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책임’을 뜻하는 말이다. ‘어린아이들이 으레 치르는 홍역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아이가 홍역을 앓고 나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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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일까지 신고된 홍역 환자는 모두 52명이다. 이는 지난해 1년간 발생한 환자 49명보다 많은 것으로, 2019년(연간 194명) 이후 6년 만에 최다다.”

이달 4일 국내 홍역 환자가 다시 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한동안 화제가 됐다. 우리나라는 2014년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홍역 퇴치국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도 소규모 환자가 계속 생기는 이유는 이들 대부분이 해외에서 유입되어서다.‘제구실’은 환유 통해 탄생한 조어‘홍역(紅疫)’은 1~6세의 어린이에게 많이 발생하는 급성전염병이다. 온몸에 좁쌀 같은 붉은 발진이 돋는다고 해서 붉을 홍(紅) 자와 염병 역(疫) 자를 써서 이름 지었다. 이름에는 병에 대한 단서가 담겨 있다. ‘후진국형 질병’이라고 할 만큼, 의료시설과 후생이 열악하던 지난 시절엔 아주 흔한 병이었다.

그런 만큼 우리말에도 그 존재감이 역력히 남아 있는데, ‘제구실’이 그것이다. ‘제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나 책임’을 뜻하는 말이다. “제구실도 못 하는 주제에 남의 걱정을 한다” 같은 게 전형적 용법이다. 여기에 더해 ‘어린아이들이 으레 치르는 홍역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아이가 홍역을 앓고 나야 비로소 사람 구실을 한다는, 그만큼 누구나 치러야 하는 역병이라고 해서 생겨난 이름이다.

“홍역을 치렀다”라는 관용구에도 이 질병에 대한 무서움이 담겨 있다. 이는 어떤 일에서 ‘몹시 애를 먹거나 어려움을 겪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큰아들의 가출로 온 집안이 홍역을 치렀다”처럼 쓴다. 그러니 홍역의 또 다른 이름인 ‘제구실’은 언어의 의미확대이자 상징적 의미가 담긴, 일종의 의역어인 셈이다.

수사학적으로는 환유에 해당한다. 환유법은 비유법의 하나로, 어떤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거나 그것을 연상시키는 다른 낱말을 빌려서 표현하는 방식이다. 우리나라를 ‘금수강산’으로, 간호사를 ‘백의의 천사’ 등으로 나타내는 표현법이다. 어떤 일을 시작하거나 조직이 출발하려 할 때 흔히 “닻을 올리다”라고 하는데, 이 또한 환유법의 예다.1930년대 이미 ‘홍역’ 대체어로 쓰여‘제구실’처럼 우리말 조어 중 비유법을 이용해 만들어진 말의 효과는 ‘어휘화’에 있다. ‘홍역’이라는 고유명사가 보통명사로 치환되는 것이다. 이는 그 말을 비유이지만 비유로 느껴지지 않게 한다는 데서 말 자체에 강력한 힘이 실리게 한다. ‘제구실’의 어휘화는 아주 오래전에 이뤄졌다. 최초의 국어사전인 문세영의 <조선어사전>(1938년)에 이미 “어린애들이 으레 앓는 홍역 등 역질을 일컫는 말”로 올라 있다.

‘제구실’은 어원적으로는 합성어다. ‘구실’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뜻하는 고유어인데, 이와 어울린 ‘제’의 정체가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순 우리말 ‘제’는 ‘저’에 주격조사 ‘-이’ 또는 관형격조사 ‘-의’가 결합해 줄어든 말이란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저’는 어떨 때 쓰는 말일까? 이는 말하는 이가 윗사람일 때 자기를 낮춰 가리키는 일인칭대명사다. 주격조사 ‘-가’가 붙으면 ‘제’가 된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라고 할 때처럼 주격조사가 뭐가 붙느냐에 따라 ‘저’와 ‘제’가 달라진다.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여론독자부장·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제’의 두 번째 용법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삼인칭대명사’다. “그는 제가 지은 잘못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에 쓰인 ‘제’가 삼인칭대명사다. 이때의 ‘제’는 어원적으로 ‘저’에 격조사 ‘-이’가 결합한 말이다. 세 번째 용법은 “제 생각에는 이게 좋겠습니다” 같은 데 쓰인 ‘제’다. 이때는 ‘제’가 ‘저의’로 분석되는데, 이는 ‘저’에 관형격조사 ‘-의’가 결합해 줄어든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삼인칭대명사로 쓰인 ‘제’다. 이 말이 여러 합성어를 만들기 때문이다. ‘제구실’을 비롯해 ‘제정신/제값/제격/제자리/제고장/제때/제멋/제맛/제짝/제집/제힘’ 등 많은 말과 어울려 우리말 어휘를 풍성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