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글날'(10월 9일)은 제578돌을 맞았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이를 반포했다. '한글날'은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578주년이란 숫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글날은 창제보다 반포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Getty Images 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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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 ‘씨슨’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 / ‘데-’보다 읽기 좋고 ‘씨슨’보다 알기 쉬워요/ … /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가르쳐줄 수 있어요.” 만해 한용운은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 ‘가갸날’의 탄생 소식에 벅찬 심정으로 그 감격을 노래했다. 승려이면서 독립운동가이자 시집 <님의 침묵>으로 너무도 유명한 그가 한글 예찬론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조선어연구회의 ‘가갸날’이 시초‘데-’는 데이(day), ‘씨슨’은 시즌(season)을 적은 것이다. 외래어표기법도 없던 시절이었다. ‘축일’이나 ‘제일’ 같은 한자어보다, ‘데이’나 ‘시즌’ 등 외래어보다 한글이 읽기 좋고 알기 쉽다고 말한다. 사례만 다를 뿐 무겁고 난해한 한자어와 낯선 외래어 사용이 넘쳐나는 요즘도 통하는 주장이다. 시의 마지막 행은 “온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해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여”라고 기원하며 마무리지었다. 조금 과장하면 정보화시대 들어 꽃피운 한글 세계화를 100년 앞서 이끈, 선구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만하다.

‘가갸날’은 한글날의 처음 이름이다. 한글날의 유래는 일제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3·1운동 직후인 1921년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돼 조선어연구회라는 민간단체를 결성했다. 여기에 최현배, 이병기, 이윤재 등 한글학자들이 속속 참여하면서 민족운동단체로 발전했다. 이들은 당시 민족정기를 되살리고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일로 삼아 그 정신을 기리기로 했다. 그때가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이다. 당시만 해도 ‘한글’이라는 명칭이 일반 대중에게 익숙하지 않았기에, 한글을 처음 배울 때 읊는 ‘가갸거겨…’에서 착안해 ‘가갸날’이라고 이름을 정했다.

2년 뒤인 1928년 지금 같은 한글날로 명칭이 바뀌고, 날짜도 양력으로 10월 28일로 결정되었다. 한글날이 지금처럼 10월 9일로 된 것은 1940년에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해례본)이 발견된 덕분이다. 이 책 말미에 ‘정통 십일년 구월 상한(正統 十一年 九月 上澣)’에 책으로 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에 따라 음력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9월 10일을 반포일로 추정하고, 이를 다시 양력으로 환산해 나온 게 10월 9일이다.창제 3년 뒤 훈민정음이 완성되다<훈민정음>(해례본)은 한글의 원리와 창제 취지를 기록한 책이다. 세종 28년(1446)에 훈민정음 28자를 세상에 반포할 때에 찍어 낸 것으로, 일종의 해설서에 해당한다. 우리나라 국보이자 199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훈민정음을 설명한 책이지만 한문으로 돼 있다는 점도 함께 알아둘 만하다. 간혹 훈민정음, 즉 한글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줄 알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한글이 아닌 이 책으로서의 <훈민정음>이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이다.

올해 ‘한글날’(10월 9일)은 제578돌을 맞았다. 세종대왕이 1443년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446년에 이를 반포했다. ‘한글날’은 그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578주년이란 숫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글날은 창제보다 반포에 더 방점이 찍혀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역사에 처음 나타난 것은 <세종실록> 1443년(세종 25년) 음력 12월 자 기록에서다. “이달에 임금께서 몸소 언문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내니 … 이것을 훈민정음이라 부른다(是月上親制諺文二十八字 … 是謂訓民正音)”라는 기록을 바탕으로 한다. 북한에서는 이를 토대로 양력 날짜로 계산해 1월 15일을 훈민정음 창제일로 정해 ‘조선글날’로 기념한다.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우리나라는 창제일이 아니라 반포일을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당시 훈민정음이 만들어졌다는 기록만 있을 뿐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문제점을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3년 뒤인 1446년 9월(음력) 비로소 <훈민정음>(해례본)이라는 책이 완성됐고, 이를 반포로 보는 것이다. 이는 <세종실록> 1446년 (세종 28년) 음력 9월 자로 기록된 “이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됐다(是月訓民正音成)”라는 기록에서도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