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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공산정권 들어서자 북한 기업인들 남한으로…SPC·아모레퍼시픽·진로·대한전선 일궈

    우리나라 기업들 중에는 북한 출신 기업가들이 세운 곳이 많다. 몇 군데 예를 들자면 파리바게트의 SPC 그룹, 화장품 기업 아모레퍼시픽, 대한전선, 진로 같은 곳이다. 오늘은 이들의 이야기다.■기억해 주세요^^공산당은 개별적인 기업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아서, 개인의 재산을 모두 빼앗아 국가의 소유로 했다. 그런 곳에서 기업활동은 불가능했다.일본빵집에서 일 배운 허창성SPC라는 이름의 뜻은 삼립-파리바게트 회사다. 허창성이 세운 삼립식품이 그 뿌리이다. 허창성은 황해도 해주 사람인데 어릴 적 일본인 빵집에서 일을 배워 상미당이라는 빵집을 열었다. 물론 장소는 고향인 해주였다. 공산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다시 가게를 차렸다. 빵 만드는 일을 현대화해서 삼립식품이라는 식품기업으로 키워냈다. 허창성의 차남 허영인은 그것을 다시 SPC라는 새로운 개념의 기업으로 성장시켰다.개성 사람 서성환은 화장품 사업을 일으켰다. 해방 전 그는 개성에서 어머니 윤독정 여사와 함께 세안수(얼굴 닦는 액체)와 동백기름(머리에 발라서 윤이 나게 하는 기름) 장사를 했다. 해방이 되자 서울의 남대문 시장에서 본격적인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다. 회사의 이름은 태평양화학이라고 붙였다. 사업이 잘 됐으나 70년대에 들어 지나친 다각화로 인해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그것을 차남인 서경배가 맡아서 구조조정을 하고 화장품 사업에만 집중한다. 또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시도한다. 그 결과가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이다.‘참이슬’ 창업자 장씨는 평안도 뿌리함경도 출신 기업가로는 지난번에 칼럼에서 소개한 동양제과의 이양구 말고도 설경동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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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때 일본회사 사환으로 일하기 시작…러시아·베트남·중국서 '초코파이 신화'

    한국은 과자에서도 세계적 명품을 배출했다. 초콜릿에 덮인 바삭한 비스킷, 그리고 그 사이에 든 말랑한 마시멜로! 중국에서도 베트남, 러시아에서도 초코파이는 인기 폭발이다. 초코파이는 오리온(옛 동양제과)이 1974년에 만들어 히트시킨 과자다. 오늘은 그 기업을 세운 이양구 회장 이야기다.■ 기억해 주세요^^6·25전쟁, 피난, 부도위기 같은 온갖 역경을 뚫고 비즈니스를 키워간 것은 이양구의 기업가 정신이었다.16세 때 식품가게 차려이양구는 1916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열네 살에 함흥물산이라는 회사에 사환(인턴사원에 해당)으로 취직했다. 일본인 사장 시노자키는 원칙에 충실했다. 정직과 신용을 목숨처럼 여겼고 직원들에게도 같은 것을 요구했다. 소년 이양구도 그런 사람이 돼 갔다. 사장의 신임을 얻어 스무 살 되던 해에 간부 자리에 올랐지만 2년 뒤(1938년) 그곳을 나와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식료품가게였는데 사업을 잘해서 재산이 불어났다. 함흥 인근에 20만평의 땅을 샀을 정도였으니 대단한 성공이었다.해방이 되면서 사업을 다시 시작하려 했지만 김일성 공산정권 때문에 불가능했다. 1947년 함흥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38선을 넘었다. 서울로 온 그는 남대문시장에서 자전거 행상으로 과자장사를 시작했다. 제법 자리를 잡을 만하자 1950년 6·25 전쟁이 터졌다. 이번에는 부산으로 피란을 가서 설탕장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수입 설탕을 팔다가 1953년 삼성물산의 이병철이 설탕의 국산화에 성공하자 독점판매권을 얻어서 사업을 늘려 갔다. 설탕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어린 시절 함흥물산에서 배운 정직과 신용이 성공의 비결이었다.흑자전환&h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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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중국 외교의 뿌리

    ■ 기억해 주세요^^마오저둥 혁명으로 3000만명이 굶어죽은 중국은 덩샤오핑이라는 지도자를 거치면서 빈곤에서 탈출하기 시작했어요.“중국은 자신의 업적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는 나라였으며, 다른 나라를 경멸하던 나라였다. 이 같은 사실은 우리의 습관이 되었으며, 자연스러운 일로 생각되었다.‘-순원(孫文)중국의 최근 외교 행태가 주변국들 사이에서 논란을 부르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중국이 제국적 행태를 과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국이란 군사력을 동반한 대규모의 압제적 국가를 말한다.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지닌 사람들을 힘을 동원해 하나로 묶은 것이 제국이다. 나라의 힘이 강력해지면, 모든 나라들은 제국의 행동 양식을 보인다. 하지만, 제국은 현대 사회와 어울리지 않는다. 본질적인 차원에서, 개인들의 의사를 존중하거나 개인들의 자유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학자들은 베스트팔렌 조약(1648)을 근대 외교의 효시로 본다. 국력의 차이가 있더라도, 상대방 나라를 대등한 상대로 인정한다는 국제적 약속이기 때문이다.다른 나라를 경멸하던 나라중국은 다르다. 중국은 지금도 자신이 국제사회의 ‘일개국’으로 존재하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나라다. 중국 지도부는 아직도 전통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 그 자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통치자이며(天子), 주변국들을 교육하고 처벌하도록 하늘로부터 명을 받은 자’라는 관념 말이다. 이를 상징하는 단어가 ‘화이(華夷)’와 ‘내화(來華)’다. ‘화이’는 글자 그대로 ‘중국인과 오랑캐’라는 뜻이다. 하늘은 중국인과 야만족들을 분명하게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세 귀족들이 향신료에 열광했던 진짜 이유는?

    ☞옆에서 소개한 사례는 미국의 과학저술가 스티븐 존슨의 책 《원더랜드》(프런티어 펴냄·444쪽·1만6000원)를 발췌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책은 인류 역사의 혁신이 획기적 아이디어나 기술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놀이에서 비롯됐다고 소개한다. 패션, 쇼핑, 음악, 맛, 환영, 게임, 공공장소 등 여섯 주제로 나눠 즐거움을 찾는 인간의 본성이 상업화 시도와 신기술 개발, 시장 개척으로 이어진 다양한 사례를 담았다.어느 초등학교 역사책이든 향신료 무역이 세계 역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세계무역, 제국주의, 콜롬버스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와 발견, 로마의 멸망, 주식회사, 베니스와 암스테르담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 이슬람교의 세계적 확산, 여러 풍미가 뒤섞인 도리토스의 맛까지 모두 향신료에서 비롯됐다. 인간이 향신료에 맛을 들였기에 오늘날의 세계가 존재하게 된 셈이기도 하다.욕망과 환상의 사치품지금 일상에서 값싸게 누릴 수 있는 향신료는 한때 말도 못하게 비싼 사치품이었다. 인간이 ‘그까짓 맛’ 때문에 그토록 엄청난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향신료 열풍이 일어난 이유는 기본적인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게 통상적인 해석이다. 고대 로마시대나 중세에는 겨우내 음식을 저장하는 방법으로, 상하기 시작한 고기의 역겨운 맛을 덮기 위해 향신료를 썼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가설을 부정하는 논리도 있다. 후추나 육두구는 거금을 들여야 살 수 있었으므로 1600년대 가격 하락 전까지 유럽 상류층만 맛볼 수 있었다. 그런데 유럽 귀족에겐 신선한 고기나 생선이 동나는 적이 없었다. 그들에게 향신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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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알베르 카뮈 '이방인'

    무심한 남자가 빠진 함정‘실존주의’와 ‘부조리’라는 단어가 늘 따라 다니는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실존’은 근대철학에서 매우 다양하게 쓰이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까뮈의 실존주의는 철저한 인간 중심주의 문학을 가리킨다. 실존주의는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나뉘는데 카뮈가 주장하는 것은 무신론적 실존주의이다.부조리는 ‘조리에 맞지 않는다’는 단순한 뜻이지만 완전한 철학적 용어로 탈바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프랑스에서 인간 존재를 부조리의 산물로 보려는 견해가 나타났고 이를 문학적으로, 철학적으로 구현한 작가가 바로 알베르 카뮈이다.1957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까뮈의 작품 《이방인》을 읽을 때 실존주의니 부조리니 하는 것은 잊고 한 인간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생각에 잠겨보길 권한다. 너무 유명한 작품이어서 자칫 평자들의 쏟아지는 규정이 오히려 독서를 방해할 수 있다.《이방인》은 1913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 태어난 카뮈가 29세에 집필한 작품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혼자 지내는 걸 좋아하고, 감정 변화가 크지 않고, 뭘 해야 할지 잘 모르는 요즘 청년들과 닮았다. 성실하게 회사에 다니지만 매사 무관심한 뫼르소에게 양로원에서 지내던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날아온다. 딱히 나눌 대화도 없고 더 이상 보살필 수도 없어 양로원에 보낸 어머니의 나이도 잘 모르고 슬픔을 표하지도 않은 뫼르소는 장례식을 무덤덤하게 치른다. 집으로 돌아와 해수욕장에 갔고 거기서 회사 동료였던 마리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낸다.마리가 “나를 사랑하나? 결혼하고 싶다”고 하자 뫼르소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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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찾아 도쿄행…풍선껌·롯데타워 최고 기업 일군 '뚝심의 기업인'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놀이공원 건너편에 뮤지컬 전용극장인 샤롯데시어터가 있다. 이 이름에 담긴 사연이 재미있다. 샤롯데는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자 주인공으로, 제과기업 롯데를 설립한 신격호가 상상 속에서 흠모한 여인이었다. 사실은 롯데라는 이름도 샤롯데의 애칭이다.■ 기억해 주세요^^샤롯데는 괴테의 소설《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자 주인공 이름으로 신격호가 상상 속에서 흠모한 여인이었죠. 롯데라는 기업 이름도 샤롯데의 애칭이에요.문학청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주인공 샤롯데 흠모신격호는 1921년 경상남도 울주(울산에 편입)에서 태어났다.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생계를 위해 종축장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그의 꿈은 소설가였다. 그 꿈을 이루고자 스무 살에 일본행을 감행한다.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도착하지만 막막했다. 먼저 건너간 친구의 하숙집에 얹혀살면서 우유 배달을 시작했다. 가난한 조선인 청년에게 문학은 사치스러운 꿈이었다. 신격호는 새벽부터 일해서 번 돈으로 와세다공고 야간 화학부를 다니면서 기술을 배웠다. 그러던 중 평소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하나미스 노인이 사업 기회를 제안해 온다. 6만엔을 투자할 테니 군수용 기름을 만들어 팔자는 것이었다. 신격호는 뜻하지 않게 사업가가 됐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은 막 사업을 시작한 그에게도 치명타를 가했다. 미군의 연이은 공습으로 일본 열도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신격호의 작은 작업장도 폭격을 맞았다. 1945년의 일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전쟁은 끝났다. 신격호는 하나미스 노인에게 투자금을 빚진 신세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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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나이팅게일, 병원을 혁신하다

    ■기억해 주세요^^나이팅게일은 환자 사이의 최소 거리 유지, 간호사 1명당 최대 환자의 수(12명), 병실내 온도 습도의 조절 등을 처음 시도했어요.‘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1820~1910)은 누구나 안다. 그가 간호학의 창시자라는 것도 일반 상식이다. 1893년 제정돼 간호학도들이 맹세하는 ‘나이팅게일 선서(Nightingale Pledge)’도 유명하다. 하지만 ‘간호학’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기에 나이팅게일의 이름이 불멸의 명성을 획득했을까.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부유한 영국 상류층의 딸로 태어났다. 이름 ‘플로렌스’는 피렌체의 영국식 발음이다. 언니 파세노프도 이탈리아 출생인데, ‘파세노프’는 나폴리의 그리스식 이름이다. ‘나폴리’는 그리스어 사투리로, ‘새로운 도시’라는 뜻이다.간호학을 창시한 여전사나이팅게일은 신의 소명을 받았다며, 어린 시절부터 본인의 천직을 간호사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간호사는 ‘병원이라는 특수공간에서 일하는 하녀와 청소부’ 정도의 이미지였다. 상류층 여성이 지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나이팅게일은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깼다. 나이팅게일의 진정한 업적은 이것이 아니다. 1853년부터 1856년까지 크림반도에서 크림전쟁(제1차 동방전쟁)이 벌어진다. 러시아제국에 맞서 오스만제국, 영국, 프랑스, 사르데나 공국 등이 연합전선을 편 전쟁이다.병원의 더러운 붕대, 시트가 더 문제30대 중반의 독신 여성(당시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일이다. 나이팅게일은 평생을 독신으로 시종했다) 간호사로 참전한 나이팅게일은 이스탄불 야전병원장으로 활동하며 영국군 부상병의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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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니콜라이 고골 '외투'

    짧은 희망이 지나가다입춘이 지났지만 온난화로 녹아내린 북극의 얼음이 찬바람을 뿜어대 아직 외투를 못 벗고 있다. 한겨울에 외투가 없었다면 과연 어땠을까. 고골의 소설 《외투》는 우리나라보다 몇 배나 더 추운 러시아에서 옷을 빼앗긴 남자를 그리고 있다.남들이 볼 때 만년 구등관인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적은 월급으로 따분한 일을 하며 인생을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다. 정작 당사자는 400루블의 급료에 만족하며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한다. 얼어붙는 듯한 추위가 몰아닥치자 그는 해진 외투를 수선하러 간다.수선공은 이리저리 살펴보다 너무 낡아 더 이상 기울 수 없다며 새 외투를 권한다. 몇 차례의 간청에도 계속 안 된다는 얘기에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외투를 사기로 결정한다. 지난 1년간 조금씩 모은 돈과 생각보다 많이 나온 상여금 덕에 새 외투를 장만한다. 앞으로 차도 마시지 않고 촛불도 켜지 않고 속옷 세탁도 덜하고 신발이 상하지 않게 조심해서 걸을 정도의 내핍생활을 결심하면서.‘외투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축하 파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강도를 만나 새 외투를 빼앗기고 만 것이다. 경찰관을 찾아가 고발하고 고관에게 간청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허세에 가득 찬 고관의 고압적인 태도에 눌린 데다 외투를 다시 구입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낙담한다. 절망에 빠진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는 편도선염으로 열이 올라 세상을 떠나고 만다.소설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페테르부르크에 외투를 빼앗는 유령이 나타나고 아카키 아카키예비치를 죽음에 이르게 한 고압적인 고관도 부들부들 떨면서 외투를 벗어준다. 그 고관은 어떻게 되었고 유령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