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
애덤 스미스와 그의 저서 《국부론》이 경제학의 태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그 이유는 ‘보이지 않은 손’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가 처음으로 시장 메커니즘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순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부론에는 시장 메커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효율성 못지않게 다양한 경제원리에 대한 그의 탁월한 식견이 기술되어 있다. 그중 하나가 조세 징수에 대한 일반원칙을 천명한 것이다.스미스의 국부론의 마지막 장인 5편은 조세문제와 조세징수에 대한 일반원칙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 기술된 조세 부과의 일반적인 원칙은 오늘날 현대적인 조세징수의 법적 근거들과 그 맥을 같이한다.
국부론에 기술된 조세징수의 원칙은 크게 네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세금은 국민의 지불능력을 고려하여 징수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흔히 평등의 원칙이라 하는데, 조세 징수 과정에서 특권계급의 특혜를 인정하지 않고, 국민이면 누구나 능력에 따라 비례하여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다음으로 세금은 국가가 임의적으로 징수해서는 안 되며 납세 방식, 시기, 규모를 법에 근거하여 부과해야 한다는 사실이 제시되어 있다. 이를 확실의 원칙이라 부르는데, 납세자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근거에 따라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세 번째는 편의성의 원칙으로 부른다. 세금은 납세자가 납부하기 편리한 방식으로 징수되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마지막으로 조세 징수 과정에서 불필요한 비용이 유발되지 않도록 효과적인 제도를 구비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를 징세비용 최소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스미스가 천명한 이러한 조세부과의 원칙은 조세부과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담보하는 기준을 제시하여 근대 조세제도 구축의 중요한 원칙으로 작용해 왔다. 그렇다면 우리 역사 속에서 이러한 근현대적인 조세징수의 원칙이 도입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에 근대적인 조세제도가 도입된 시기를 갑오경장(1894년)을 떠올린다. 물론 갑오경장은 근대적인 의미의 조세징수기관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물납 중심의 조세제도를 화폐로 납부하도록 바꾼 계기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세부적으로는 1895년 고종은 탁지아문 대신인 어윤중의 주도하에 회계법을 제정하여 세금 징수와 정부 재정 관리 기능을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확보하였다.
하지만 우리 역사를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면 역사 초기부터 우리는 현대적인 의미의 조세징수 원칙의 필요성을 인식해 왔고, 이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활용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조세제도가 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시점은 삼국시대부터다. 아직까지 고조선을 비롯하여 부여와 삼한지역의 조세제도에 대한 기록은 확인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확인되는 우리나라의 최초의 조세제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조세제도들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국가의 조세징수 방식을 살펴보면, 1800여년 뒤 스미스가 언급한 근대적인 조세징수의 원칙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먼저 고구려의 조세제도를 살펴보자. 고구려의 경우 토지세를 시행하였는데, 개별 가구를 기준으로 곡물 5가마를 균일하게 과세하였으나, 해당 가구가 거주하는 집의 크기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큰 집은 1가마, 중간 집은 곡식 7말, 작은 집은 곡식 5말을 부과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세를 부과할 때 납세자의 납세 능력을 고려한 조세제도로 앞서 언급한 평등의 원칙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평등의 원칙에 부합하는 징수제도는 고구려의 또 다른 조세제도인 용(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용은 백성들로 하여금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와 관련된 조세제도로 당시 노동력 제공을 대신하여 옷감 4필을 부과하는 조세제도였다. 고구려는 이러한 용을 부과할 때 극빈자의 경우에는 3년에 한 번씩 옷감 1필만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 역시 조세부과 시 평등의 원칙이 고려된 내용이다.
신라의 경우 토지에 대한 세금뿐 아니라 특산물과 노동력에도 세금을 부과하였다. 이 중 농경지의 경우 경작지 수에 따라 토지면적에 세금을 부과한 경무제와 생산량에 따른 부과방법인 결부제를 병행하였다. 이 역시 납세 부담 능력을 고려한 징수제도라 할 수 있다. 또한 흉년과 풍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세를 부과하여 납세자의 납부 능력을 고려한 조세제도를 시행하였다. 신라의 경우 삼국사기 선덕여왕조에 “가뭄으로 흉년이 들어 1년간의 조세(租)와 진상품(調)을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백제의 조세제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고구려 신라와 비슷한 제도를 시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삼국은 조세 징수 과정에서의 효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 또한 목격되었다. 세금징수를 위해 고구려는 사자(使者), 백제는 6좌평(佐平) 중 내두좌평을 통해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신라의 경우 집사부가 설치되어 정부관제가 율령제도에 근거하여 조직화되었다.
물론 백제, 신라, 고구려의 조세제도와 오늘날 현대적인 조세징수제도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것은 아니다. 당시 납세 의무는 일반 농민들이 주로 부담하였으며, 지배계층은 별도의 납세 의무가 부여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국민이면 누구나 능력에 따라 비례하여 세금을 징수해야 한다는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 또한 조세 징수의 편리성을 고려할 때 곡물 내지 화폐 등으로 징수를 일원화하는 것이 효과적이나 특산물과 노동력 제공 등의 징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은 전근대적인 모습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우리 선조들은 납세제도에는 분명 납세자의 납세 능력을 고려하기 위한 노력들과 보다 효과적인 징수 과정을 위해 노동력 제공 대신 현물을 납부하는 제도 등을 시행했다. 또한 흉년 등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어려울 때는 납세 비율을 낮춰주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었다.
박정호 < KDI 전문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