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큰사전 원고'는 식민지배 상황 속에서 독립을 준비한 증거물이자 언어생활의 변천을 알려주는 생생한 자료다. 일제가 패망했던 1945년 9월 서울역 화물창고에서 아무도 모르게 잠자고 있던 2만6500여장 분량의 원고 뭉치를 극적으로 발견, 사전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이자 우리말 지식의 보고인 <조선말큰사전> 편찬 과정은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일제의 우리말 탄압이 갈수록 심해지던 1929년 음력 9월 29일(양력 10월 31일), 조선교육협회에서 각계 인사 108명이 모여 제483돌이 되는 한글날 기념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회가 조직됨으로써 사전 편찬 작업이 시작됐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통일된 맞춤법이 필요했다. 그에 따라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 10월 ‘한글 마춤법 통일안’을 발표한다. 이어 1936년 10월엔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펴냈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 속에 어렵사리 꾸려오던 편찬 작업은 1942년 10월부터 노골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학자·후원자 등 30여 명이 체포, 구금되고 사전 원고는 압수됐다. 당시 원고는 16만여 어휘를 풀이까지 마친 상태로 거의 완성 단계였다. 하지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해 한글학자 이윤재·한징 선생이 고문으로 옥사하는 등 사전 편찬을 주도하던 학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편찬 작업은 중지됐다. 식민 탄압 증언하는 인류 문화유산광복을 맞아 편찬 작업 재개에 나선 조선어학회는 또 다른 시련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그동안 모아뒀던 사전 원고가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증거물로 압수됐다가 고등법원 상고로 증거물만 먼저 서울로 발송했는데, 일제 패망의 와중에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아무도 모르게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1945년 9월 8일 원고 뭉치를 발견하면서 조선어학회는 사전 편찬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첫 결실은 1947년 한글날에 출간한 <조선말큰사전> 제1권이었다. 이어 해를 거듭하며 제2권(이때부터 <큰사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제3권을 순차적으로 발행했으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큰사전> 편찬 작업은 또다시 큰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조선어학회에서 이름을 바꾼 한글학회는 휴전협정 뒤 사전 편찬 작업을 재개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정부의 ‘한글 간소화안’이 발목을 잡았다. 훗날 ‘한글파동’으로 명명된 이 사태는 거센 국민적 논란과 저항을 불러왔고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이 한글 간소화 포기 담화문을 발표하면서 가라앉았다. 이후 한글학회는 사전 편찬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해 1957년 제4·5권을 잇달아 낸 뒤 같은 해 한글날에 제6권을 펴냄으로써 비로소 <큰사전>을 완간하게 된다. <큰사전>은 이후 1991년 내용을 깁고 더한 뒤 <우리말 큰사전>으로 재탄생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