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우리말 좀먹는 군더더기 '~바 있다'

    1926년, 일제의 억압에 신음하던 우리 민족은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를 중심으로 ‘가갸날’(한글날의 초기 명칭)을 제정했다. 우리말을 지켜내고 민족정신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우리 조선 문자는 세종대왕 훈민정음 서(序)에도 있는 바와 같이 ‘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사인인이습 편어일용이: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따름이니라)’라는 한 구절이 우리가 자부하는 바와 같이 명실이 상부하게 세계 문자 중 탁월한 바이 있다.” 조선일보는 이듬해 두 번째 가갸날을 맞아 10월 25일 자에 ‘가갸날을 기념하여’란 제목의 기획 기사를 실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예문에 잇따라 세 번 나오는 ‘~ㄴ 바’의 쓰임새다. 이 말은 우리말에서 어떻게 군더더기 신세가 됐을까. 문장 늘어지고 글 흐름 어색해져‘~ㄴ 바’는 순우리말이다. 예문에서도 확인되듯이 예전엔 지금보다 훨씬 자주 쓰였다. 특히 20세기 초 우리말 문장이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던 때, 예사롭게 쓰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그리 활발한 쓰임새를 보이는 것 같지 않다. 아마도 일상의 말이 아닌, 입말보다 글말에서 주로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비슷하게 쓰이는 ‘것’에 밀려 글말에서도 세력이 많이 약해졌다. 그런 만큼 역설적으로 이 말의 남용은 글의 흐름을 더 어색하게 만든다. ‘~ㄴ 바’는 앞에서 말한 내용 자체나 일 따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해라.” “나라의 발전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 “내가 알던 바와는 다르다.” 이런 쓰임새는 비교적 자연스럽다. 다음 문장에선 좀 다르다. “그는 세계대회에 여러 차례 출전한 바 있다.” “000 정부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영수회담의 '영수'는 '옷깃과 소매'에서 유래

    최근 ‘영수회담’이 불거져 나와 정쟁의 빌미가 됐다. 영수회담은 아주 가끔 언론을 통해 등장하는데, (국립국어원)에는 없고 고려대 에는 올라 있다. 일상의 언어가 아니기에 더 낯설다. 이 말이 정쟁을 부르는 까닭은 그 쓰임새에 대한 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영수는 정당이나 큰 집단의 ‘우두머리’영수회담의 ‘영수(領袖)’는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이른다. 사전에 따라 풀이가 미세하게 다르다. 은 “여러 사람 가운데 우두머리”라고 쓰고, 은 “정당이나 큰 집단의 우두머리”라고 썼다. 연세사전 풀이가 좀 더 피부에 와 닿는다. 한편 고려대 에선 영수회담을 “한 나라에서 여당과 야당 총재들의 회담”으로 설명했다. 이런 풀이는 최근 정치권에서 회자된 영수회담이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수(領袖)는 어떻게 우두머리란 뜻을 갖게 됐을까? 말의 생성 과정을 알고 나면 우리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자긍심도 한층 더 높아진다. 요즘 ‘요령(要領)’이라고 하면 적당히 잔꾀를 부리는 짓으로 통한다. 그것은 반은 맞는 얘기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뜻이 있다. ‘가장 긴요하고 으뜸이 되는 골자나 줄거리’가 요령의 본래 의미다. 要(요)는 애초에 허리, 즉 여성이 잘록한 허리에 두 손을 댄 모습을 그린 글자다. 이후 허리가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위라는 의미가 더해지면서 ‘중요하다’란 뜻을 갖게 됐다. ‘령(領)’ 역시 주로 ‘거느리다, 다스리다’란 뜻으로 쓰이지만 본래는 ‘옷깃’을 뜻하는 말이다. 옷깃은 저고리에서 목에 둘러대어 여밀 수 있게 한 부분이다. 이 ‘옷깃’은 옷 전체의 중심이라, 여기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지도자’나 ‘통솔하다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접속어 줄이면 문장에 힘이 생기죠

    “공문식(公文式) 제14조: 법률·칙령은 모두 국문(國文)을 기본으로 하고, 한문으로 번역을 붙이거나 혹은 국한문으로 혼용한다.” 구한말인 1894년 11월 고종 칙령 1호가 공포됐다. 당시 개화파가 추진한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이른바 ‘갑오개혁’을 뜻한다. 우리말 역사로 보면 한글이 우리나라 공문서의 공식 문자로 처음 등장한 순간이다. 그동안 언문으로 불리며 천시되던 한글이 비로소 ‘국문(國文)’이란 위상을 갖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하지만 당시 지배층의 주요 표기 수단은 여전히 한자였다. 법률과 칙령을 모두 한글로 적는다고 공포하면서, 정작 그 문자는 한자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올해 제577돌을 맞은 ‘한글날(10월 9일)’은 처음엔 ‘가갸날’로 출발했다. 일제강점기 아래 신음하던 시절이었다.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에서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일로 삼았다. 그때가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꼭 480년 되던 해였다. 한글날이 지금처럼 10월 9일로 된 것은 1940년 경북 안동에서 이 발견된 덕분이다. 이 책 말미에 ‘정통 11년 9월 상한(正統十一年九月上澣)’에 책으로 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라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반포일로 추정하고, 이를 다시 양력으로 환산해 나온 것이 10월 9일이다. 우리말이 지금과 같은 기틀을 갖춘 데는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 공이 크다. 해방 이후 그는 두 차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편수국장을 지내면서 우리말 문법 체계를 갖추는 데 매진했다. 당시 편수국장은 한글 교과서를 새로 펴내고, 우리말 순화 작업을 진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주어와 서술어 일치시켜야 정확한 문장

    구한말 1895년 열강의 각축 속에 일단의 일본 자객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죽이는 사건이 벌어졌다. 을미사변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한다. 누군가 이를 ‘명성황후 살해사건’이라고 했다면 무엇이 문제가 될까? ‘시해(弑害)’란 부모나 임금 등을 죽임을, ‘살해(殺害)’는 사람을 해치어 죽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두 말의 결정적 차이는 누구의 관점이냐에 있다. ‘시해’는 나와 우리의 관점인 데 비해 ‘살해’는 제삼자 관점에서 쓰는 말이다. 그러니 모국어 화자는 당연히 우리 관점을 담아 ‘시해’라고 해야 한다. ‘~로 보인다’는 필자가 판단하는 표현글을 쓰다 보면 타인의 말이 아니라 나의 말로 전달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글을 ‘주체적 관점’에서 써야 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지금 말하는 게 나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얘기임을 드러내야 할 때가 있다. 지난 호에서 설명한 ‘이른바’를 사용해 “남들이 그리 말하더라”라는 의미를 더해주는 문장론적 기법이 그런 방법론 중 하나다. 그것이 바로 전달 어법이다. 저널리즘 글쓰기에서 이처럼 나의 말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임을 드러내는 것은 글에 객관성을 불어넣는 길이기도 하다. 이때의 객관성은 물론 형식논리상의 객관성을 말한다. 자칫 언론의 ‘객관성’을 쉽게 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본질을 보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하는 얘기일 뿐이다. ‘객관성’ 개념은 실현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그래서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 내용의 참·거짓 여부에 상관없이 문장 형식이 객관성을 띠고 있느냐 여부에 있다.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는 게 좀 더 쉽다. “물가상승으로 단체 급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이른바'를 쓰면, 문장의 객관성 높아지죠

    가) 북한의 열병식은 건군절(2월 8일)과 이른바 전승절(한국전쟁 정전협정기념일·7월 27일)에 이어 올해 들어서만 세 번째다. 나) 북한의 올해 열병식 개최는 지난 2월 8일 75주년 건군절(조선인민군 창건일) 기념 열병식과 7월 27일 73주년 전승절(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 기념 열병식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9일 북한이 정권 수립(9·9절) 75주년을 맞아 열병식을 개최했다는 소식이 우리 언론을 통해 일제히 알려졌다. 가)와 나)는 조금씩 표현이 다르긴 하지만, 얼핏 봐도 동일한 문장이 변형된 형태임을 알 수 있다.‘이른바’는 ‘남들이 그러는데’라는 뜻공통된 핵심어를 꼽으면 ‘북한, 올해, 열병식, 건군절, 전승절, 세 번째’ 등으로, 두 문장이 같은 의미를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저널리즘의 눈으로 보면 서로 큰 차이를 보인다. 가)는 저널리즘 언어로 쓰인 데 비해 나)는 저널리즘적이지 않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는 ‘이른바’에 있다. 이 말은 저널리즘 언어가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한 여러 장치 중 하나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른바’는 ‘이르다+바’가 결합해 생긴 부사로, 한자어 ‘소위(所謂)’와 같은 말이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부사어 하나가 더 붙고 안 붙고의 차이지만, 그 결과는 천양지차다. 뉴스 문장을 저널리즘 언어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인 셈이다. ‘이른바’는 어떤 과정을 거쳐 저널리즘의 객관성을 담보해주는 것일까? ‘이른바’는 뉴스 문장 작법의 기본 원칙인 ‘전달 어법’을 구현하는 수단이다. ‘전승절’은 북한에서 한국전쟁 정전협정 체결일을 가리키는, 저들의 용어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뜻의 ‘전승절’은 우리에겐 얼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명사문 보다 동사문 쓰면 문장에 힘이 실려요

    가) 9일 기상청에 따르면 ‘카눈’은 10일 오전 (…) 내륙을 관통해 북진하고, 11일 새벽 북한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나) 일부 국가 잼버리 대원들은 출국 일정을 미루고 한국에서 문화 탐방과 관광 일정을 이어갈 예정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2023 새만금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 대회가 지난달 11일 서울에서 K-팝 공연을 끝으로 대장정을 마쳤다. 그 사이 태풍 카눈의 북상과 잼버리 대원들의 이동 과정을 전한 언론들의 뉴스 문장 중에는 글쓰기 관점에서 주목할 만한 표현이 있다. 서술어 ‘예정이다’를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두 문장은 문법적으로 같은 것 같지만 실은 다르다. 정상적 명사문과 비정상적 명사문가)와 나)를 골자만 추리면 각각 ‘카눈은 ~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대원들은 ~ 이어갈 예정이다’이다. 같은 문형이지만 읽을 때 자연스러움의 정도가 다르다. 비문 여부에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가)는 비문이다. ‘카눈=예정’이 성립하지 않는다. 나)는 학자마다 다소 논란이 있지만 정상적 명사문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대원들=예정’, 즉 예정의 주체는 대원들이기 때문에 주어와 서술어를 동격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측면에서 두 문장을 비교해보자. 가)의 ‘예정’은 명사문 성립 여부는 둘째치고 어휘론적으로 ‘단어 선택의 오류’이기도 하다. 예정은 ‘할 일을 미리 정하는 것’이다. 주체의 의지나 의도가 반영된 가치어다. 유정체에만 이 말을 쓸 수 있다. 태풍의 진로는 ‘예정’할 수 없고, 사람이 예측·관측하거나 예상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가)는 ‘카눈’을 주어로 삼으려면 피동으로 쓸 수밖에 없다. 즉 ‘카눈은 ~ 북한으로 이동할 것으로 관측된다’가 올바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관형어 남발, 문장 힘 빠지고 의미도 모호해져

    “올해 매출 목표는 5,500억 원이다. 3년 안에 매출 1조 원 브랜드로 키운다는 목표다.” 한 중견 기업의 경영지표를 소개하는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우리의 관심은 두 번째 문장에 있다. 명사문 형태인데, 비정상적으로 쓰였다. “~브랜드로 키운다는 것이 (그의) 목표다.” 이렇게 써야 완성된 문장이다. 원래 이런 구조에서 문장 주어 ‘것이’를 버리고(그럼으로써 자동으로 의미상 주체인 ‘그의’도 사라진다) 주어를 꾸며주던 관형절이 바로 서술부의 명사(‘목표’)를 수식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비정상적 명사문인 예문은 이렇게 생성됐다. 신문 언어의 한 형식으로 자리 잡은 이러한 문장이 주위에 넘쳐난다. 여러 차례 살펴온, 관형어 남발로 인한 우리말 문장의 왜곡되고 일탈된 여러 형태 중 하나에 해당한다.힘 있게 쓰려면 명사문을 버려라관형어 남발은 필연적으로 명사문을 만든다. 명사문(‘무엇이 무엇이다’ 꼴)은 동사문(‘무엇이 어찌하다’), 형용사문(‘무엇이 어떠하다’)과 함께 서술어에 따른 우리말 문장의 세 형식 중 하나다. 일반적으로 신문 언어의 특징은 동사문으로 써야 할 것을 자꾸 명사문으로 쓰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잘못된 글쓰기 습관 탓이다. 동사문에 비해 명사문은 대부분 문장의 힘이 덜하다. 명사문을 남용하면 힘 있는 문장 쓰기에 실패하기 십상이다. 심하면 주체도, 의미도 모호하게 만든다.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영(令)이 안 선다.’ 과거 한 지자체장은 만날 때마다 ‘영’을 언급했다. 전임자가 분위기를 너무 풀어놓는 바람에, 업무 지시를 하면서 되레 상관이 눈치를 봐야 한다는 하소연이었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세 번째 문장이다. 골자는 ‘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신어 '대립각'에서 파생된 유행어 '~각'

    가) 북한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의에 참석해 발언한 것은 약 5년 7개월 만으로, 한·미·일을 포함한 서방과 북·중·러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웠다. 나) 여야는 4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를 놓고 날 선 공방을 벌였다. 최근 화제가 된, 북한의 ICBM과 일본의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를 전한 뉴스 문장 한 토막이다. 두 문장의 서술 부분은 서로 다른 형태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준다. 포인트는 ‘날카로운 대립각’과 ‘날 선 공방’이다.단어 결합력 높아 … 다양한 파생어 낳아대립각(對立角)은 사전에서 “의견이나 처지, 속성 따위가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어 생긴 감정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지금은 흔히 쓰이고 자연스럽지만,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쓰던 우리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999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에도 이 말이 없었다. 언론에선 이미 1990년대 중반께부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초반에는 ‘대립각을 세우는/형성하고/구축하며’ ‘대립각으로 맞서’ ‘대립각이 커져가며’ 등 다양한 서술어와 함께 사용했다. 이는 새로 나온 말에 대한 개념 정리가 덜 돼 있을 때 생기는 일반적 특징이다. 정형화된, 궁합이 잘 맞는 서술어가 자리 잡지 못했다는 뜻이다. 대립각은 2000년대 들어 쓰임새가 급격히 늘면서 점차 ‘대립각을 세우다’란 말로 수렴돼 갔다. 하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에는 ‘대립각’이 표제어로 오르지 않았다. 2010년까지도 국어원에선 대립각의 표기를 ‘대립 각’으로 띄어 쓰는 게 맞다고 설명했다. ‘대립’과 ‘각’이 각각의 단어라는 점에서다. 지금은 웹 에 올라 있다. 이 말이 정식 단어로 대접받은 게 불과 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