가’ 현상이 일어난 발음만 표준으로 삼던 것에서 연음하는 쪽으로 바뀌어가는 현실 발음을 받아들인 셈이다.하지만 ‘학여울역, 늑막염’ 등은 받침이 흘러내린 발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에서 탄천과 양재천이 만나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점이 있다. 그곳에 1993년 서울지하철 3호선이 개통하면서 ‘학여울역’(강남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