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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37> 제빵왕 허영인 이야기

    KBS TV가 2010년 ‘제빵왕 김탁구’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다. 김탁구라는 소년 이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빵 굽는 비법을 배워서 아버지의 제빵 사업을 이어받는다는 줄거리였다. 가족 간의 갈등도 흥미진진했지만 제빵에 얽힌 이야기가 흥미로워 큰 인 기를 누렸다. 극중의 김탁구는 파리바게뜨(SPC그룹)의 허영인 회장을 모티브로 했다. 그럴 정도로 허영인은 어릴 적부터 빵에 미쳐 살았다.‘제빵왕 김탁구’의 실제 모델지금은 세계적 제빵기업이 됐지만 출발은 미미했다. 부친인 허창성이 방산시장 근처에 상미당이라는 작은 빵집을 차린 것이 1945년이다. 허창성은 무연탄으로 빵 굽는 방법을 개발해 빵의 제조원가를 낮춰, 고급식품이던 빵을 서민도 저렴하게 살 수 있게 했다. 이런 노력은 삼립식품이라는 본격적 제빵기업으로 꽃을 피웠다. 그 후 삼립크림빵, 아이차, 삼립호빵 등 히트작을 잇따라 내면서 기업 규모도 덩달아 커졌다.허창성은 삼립식품의 대부분을 큰아들에게 상속했다. 둘째 아들인 허영인에게 돌아온 것은 성남의 작은 빵공장이었다. 1981년의 일이다. 사실 영인은 대학 다닐 때부터 아버지의 빵공장 일을 했기 때문에 작은 빵공장 하나만 받은 것이 무척 서운했다고 한다. 이 같은 가족 스토리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의 모티브를 제공한 셈이다.“공장빵 시대는 끝났다”하지만 영인은 서운함에 빠져 있지 않았다. 그 공장에서 나온 빵의 이름을 샤니로 붙이고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했다. 빵에 캐릭터를 결합해서 포켓몬스터빵 국찐이빵 같은 제품을 출시했다. 대히트였다.영인은 아버지가 열어 놓은 공장빵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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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4) 마크 트웨인… '허클베리 핀의 모험'

    금서에서 최고의 명작으로마크 트웨인(1835~1910)은 미국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작가이다. 책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도 그의 작품 『톰 소여의 모험』『허클베리 핀의 모험』『왕자와 거지』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수많은 작가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지만 한동안 금서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헤밍웨이와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을 높이 평가하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움직일 수 없는 세계 명작이 되었다.소설을 읽기 전에 그 작가가 살았던 시대, 성장과정 등을 미리 알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시대의 미국은 청교도 정신이 파릇파릇하게 살아 움직이는 가운데 도덕과 윤리를 매우 중시했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노예제도가 폐지되지 않은 상황을 그리고 있다. 마크 트웨인의 작품 가운데 미시시피강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네 살 때 부모를 따라 미시시피 강가로 이주하여 강과 함께 자랐기 때문이다. 미시시피강에서 수로 안내인으로 일한 마크 트웨인은 남북전쟁이 일어나 항로가 두절되자 26세 때 그 일을 그만두었다.『톰 소여의 모험』은 1876년,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1884년에 발표됐는데 두 작품을 연이어 읽으면 열네 살 난 톰 소여(톰)와 허클베리 핀(헉)의 모험 여행이 주는 기상천외한 유쾌함에 푹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톰 소여의 모험』에서 장난이 심하긴 하지만 학교와 가정에서 교육을 받은 톰과 부랑아처럼 떠돌며 사는 헉은 아슬아슬한 모험을 하며 우정을 쌓는다. 우연한 기회에 살인자를 목격하고 그로 인해 둘은 각각 6000달러라는 거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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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3) 레이먼드 챈들러… '안녕 내사랑'

    51세에 첫 장편소설 발표하드보일드(hard-boiled) 탐정소설의 종결자. 레이먼드 챈들러를 수식하는 말이다. 하드보일드는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 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을 이르는 말이다. 불필요한 수식을 모두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글쓰기를 뜻한다. 하드보일드는 기자 수련 시절 습득한 ‘첫 문장은 최대한 짧게, 쓸데없는 수식어는 전부 삭제, 힘있는 영어로 쓰라’는 교훈을 소설 쓸 때도 활용한 헤밍웨이에서부터 시작됐다.‘레이먼드 챈들러, 대실 해미트, 로스 맥도널드’는 하드보일드 소설을 창조하여 완결한 3인방이다. 챈들러는 1888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0년대에는 런던의 몇몇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시와 수필을 썼다. 미국으로 건너와 많은 직업을 거친 끝에 석유회사의 부사장까지 올랐던 그는 48세 때부터 <펄프 매거진>에 범죄 단편들을 기고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첫 장편소설 『빅 슬립』을 낼 때 그의 나이는 51세였고 1년 후 『안녕 내 사랑』을 발표했다. 그는 미완성작을 제외하고 모두 6편의 장편소설을 세상에 남겼다.그의 추리소설에 등장하는 필립 말로는 소설마다 다른 모습을 보이며 독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안녕 내 사랑』은 우리나라 독자들이 그의 소설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이 소설 속의 말로는 다소 느긋한 성격의 정의감 넘치는 인물이다.사립 탐정인 필립 말로는 술집 앞에서 195㎝의 큰 키에 덩치까지 엄청난 무스 맬로이와 우연히 만난다. 감옥에서 나온 맬로이는 8년이나 못 본 ‘레이스 속옷처럼 귀여운 빨강 머리 벨마’를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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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여성기업인들

    한국에서 여성이 기업가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성공은 고사하고 기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일 그 자체가 금기처럼 여겨져 왔다. 옛날엔 ‘여자가 집에서 밥이나 하지 무슨 사업을 하느냐’며 남자들에게 따돌림 당하기 십상이었다. 대한민국 여성기업인 1호 인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성공도 그런 서러움을 극복해낸 후에 가능했다.한국에서 여성기업가란애경그룹은 1954년 채몽인이 세운 애경유지공업에서 출발했다. 비누 제조 기업이었다. 사업은 잘됐다. 1970년에는 울산에 석유화학 공장도 세웠다.생각지 못한 불행이 닥쳤다. 채몽인 사장이 갑자기 숨을 거둔 것이다. 막내 아들을 출산한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기업주가 사라지자 애경유지는 표류하기 시작했다. 부인인 장영신은 남편의 회사가 망해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남편의 주식을 상속받은 그는 1972년 7월1일 무작정 회사로 출근했고 8월 사장에 취임했다. 남편의 형제들이 말렸다. 회사 임원들도 여자 사장을 보려 하지 않았다. 여자 밑에서는 회사를 다닐 수 없다며 아예 사표를 던지고 나간 사람도 있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학원을 다니면서 회계장부 공부부터 시작했다. 하나둘 직원들이 여자 사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1973년 7월 석유위기가 찾아왔다. 애경 계열사인 삼공화성도 생사의 기로에 섰다. 원료인 석유를 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장영신 사장은 걸프사 한국법인 대표를 찾아가서 자기를 믿고 일본 미쓰비시가스에 원료 공급 요청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부탁이었지만 자신감 넘치는 그의 태도에 감동한 걸프사 대표는 장영신 사장의 청을 들어줬고 원료를 확보해서 생산을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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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트 등 신세계 이명희·홈플러스 이승한...복잡한 유통구조 개선해 생활혁명 일으켜"

    낙후된 유통구조 이명희, 구학서, 이승한은 한국형 유통혁명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들이다. 이명희는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의 막내딸이다. 8남매 중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들 했다. 신세계백화점을 상속받은 그는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으로 새롭게 성공시키고 싶었다. 3500억원이라는 상속세를 곧이곧대로 납부한 것이 그 첫걸음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자본으로 시작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찾다가 미국의 프라이스클럽 등을 모델 삼아 대형할인점을 시작했다. 1993년 11월 테스트 상점으로 서울 도봉구 창동에 이마트 1호점을 냈다. 월마트·까르푸에 도전하다 그다음은 믿을 만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었다. “믿지 못하면 쓰지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 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사람을 쓰는 철학이었다. 1996년 이명희는 젊었을 때부터 눈여겨봐온 구학서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에게 거의 모든 것을 맡겼다. 정기적인 보고조차 받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 무렵 월마트, 까르푸 등 외국계 대형마트들이 국내에 들어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다. 후발주자로 살아남으려면 독특한 매력이 필요했다. 한국 소비자들이 창고형 매장에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개별포장 제품을 늘리고 판매대의 높이를 낮췄다. 천장을 깔끔하게 단장해 백화점 느낌을 가미했다. 한국형 할인점은 이렇게 만들어져 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자국에서의 판매방식을 고집하던 월마트, 까르푸, 마크로 등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중 월마트는 2007년 12개 점포 모두를 이마트에 넘겼다. 외환위기는 이마트에는 도약의 기회였다. 다들 어떻게든 땅을 팔려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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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 앙드레 지드…'좁은 문'

    평가가 상반된 작품한국 기독교 역사가 130년이 된 데다 성경에 기초한 서양문학이 우리와 친숙하기 때문인지 문학과 일상에서 기독교 용어 사용이 빈번해졌다. ‘좁은 문, 13일의 금요일, 새 술은 새 부대에, 솔로몬의 지혜, 선한 사마리아인, 에덴의 동쪽, 카인의 후예’ 등은 비유적으로 쓰이는 기독교 용어다. 누가복음 13장 24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바탕으로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을 썼고, 그의 대표작이 됐다.지드는 11세 때 아버지가 사망한 후부터 청교도인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8세 때부터 문학에 빠지면서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하이네를 탐독했고 그리스 신화와 성서에도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사촌 누나 마들렌은 그에게 예술혼을 유발시키는 평생의 동반자였다. 25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지드는 첫사랑인 마들렌과 결혼했다. 지드를 연상케 하는 『좁은 문』의 주인공 제롬이 외사촌 누나 알리사와 이뤄지지 않는 것과 반대다.『좁은 문』에 성경말씀이 계속 등장하는데, 알리사가 제롬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연유에는 ‘알리사식 성경 해석’이라는 걸림돌이 자리하고 있다. 성경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청교도 집안에서 갈등하며 자란 지드의 반감이 무신론적 사고로 변환돼 소설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지드는 『좁은 문』을 18년에 걸쳐 구상하고 집필해 39세 때인 1908년 탈고했다.출간 직후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으나 평가는 상반됐다. ‘내적인 삶에 대한 프랑스어로 쓰인 가장 아름다운 소설 중 하나’ ‘새로운 전율과 마법이 가득한 책으로, 문체와 기법이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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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마키아벨리(상) 군주론

    1469년 5월 피렌체에서 태어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인문주의 명사들의 영향을 받았다. 피렌체의 실제 통치 권력이던 메디치가가 추방되고 난 뒤 들어선 피렌체 공화정의 외교관으로 발탁됐다. 하지만 이후 다시 메디치 가가 복귀하면서 그는 반(反)메디치 인물로 낙인찍히고 공직에서 쫓겨났다. 마키아벨리가 현실 정치에서 추방 됐을 때 ‘군주론’이라는 불후의 고전이 탄생한다. 마키아벨리는 은둔 생활을 하면서 ‘군주론’을 집필하게 된 과 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메디치가에 저술을 바치다“저녁에는 집에 돌아와 서재에 들어간다. 서재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하루 종일 입었던 진흙과 먼지가 묻은 옷을 벗고 궁정에서 입는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렇게 적절히 단장한 후 옛 선조들의 궁정에 들어가면 그들이 나를 반긴다…나는 그들과 얘기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으며, 그들의 행적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유를 캐묻는다. 그들은 친절하게 대답한다. 네 시간 동안 거의 지루함을 느끼지 않으며, 모든 근심과 가난의 두려움을 잊는다…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선조들에게 맡긴다. 단테는 우리가 읽은 것을 기록해놓지 않으면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은 성과를 기록해서 ‘군주국에 관하여’라는 소책자를 썼다.”피렌체를 위해 공직에서 일하기를 원하던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의 군주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는 ‘군주론’을 저술해 바쳤지만 공직에 복귀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마키아벨리가 공직 생활에서 추방된 후 은둔 생활 동안 집필한 저작들을 통해 그는 정치철학자로서 불후의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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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 나도향… '나도향 단편집'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나도향은 이상, 김유정과 함께 20대에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천재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20년에 ‘청춘’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나도향은 1926년 폐결핵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단편 23편, 중편 1편, 장편 2편, 미정고 장편(유고) 1편을 남겼다. 19세에 작품 활동을 시작한 만큼 초기 소설에는 ‘주관적인 애상을 벗어나지 못해 감상적’이라는 평이 있었으나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에 남긴 ‘벙어리 삼룡이’ ‘물레방아’ ‘뽕’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들에게도 큰 영향을 줘 몇 번이고 재해석되면서 사랑받고 있다.나도향은 가문 대대로 의업(醫業)을 이어오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의사 할아버지와 양의사 아버지의 기대에 따라 나도향도 경성의전에 진학했으나 소설과 시집을 밤새워 읽다가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의대를 그만두고 방랑하는 아들을 집안에서 도와줄 리 없어 나도향은 힘든 생활을 이어갔지만 ‘백조’ 동인에 참여해 쉬지 않고 작품을 발표했다.초기 작품인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와 명작 ‘벙어리 삼룡이’를 살펴보자. 소설은 그 시대의 풍속을 잘 보여주는 또 다른 역사서이며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1922년에 발표한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의 주인공은 열두 살 난 여자아이다. ‘벙어리 삼룡이’는 당연히 삼룡이가 주인공이지만 사건의 불씨를 제공하는 인물은 열일곱 살 난 새신랑이다. 1920년대의 10대는 작품에서 어떻게 그려질까.소학교 4학년인 ‘옛날 꿈은 창백하더이다’의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