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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습 길잡이 기타

    나만 못한 사람이 나를 헐뜯는 경우가 많다. - 청성잡기

    ▶ 「내 어려서부터 세상사 많은 경험을 하다 이제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헐뜯고 칭찬하는 것은 늘 있는 일, 겪을 만큼 이미 겪었다. 대체로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나를 예뻐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은 나를 좋아하고, 나만 못한 사람은 나를 헐뜯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남을 헐뜯는 사람을 볼 때마다 말했다. “그대가 어찌 저 사람만 못하겠소. 무엇하러 그를 헐뜯는단 말이오!” 헐뜯던 자는 대부분 내 말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러나 공정한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는 자 또한 드물다. 약하여 다루기 쉬우면 예뻐하는 것일 뿐이다. 어린아이는 데리고 놀 수 있기 때문에 모두 예뻐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거칠게 대들면 바로 미워한다.」 성대중이 쓴 『청성잡기』에 나온 글이다.이제 나 자신을 돌아봐야겠다. 내가 누구를 예뻐하고, 누구와 친하고, 누구를 험담하는지 말이다. 그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시선으로 내 민낯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마디 속 한자 - 毁 훼 헐다▷훼방(毁謗) : 1. 남을 헐뜯어 비방함 2. 남의 일을 방해함▷적공지탑기훼호(積功之塔豈毁乎) : 공을 들인 탑이 어찌 무너지랴? 정성을 기울여 이룩해 놓은 일은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송내고 교사 hmhyuk@hanmail.net

  • 경제 기타

    소비와 물류의 중요성 인식한 ‘박 제 가’

    광복 이후 우리나라에 경제학이 전래되기 전에 우리 자체적인 경제학적 토양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을 외국인으로부터 받는다면, 우리는 이 분 덕분에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은 다름 아니라 박제가다. 박제가는 경제활동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적한 일련의 요인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경제원리들이다. 박제가는 원래 서자 출신으로 흔히 말해 과거(문과)에 응시할 자격조차 없었다. 하지만 정조 시기가 되어 이러한 규제가 조금씩 풀리자 박제가는 규장각 검사관이라는 관직에 오르게 된다. 검사관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에서 도서를 관리하는 오늘날로 따지면 사서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관직이었다. 말단 관료였던 박제가를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 내지 경제적 식견을 가진 인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의 저서 때문이다. 는 크게 내편과 외편으로 구분된다. 외편에서는 농업 관련 내용이 주로 기술되어 있으며, 내편에서는 오늘날의 물류, 건축, 외국어와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박제가가 이러한 북학의를 저술하게 된 궁극적인 배경 중 하나는 당시 부강한 청나라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밝히고 이 과정에서 조선이 가난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함이었다. 를 통해 박제가는 조선이 가난한 원인 중 하나를 검소함에서 찾았다. 당시 사회는 유교를 국가의 지배 이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검소함을 미덕의 하나로 삼고 있었으며, 심지어 이윤을 남기는 것은 천한 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흔히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이문(이익을 남기는 돈)을 남기는 상인들의 신분을 가장 천

  • 학습 길잡이 기타

    곤경에 처했을 때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가난할 때 무엇을 취하지 않았는지 살펴보라. -사기

    ▶위(魏)나라 문후가 위성과 책황 중 누구를 재상으로 삼을지 이극(李克)에게 물었다. 이극은 “거처할 때 그가 누구를 가까이하는지, 부유할 때 그가 누구에게 베풀었는지,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그가 누구를 천거했는지, 곤경에 처했을 때 그가 무엇을 하지 않았는지, 가난할 때 그가 무엇을 취하지 않았는지, 이 다섯 가지만 살펴보면 충분히 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문후는 이 말을 듣고 위성을 재상으로 삼았다.이후 책황이 자신이 위성보다 못한 점이 무엇이냐고 이극에게 따졌다. 이극은 “위성자는 자신이 받은 녹봉의 10분의 9를 밖에서 쓰고, 10분의 1만 집에서 사용했기에 복자하, 전자방, 단간목을 얻었고, 왕이 이 세 사람 모두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천거한 다섯 사람은 왕이 모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대가 어찌 위성자와 견줄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에 책황이 공손히 두 번 절을 하고 평생 제자가 되겠다고 했다.사람을 친분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천거하고 등용하는 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깊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며 지금 우리를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마디 속 한자 - 視(시) 보다▷ 坐視(좌시) : 참견하지 아니하고 앉아서 보기만 함.▷ 虎視眈眈(호시탐탐) : 범이 눈을 부릅뜨고 먹이를 노려본다는 뜻으로, 남의 것을 빼앗기 위해 형세를 살피며 가만히 기회를 엿봄. 또는 그런 모양.송내고 교사 hmhyuk@hanmail.net

  • 경제 기타

    토마토=이탈리아, 와인=프랑스…왜?

    식문화(食文化)는 기후와 토양에 적합한 식재료를 생산하고, 이를 저장가공해 조리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음식을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나누는지를 모두 포괄한다. 따라서 식문화는 단순한 영양 섭취의 의미를 넘어 한 사회가 형성해온 생활방식이나 문화에 버금가는, 국가와 민족을 대변하는 정체성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리아의 정체성은 토마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평가받는 피자와 파스타는 토마토 없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토마토를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국가가 이탈리아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이탈리아와 토마토는 불가분의 관계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식재료로써 토마토가 각광받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전의 일이 아니다. 이탈리아인들이 처음 토마토를 접한 것은 16세기의 일로, 당시 식민지 건설에 나선 스페인이 라틴 아메리카에서 들여온 토마토를 이탈리아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마저도 도입 초기에는 토마토의 못생긴 외모 탓에 독이 있는 식물로 오해받아 주로 관상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던 중 17세기에 이르러 이탈리아 나폴리 지방에서 토마토를 활용한 요리법이 처음으로 등장하면서 식재료로써 토마토의 명성이 시작되었다.나폴리는 세계 최고의 토마토로 평가받는 ‘산 마르자노’의 산지로, 지금도 이탈리아 토마토 문화의 중심에 서있다. 17세기부터 서서히 장식용이 아닌 식용으로 쓰이기 시작한 토마토는 18세기 이후 다양한 요리법의 발견에 힘입어 이탈리아를 넘어 전 유럽의 식탁을 점령하기에 이른다. 특히 19세기 들어 파스타의 소스로 토마토가 사용되고,

  • 학습 길잡이 기타

    비웃은 자가 남아 있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가 남아 있을까? -탄만집

    ▶『탄만집』‘송정일사입해유한라산’에 있는 글로, “정(鄭)일사(逸士)가 삼한의 아름다운 산수를 모두 보고, 장차 바다를 건너 탐라로 들어가 한라산을 유람하려고 하자,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속물근성이 뼛속까지 들어간 자로서는 비웃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수백년 뒤 비웃은 자가 남아 있을까? 비웃음을 당한 자가 남아 있을까? 나는 알지 못하겠다”의 일부예요.정(鄭)일사(逸士)는 요즘으로 말하면 여행 칼럼니스트인 정란(鄭瀾·1725~1791)을 가리켜요. 정란이 제주도 한라산을 보기 위해 떠나려 하자 모두가 그를 비웃었다고 해요. 당시 문장가이던 이용휴는 말해요. 수백년이 지난 뒤 사람들은 여행가 정란을 기억하지, 비웃기만 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당신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라고.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처음에는 비웃음을 받아요. 만약 여러분이 무엇인가 시도하려는데 모두가 비웃는다면 생각하세요. ‘내가 세상을 바꾸려나보다’라고 말이에요.▶ 한마디 속 한자 - 笑(소) 웃다▷ 微笑(미소): 소리 없이 빙긋이 웃음. 또는 그런 웃음.▷ 破顔大笑(파안대소): 매우 즐거운 표정으로 활짝 웃음.                                                           송내고 교사 hmhyu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