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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전문경영인 손길승

    우리나라의 전문경영인 중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아마도 손길승일 것이다. 오너 가족이 아닌데도 1998년 SK그룹 회장이 됐 고, 2003년에는 전경련 회장으로도 선임됐다. 전경련은 대기업 오너, 즉 소유경영자들의 모임인데 전문경영자인 손길승을 회장으로 모 신 것이다.사업 파트너이자 동지1965년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손길승은 중소기업인 선경직물(SK의 전신)에 입사했다. 대기업에도 충분히 갈 수 있던 그가 작은 방직공장을 선택한 것은 당시 부사장이던 최종현의 포부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최종현은 후일 SK를 세계적 기업으로 길러내는 창업 1세대 오너 기업가다(생글생글 5월22일자).손길승은 회사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일하는 것이 유일한 취미라고 말할 정도였다. 심지어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1971년 당시 선경그룹은 대연각호텔 건물(지금의 명동 입구 대연각타워)의 9~11층 건물을 임차해서 쓰고 있었다. 그해 12월25일 크리스마스에 호텔에 큰불이 났고 선경 사무실도 화염에 휩싸였다. 손길승은 선경직물의 경리과장이었다. 회사 서류들이 타버린다면 큰일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그는 불도 다 꺼지기 전에 사무실로 뛰어 올라가 금고와 서류들을 챙겨나왔다. 회사 일을 자기 목숨만큼 중히 여겼던 셈이다.최종현 회장은 그런 손길승을 사업 파트너이자 동지로 여겼다. 회사의 거의 모든 결정을 그와 상의해서 처리했다. 그렇게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는 일도 맡겼다. 섬유회사에 불과하던 선경이 자기보다 10배나 큰 공기업, 유공을 인수해서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변신하는 과정,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하고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무선통신의 상용화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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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웅진그룹 윤석금

    외판 사원으로 출발해서 큰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가 있다. 윤석금 웅 진그룹 회장이다. 웅진씽크빅, 웅진에너지 등의 계열사를 두고 있다. 2012년 이후 사세가 많이 줄었지만 10년 전만 해도 30대 대기업 안에 들 었다. 1945년생인 윤석금은 26세 되던 1971년, 브리태니커라는 영국의 백과사전 판매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영어로 된 그 책을 팔아야 했다. 엄두가 안 나는 일이었다.배고팠던 외판원 시절첫 고객 앞에서는 말도 한마디 못 꺼내고 도망쳐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단단히 마음먹고 고객을 설득해 나갔다. ‘독해지기’ 위해서 식사비도 없이 출장길에 나섰을 정도다. 배가 고파서라도 게으름을 부릴 수 없게 말이다. 그러다 보니 용기가 자라났고, 요령도 생겼다. 9년 후 전 세계 54개국 브리태니커 영업사원 중 최고 판매 실적을 기록할 정도가 됐다. 판매왕이 된 것이다.승진도 했고 돈도 좀 벌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남의 나라 책이 아니라 한국어로 된 어린이용 도서를 만들어서 팔고 싶었다. 출판사를 만들자면 누군가로부터 투자를 받아야 했다. 어떻게 할까? 누구도 해보지 않은 방식을 시도해보기로 했다. 외국 출장을 다녀오는 길에 무작정 일본 도쿄에 내렸다. 호텔을 잡은 후 전화번호부를 뒤져 출판사들로 전화를 돌렸다. 내가 대한민국의 판매왕 윤석금인데 출판업을 하려고 하니 투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모든 상대방들이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기적적으로 그 요청을 귀담아들은 출판사가 있었고 결국 투자를 받아냈다. 그렇게 해서 1983년 헤임인터내셔날이라는 출판사가 출범했다. 투자도 영업사원 방식으로 받아낸 셈이다.사업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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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 조지프 콘래드… '발전의 전초기지'

    16세 때 배를 타다세계적인 소설가 중에는 복잡한 삶의 배경이나 순탄치 않은 성장 과정을 거친 이들이 많다. 소설은 경험이 많이 반영되는 장르인 만큼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 고달프면 그만큼 스토리가 생겨나니 한때의 고난이 언젠가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폴란드 태생 작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 다니는 조지프 콘래드는 러시아 속국이던 폴란드에서 1857년에 태어났다. 반정부 운동에 가담한 부모의 전력 때문에 5세 때부터 부모를 따라 유배생활을 해야 했고 8세 때 어머니가, 11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고아가 된 콘래드는 외삼촌의 보호 아래 자랐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실질적인 교육을 받기 어려웠다. 독립투사이자 문필가였던 아버지 덕분에 폴란드어로 교육받고 프랑스어 문학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으며 그중 항해와 탐험에 관한 책을 즐겨 읽었다.16세에 학업을 중단한 콘래드는 선원이 되기 위해 프랑스 마르세유로 향했다. 프랑스에서 수습 선원으로 4년을 보낸 뒤 영국으로 건너가 23세와 27세에 각각 이등항해사와 일등항해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29세에 영국으로 귀화한 콘래드는 그해 11월에 일반 선장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누비며 선원생활을 하다가 37세에 작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으니 파란만장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영문학 작가로 평가받는 콘래드는 해양소설의 대가로 불린다. 대표작인 『로드 짐』은 동남아시아 항해 얘기를 담았고, 『노스트로모』는 1876년의 서인도 제도 항해를 바탕으로 했다. 해양소설 외에도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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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 가즈오 이시구로… '우리가 고아였을 때'

    거장으로 떠오른 일본계 영국작가올해 노벨문학상은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에게 돌아갔다. 지난해 미국 가수 밥 딜런에게 상을 안겨 충격을 주었던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이 유력시되었던 파울루 코엘류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손을 들어주었다.우리에겐 다소 낯설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미 현대 영미권 문학을 이끌어 가는 거장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작가는 1960년 영국으로 이주하여 켄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 대학에서 문예창작 석사학위를 받았다.그는 1982년에 《창백한 언덕 풍경》으로 데뷔하여 위니프레드 홀트비 기념상을 수상했다. 일본을 배경으로 전후의 상처와 현재를 절묘하게 엮어낸 작품이다. 1989년에 발표한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로 부커상을 받으면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이 소설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영화로 제작되어 또 한 번 화제가 된 바 있다.이시구로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나를 보내지 마》는 타임지에서 ‘100대 영문 소설’ 및 ‘2005년 최고의 소설’로 선정되었고, 미국 도서협회 알렉스상, 독일 코리네상 등을 받았다. 복제 인간의 사랑과 슬픈 운명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다.감정의 힘을 담다문학적 공로를 인정받아 1995년 대영제국 훈장을, 1998년 프랑스 문예훈장을 받은 이시구로에게 2017년 노벨문학상을 안긴 스웨덴 한림원은 “감정의 거대한 힘이 담긴 소설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연결에서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감각 이면에 있는 심연을 드러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이시구로는 30여년 동안 장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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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교보생명 신용호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그야말로 서울의 명소가 됐다. 앉고 서서 책을 읽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물론 책도 온갖 종류가 다 있다. 교보문고를 세운 사람은 보험회사인 교보생명의 창업자, 신용호 전 회장이다. 1980년 광화문에 교보빌딩을 신축한 뒤 건물 지하에 큰 책방을 넣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신용호 회장이다. 하지만 큰 반대에 부닥쳤다. 임원들부터 반대였다.베이징에서 곡물회사책방은 보험회사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교보는 교육보험의 약자다). 감독관청인 재무부도 보험사의 도서유통업 진출에 강력 반대했다. 본업과 관련 없는 업종이기 때문이었다. 신 회장은 서적 유통이 사회공헌 사업임을 내세워 설득에 성공했다. 신 회장은 교보문고가 ‘남녀노소, 부자, 가난한 자 상관없이 그 누구라도 언제든지 책을 읽을 수 있는 장소’ 가 되도록 각별히 신경을 썼다.정작 신용호 자신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생인데 집안에 항일 민족 지사들이 많아서 일본인 학교를 다니기 어려웠다. 하지만 배움에 대한 열정은 포기할 수 없었다. 17세부터 작정을 하고 3년간 매일 책을 읽으면서 독학을 했다고 한다. 19세가 되던 1936년 청년 신용호는 만주로 가서 대련중학교에 들어간다. 이곳에서 집안 어른인 신갑범의 소개로 시인 이육사를 만나게 된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로 시작하는 그 시, <광야>를 쓴 시인 이육사 선생이다. 이육사는 그에게 민족자본을 만드는 일을 하라는 당부를 한다. 24세 되던 1941년, 돈을 벌기 위해 베이징으로 가서 북일공사라는 곡물회사를 세웠고, 거기서 번 돈으로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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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윤윤수 회장과 ‘휠라 신화’

    오늘 소개할 기업가는 윤윤수 회장이다. 세계적 스포츠용품업체 휠 라의 경영자이자 대주주이다. 휠라는 1911년 이탈리아에서 휠라 형 제가 세운 기업으로서 세계 5대 스포츠브랜드 중 하나다. 윤 회장은 샐러리맨의 신화로도 불린다. 대학을 졸업한 후 JC페니, 화승을 거 쳐 휠라코리아 대표로서 샐러리맨 생활을 했다. 1994년에는 연봉이 무려 18억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샐러리맨의 신화가 됐다.혼자 남겨진 ‘흙수저’그러나 그의 출발은 흙수저 중에서도 흙수저였다. 1945년에 태어났는데, 100일 만에 친모가 세상을 떠났다. 가난하기까지 해서 아버지는 갓난쟁이 윤수를 안고 다니며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젖동냥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아버지마저 폐암으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의사가 되겠다면 의대에 응시했지만 세 번 연속 낙방했다. 의사의 꿈을 접고 한국외국어대를 다니게 됐는데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정학까지 당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른 살에야 겨우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졸업 후 그는 미국 JC페니 백화점의 한국 구매사무소에 취직을 했다. 한국 상품을 구매해서 미국 본사에 보내는 일이었다. 여기서의 경험을 밑천으로 화승그룹으로 직장을 옮겨갔다. 르카프 신발을 만드는 그 기업이다. 수출부장 직책을 맡아 미국시장에서 신발을 팔러 다녔고 제법 실적도 좋았다. 수출에 자신감이 생겼다. 1984년, 당시 유행하던 ET 인형을 대량으로 제작해서 수출을 시도하게 되는데 미국 내의 저작권 문제로 수출길이 막혀버렸다. 회사에 80만달러의 손해를 입히게 되었고 퇴사를 해야 했다.휠라코리아를 세계 1위 휠라로그 후 독자적으로 한국 상품을 들고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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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 훌리오 코르타사르… '드러누운 밤'

    삶은 우연과 예외의 연속이다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건 책을 덮은 후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로 다양한 생각을 하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환상소설이라면 알 수 없는 세계로 날아가 생각의 끈을 길게 늘어뜨리며 재미있고 신비로운 상상에 빠지기 딱 좋은 장르이다. 낯선 이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훌리오 코르타사르는 전 세계를 통틀어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단편작가로 꼽히는 인물이다. 모호한 내용 속에 현실과 비현실이 마구 섞여 있는 코르타사르의 소설을 갸웃거리며 읽다 보면 어느덧 새로운 세계를 여행하고 있다.1914년에 태어나 70세에 세상을 떠난 아르헨티나 출신인 코르타사르는 생전에 “환상문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재미”라고 잘라 말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정치사회 현실에 대해 적극 발언하고 참여한 작가의 이력 때문인지 소설에서 의도나 메시지를 찾으려는 시도가 많다. 코르타사르가 ‘우리 삶이 논리와 법칙에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성과 예외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해 환상소설을 썼다’고 하니 편하게 읽고 각자의 느낌대로 환상 속을 거닐면 될 터이다.코르타사르의 탄생 100주년이던 2014년에 15편의 중단편을 담은 「드러누운 밤」이 발간되었다. 수록 작품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모호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가 명확하지 않아 독자가 상상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허다하다.단편 「드러누운 밤」의 주인공은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크게 다친다. 눈을 뜨면 병실인데 잠이 들면 아스테카 전사들을 피해 다니던 밤처럼 은근하고 복잡한 냄새가 흐르는 곳이다. 전쟁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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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네이버 이해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쓰는 모바일앱은 아마도 카카오톡일 것 같다. 필자도 최소한 하루 한두 번은 들어가는 것 같다. 국내 가입자 수가 4300만 명(글로벌 포함 4900만 명)이니 5000만 국민의 거의 대부분이 가입돼있는 셈이다(2017년 6월 말 현재).통장을 털어 독립하다그런데 고개를 들어 세계 시장을 보면 다른 모습이 드러난다. 네이버가 출시한 메신저 앱, 라인은 카카오를 훌쩍 뛰어넘는다. 누적 이용자 수가 10억 명을 넘었고 월 활성화 이용자 수는 2억1500만 명도 더 된다. 2016년 3월의 자료이니 지금은 더 많아졌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이용자가 많은데도 우리가 피부로 못 느끼는 것은 사용자들이 일본과 대만, 태국 등에 주로 분포하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모바일 메신저 앱으로 세계시장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다.카카오톡 김범수와의 인연네이버는 1999년 삼성SDS 직원이던 이해진이 세웠다. 다들 잘 알고 있듯이 그 출발은 PC 기반의 검색 엔진이었다. 그는 인터넷이 막 등장하던 시절 검색의 매력에 푹 빠져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개발 결과를 바탕으로 사내 벤처 1호 기업을 만들고 이름을 ‘검색하는 사람, navigator’에서 따온 네이버(Naver)로 짓는다. 본인과 팀원들이 각자의 통장을 털어 3억5000만원을 만들었고, 삼성SDS로부터 1억5000만원을 투자 받아 자본금 5억원으로 독립 법인 네이버컴을 출범시켰다.사업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다음, 야후, 라이코스 등 선발업체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트래픽을 늘려야 했다. 마침 친구이던 김범수의 한게임이 네티즌들의 인기를 얻고 있었다. 2000년 4월 이해진은 네이버를 한게임 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해 NHN을 설립했다. 김범수 한게임 사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