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양 기타
소설의 장치들
「서울, 1964년 겨울(1965, 김승옥)」을 읽어 보자. 1964년 어느 겨울 밤 ‘나’, 대학원생 안, 사내 이렇게 세 사람이 술을 마신다. 셋은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났다. 사내는 서적 외판원인데 오늘 아내가 죽었고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서 돈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지금 그 돈을 다 써야 할 것 같다며 같이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셋은 술에 취해서 밤거리를 걷다가 소방차를 발견한다. 사내가 택시를 잡고 셋은 소방차를 따라가서 불구경을 한다. 사내는 아내가 불에 타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돈을 불 속에 던져 버린다.이후 셋은 여관에 투숙한다. 사내는 같은 방에 들어가자고 간절히 말했으나 안은 각자 다른 방에 들어가자고 주장한다. 이튿날 아침 사내는 죽어 있었다. 사내의 자살을 짐작했던 안은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도망치자고 한다. 이유는 딱 하나. 혹시 생길지 모르는 귀찮은 일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안에 동의한 ‘나’가 급히 옷을 주워 입고 방을 나오려는데 개미 한 마리가 ‘나’의 발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나’는 왜 개미가 발을 붙잡으려고 한다는 느낌을 받았을까? 그것은 ‘나’가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단절된 인간상, 과도한 개인주의, 폐쇄적인 존재의 고독을 그려낸 이 소설에서 유일하게 인간적 체온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개미는 작은 소재지만 작품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주제의 형상화에 기여하는 주요 장치다.이상문학상 수상작가 권여선의 「내 정원의 붉은 열매(2007)」의 화자 ‘나’는 친구 현
-
교양 기타
소설의 끝맺음에 대하여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는 대체로 작품의 주제 의식이 압축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작가의 비전이 제시될 때가 많다. 그것은 직설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여운을 남기는 형태로 서술되어 울림을 주기도 한다. 마지막이 인상적인 작품을 읽어 보자.[“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설렁탕이 이다지도 안타깝고 유감스럽게 기억될 줄은 김 첨지도 독자들도 몰랐을 것이다. 병든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 사 주지 못하던 인력거꾼 김 첨지는 평소보다 훨씬 많이 돈을 벌게 된 날 결국 아내를 잃는다. 「운수 좋은 날(1924, 현진건)」이라는 제목의 아이러니도, 최고의 행운 뒤에 최악의 불행이 따르는 삶의 상례도 감당하기 힘든 비극이다.[차도로 나왔으나 좌회전을 하지 못해 돌아가야 할 도시를 뒤로 하고 달릴 수밖에 없었다. 어딘가에 유턴 지점이 있겠지, 유턴 지점을 열심히 찾는 것도 아니면서 막연히 그렇게 믿으며 상쾌한 속도를 냈다. 도시와 더불어 내 집 또한 뒤로 뒤로 멀어져가는 기분 또한 상쾌했다.]1993년 현대문학상을 수상한 박완서의 「꿈꾸는 인큐베이터」의 마지막 문장이다. 화자는 왜 집이 ‘뒤로 뒤로’ 멀어져가는 기분이 상쾌하다고 하는가. 화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며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며 딸 둘과 아들이 있는, 남부러울 것 없는 중산층 여인이다. 그러나 둘째 딸과 아들 사이에는 딸이 있었고 그 딸은 세상에 나오지 못한다. 화자는 뱃속의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임신 중절 수술을 하였고, 수술을 강요한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원한에 가까운 감정을 품게 된다. 물론 그런 강요
-
교양 기타
소설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권태로운 경성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물이 등장하고 사건이 전개되는 무대이다. 이는 작품 속에서 물리적 공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을 읽어 보자. 구보는 정오 무렵 집을 나와 종로통을 걷다가 전차를 탄다. 전차에서 이전에 선본 여자를 발견하고 행복과 사랑과 고독에 대해 생각한다. 고독을 피하기 위해 약동하는 사람들을 찾아 경성역으로 가지만 그곳은 도시의 냉기로 가득 차 있다. 이후 다방에서 시인이자 신문기자인 친구를 만나서 생계를 위해 기사를 쓰는 고충에 귀 기울이기도 하고 자신의 소설에 대한 비평을 듣다 권태감을 느끼기도 한다. 친구와 헤어진 후 거리를 거닐던 구보는 밤 깊은 시간 술집에서 다른 벗과 술을 마시다가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귀가한다.이 소설은 플롯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별한 사건이나 갈등 없이 주인공은 이동하는 장소나 만나는 사람을 계기로 내적 상념을 분출하거나 과거를 회상한다. 소위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술이 인과성과 필연성에 기초한 기존 소설의 서사 구조를 대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구보의 산책기인 동시에 당대 제1의 도시 경성의 기록도이기도 하다. 지식인들이 식민체제에 저항하여 관료가 되지 않고 실업자로 남기도 했던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그들의 산책은 즐거운 일상이 아니라 우울한 배회로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진정한 주인공은 구보가 헤매고 다니던 도시 경성이 아닐까 싶다.농촌과 근대화 공간수도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 있는데 농촌공동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 없을 리 없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은 총 8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다. 관촌은 충
-
교양 기타
박민규 《갑을고시원 체류기》
‘나’는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에 관한 기묘한 뉴스 보도를 보다가 고시원에서 살았던 과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 과거는 ‘쥐의 몸에서 자라난 사람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처럼’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서 살았던 시절로 기억된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 고시원의 유전자는 ‘나’의 몸속에 이식되어 있다.아버지의 사업체가 부도가 나고 ‘나’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갈 곳이 없어진 ‘나’는 친구의 집을 전전하다가 학교 인근의 고시원, 그것도 가장 싼 고시원, 간판이 갑을고시원인 그곳으로 들어가게 된다. 월 9만원. 식사 제공. 막노동판에서 일하는 형에게 얻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폭이 40센티가 될까 말까한 복도를 걸어가 당도한 방은 방이라기보다 관이라고 불러야 할 크기였다. ‘다리를 뻗을 수 없는 공간에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다. 그곳에서 공부를 한다. 그러다 졸음이 온다. 자야겠다. 그러면 의자를 빼서 책상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책상 아래 공간으로 다리를 뻗고 자야 했다. 건물 옥상의 옥탑방에는 4인용 식탁과 대형 전기밥솥이 있다. ‘오래된 듯한 밥이, 그러나 많이, 밥솥 속에 들어 있었다.’ 각자 반찬만 준비해서 먹으면 된다. 그리고 협소한 공용 세면장과 화장실, 공용 세탁기가 있다. 간신히 잘 수 있고 간신히 굶지 않을 수 있으며 간신히 씻을 수 있다. 말하자면 고시원이란 간신히 삶을 견딜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첫날 밤 잠이 오지 않던 ‘나’는 워크맨(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을 찾았다. 이어폰이 없어서 최대한 소리를 낮춰서,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의 최저
-
교양 기타
이문구 '유자소전'
‘유자소전’은 전기문 형태의 소설이다. 유자의 본명은 유재필이며 화자의 벗이다. 그리고 화자는 작가 이문구의 대리인이다. 이문구는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존했던 벗의 일대기를 소설로 기록하였으되 유재필을 공자, 맹자와 마찬가지로 유자라 칭하여 존경의 염을 표현하고 있다. 유재필은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존경을 받는가?유자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대범하고 넉살 좋은 그는 나이가 한참 위인 중학생들과도 친구처럼 지냈고 선생님 앞에서도 기죽는 법이 없었다. 왕성한 활동력 때문에 차분하게 앉아 있지 못했던 그는 뼈가 여물기도 전에 학업보다 직업을 생각하였다. 영사 기사가 되고 싶어 무급으로 조수 노릇을 하기도 했는데 이때 배운 확성기 배선 기술로 국회의원 선거 기간에 어느 후보의 확성기를 고쳐주었고 이 일을 계기로 선거운동원이 된다. 또래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이른 나이에 어른의 세계에 입문한 것이다.그 후보가 얼마 뒤 장관이 되고 유자는 비서관이 된다. 그러나 빛을 본 것도 잠시 정권이 바뀌자 장관이 몰락했고 오갈 데 없어진 유자는 입대한다. 이 호기심 많은 청년은 논산 훈련소로 가는 완행열차에서 사주 책을 주워 읽고는 사주풀이를 한다. 원래의 왕성한 입담에 정치인 비서 시절 갈고닦은 말솜씨까지 더해졌으니 족집게 도사가 따로 없다. 신병 훈련이 아니라 동양철학자 노릇으로 바쁜 군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가히 풍운아다. 이 풍운아는 뛰어난 운전 솜씨 덕분에 10대 재벌에 드는 그룹 총수의 운전수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대우를 받게 된다.그러나 총수의 최측근이라는 자리에 연연하며 살기에 그의 그릇은 너무 컸다. 거침없는 생각과 당당한 행
-
교양 기타
윤영수 《착한 사람 문성현》
흔치 않은 장애자 소설남평 문씨 집안의 장손 문성현은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난다. 어머니 이경순은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면서도 무한한 사랑으로 성현을 키운다. 8살이 되었을 때 성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고 장애를 극복하려 노력한다. 울기를 멈추고 사지가 꼬이는 것을 통제하고 혼자 앉는 법을 터득하고 글자를 익힌다. 이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다. 이후 성현은 자살을 기도하거나 요양 시설에 들어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평화로 충만한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어머니 사후 자신을 돌보는 파출부 예산댁의 횡포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를 모두 용서하고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이 작품은 장애의 문제를 직접 다룬, 우리 문학사에 흔치 않은 장애자 소설이다. 탄생에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성현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장애를 천형처럼 안고 사는 한 인간을 그 핍진한 삶의 구체와 더불어 만나게 된다. 성현은 어린 나이에 머리가 터지고 무릎이 까이면서 혼자 몸을 가누는 연습을 하는데 이는 인간의 품격과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몸부림이었기에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윤영수는 병자, 장애인, 미친 사람, 건달 등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독자들이 이 작품을 읽고 장애인의 삶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것은 필시 작가의 공일 것이다.이 소설의 제목은 ‘착한 사람 문성현’이다. 착한 것은 무엇일까? 문성현은 평생 고통 속에 살면서도 부모를 염려하고 아우를 배려하고 조카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도 타인을 원망하고 미워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간암
-
교양 기타
윤흥길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1970년대 판자촌 이야기1970년대 서울의 판자촌에서 경기도 광주군(현재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으로 강제 이주당한 철거민들이 있었다. 이 철거민들은 주택 단지가 조성되지 않은 허허벌판에 가수용되어 인간다운 삶을 전혀 누릴 수 없었는데 당국은 이들에게 보름 만에 집을 지어 신고하게 하고 또 보름 만에 땅값을 일시불로 지급하게 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시간 여유를 두지 않고 가옥 취득세까지 징수하여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결국 내 집 마련이 좌절된 입주민들은 생존권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는 도시 빈민의 저항으로 번졌다.윤흥길의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는 이 역사적 사건, 이름하여 광주 대단지 사건을 배경으로 씌었다. 서술자인 ‘나’는 학교 교사이다. 어렵사리 성남의 고급 주택가에 집을 마련한 ‘나’는 재정상의 어려움을 다소나마 메워 볼 요량으로 방 한 칸을 세 놓는다. 아이 둘과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그 방에 세든 사람이 주인공 권기용 씨다. 그는 광주 대단지 소요에 적극 가담하여 징역을 살고 나온 이력이 있다. 출판사를 다니던 그는 직장을 잃었고 이후에도 사회 생활을 순조롭게 하지 못하였으며 현재는 공사판에서 막일을 한다. 권 씨가 가장 행복해 보이는 순간은 구두를 닦을 때이다. 구두를 닦는 그의 솜씨와 정열은 구두닦이 장인의 그것 같다. 도금을 올린 금속제인 양 빛나는 구두를 바라보는 권 씨의 얼굴에는 평소 찾아보기 힘든 미소가 활짝 피어난다. 구두를 닦는 행위는 권 씨에게 거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출사 의식이자 화이트칼라 직장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의식이다. 말하자면 구
-
교양 기타
전상국 《동행》
작은 시골마을에서 벌어진 일어릴 때 공포영화가 무서웠다. 뱀파이어와 좀비와 악령과 심령술사가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초자연의 세계. 나이를 먹으면서 진정한 삶의 공포는 평범한 인간의 평범한 일상에 드리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삶은 행복하고 인간은 아름답다는 믿음과 신화가 배반당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얄팍한 편법이 우직한 정공법을 이기는 것을 목도하는 순간, 응원하던 사랑이 외풍에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는 순간, 존경했던 사람이 더 이상 그 사람이 아님을 알게 된 순간, 혈육의 정조차 절대가 아님을 신문 사회면에서 확인하는 순간. 이런 순간들을 겪고 나면 더 이상 해맑은 얼굴로 깔깔대며 살기는 힘들어진다. 청소년들이여, 어른들의 얼굴이 찌들어 버린 것은 이런 연유다.우리의 역사에는 한 차원 더 깊은 공포가 있다. 작은 시골 마을의 공동체. 어제까지 한 우물의 물을 마시고 잔칫상의 고깃점을 나눠 먹던 이웃이 오늘 갑자기 서로를 죽인다. 피는 피를 부르고 원수가 된 자들이 복수의 참극을 벌인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비극이니 이쯤에서 끝났으면 좋겠는데 삶은 계속되어 선조 때부터 지켜온 공동체는 지속되고 구성원들은 비장한 이별도 야멸찬 절연도 없이 여전히 부대끼며 살아간다. 살육의 기억을 잊었을 리 만무하건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심지어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내가 없는 동안 내 아버지의 무덤을 관리한다. 징그러운 삶의 관성. 이것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런데 이런 지옥이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것이 우리 현대사이고 그 비극의 정점에 6·25전쟁이 있다. 전상국의 ‘동행’은 전쟁이 빚어낸 이러한 비극을 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