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권(席卷)'이란 돗자리를 만다는 뜻으로, 빠른 기세로 영토를 휩쓸거나 세력 범위를 넓힘을 이르는 말이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다' '수영 전 종목 석권을 노리다'처럼 쓴다. 단일 경기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을 두고 '석권'이라고 하지 않는다.
지난 5월 3박5일간 방미 외교활동을 펼친 문재인 대통령은 당시 우리말과 관련해서도 생각할 거리 하나를 던졌다. “최고의 순방이었고, 최고의 회담이었다.” 문 대통령이 5월 23일 워싱턴DC에서 조지아주 애틀랜타로 이동하는 비행기 안에서 회담 성과를 자평하며 페이스북에 올린 문구다. 이때 쓰인 ‘순방’이 이상하다. ‘대첩’은 곧 ‘큰 승리…싸움 전에 써선 안돼순방(巡訪)은 ‘돌 순, 찾을 방’, 즉 여러 곳(나라나 도시 등)을 돌아가며 방문할 때 쓰는 말이다. 외국 방문이라면 가령 ‘유럽 4개국 순방’ 같은 것이고, 국내 상황이라면 ‘광역시 순방’ 식으로 말한다. 문 대통령의 방미 활동은 순방이 아니라 ‘방문’ 정도가 적합했다. 이에 비해 문 대통령이 지난 6월 11일 영국으로 출발한 일정이 바로 ‘순방’이다. 문 대통령은 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데 이어 17일까지 오스트리아, 스페인 등을 차례로 방문했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개념이 복잡다단하게 분화해 새로운 말이 파생해 나온다. 이에 따라 말도 더 섬세하게 사용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단어를 정교하게 쓰지 않는다. 있는 말조차 지키지 않고 대충 두루뭉술하게 쓰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선거철만 되면 단골손님처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OO 후보들, 주말 수도권 대첩 벌인다.” 행주대첩, 한산도대첩, 청산리대첩…. 다들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이다. 모두 싸움에서 크게 이긴 것을 나타낸다. ‘대첩(大捷)’이란 그렇게 쓰는 말이다. ‘큰 대, 이길 첩’ 자다. ‘대승(大勝)’과 비슷하다. 당연히 싸움을 앞두고 쓰는 게 아니라, 이미 승패가 갈린 뒤에 쓰는 말이다. ‘오는 8월 한·일 라면대첩을 앞두고~’ 같은 표현이 생뚱맞은 건 그런 까닭이다. ‘큰 싸움’ ‘대전(大戰)’ ‘한판승부’ ‘맞짱 뜬다’ 등 문맥에 맞게 다양한, 적절한 표현을 찾아 쓸 수 있다. 1등 자리 아닌데 ‘등극’이라 하는 건 잘못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해 잘못 쓰는 사례를 몇 개 더 들어보자. 어떤 한 분야에서 1위에 올랐을 때 ‘석권’이란 말을 쓰기 쉽다. “홍길동 선수는 남자 개인전 단식을 석권한 데 이어~.” ‘석권(席卷)’이란 돗자리를 만다는 뜻으로, 빠른 기세로 영토를 휩쓸거나 세력 범위를 넓힘을 이르는 말이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다’ ‘수영 전 종목 석권을 노리다’처럼 쓴다. 단일 경기에서 1등을 차지한 것을 두고 ‘석권’이라고 하지 않는다. ‘등극(登極)’도 비슷한 오류에 빠지기 십상이다. ‘오를 등, 지극할 극’이다. 본래는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뜻했는데, 지금은 쓰임새가 확장돼 어떤 분야에서 가장 높은 자리나 지위에 올랐음을 나타낼 때 주로 쓰인다. ‘챔피언 등극’, ‘국제대회 정상 등극’처럼 쓴다. 그러니 “‘트롯돌’ 이찬원, 아이돌 차트 11주 연속 TOP2 등극” 같은 표현은 적절치 않다. “카카오그룹, 시총 기준 재계서열 5위 등극” “BTS 멤버, 200억대 주식 부자 등극”도 다 단어의 의미용법을 잘못 알고 쓴 표현이다. 동시에 글쓰기 오류 중 하나인, 지나치게 부풀린 과장어법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1960년대와 1970년대 IBM이 지배하던 컴퓨터시장을 마이크로소프트가 탈환했지만, 이젠 그 마이크로소프트도 구글과 스마트폰 등장으로 1위 자리에서 밀려나고 있다.” 이런 문장에 쓰인 ‘탈환’도 마찬가지 오류다. ‘탈환’은 빼앗겼던 것을 도로 찾아올 때, 또는 전에 1위였는데 밀려났다가 다시 1위를 차지했을 때 쓰는 말이다. 문맥상 ‘~컴퓨터시장은 마이크로소프트로 대체됐지만’ 정도로 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