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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28> CJ그룹 이재현과 한국영화산업

    한국 영화가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 국내 영화시장에서의 점유율만 봐도 알 수 있다. 1995년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관객수 기준의 한국 영화 점유율은 20% 수준이었다. 국내 영화 관객의 80%는 한국 영화가 아니라 외국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스티븐 스필버그와의 만남그러던 것이 지금은 한국 영화가 50% 이상을 차지한다. 2016년을 예로 들면 한국 영화 점유율은 54%로 외국 영화 관객 비율 46%를 8%포인트나 앞섰다. 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도 한국 영화를 인정하기 시작해서 액수가 많진 않지만 제법 수출도 이뤄진다.한국 영화의 수준이 높아지는 데 CJ가 큰 역할을 했다. 할리우드와의 합작을 통해 그들의 앞선 노하우를 들여왔고 영화 제작에 안정적인 자금을 댔다. 전국 곳곳에 멀티플렉스 영화관을 세웠다. 극장은 어둠침침하고 냄새 나는 곳이었는데 데이트하기 좋은 곳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관객도 늘었다. 이런 바탕이 마련되자 한국 영화인의 실력이 늘어갔고, 좋은 영화가 만들어졌다.CJ의 뿌리는 이병철 회장이 1953년 설립한 제일제당이다. 1993년부터 삼성그룹에서 분리 작업을 시작해 1996년 CJ그룹으로 출범했다. CJ가 영화산업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5년부터다. 당시 미국에서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드림웍스라는 영화사를 세우느라 투자자를 찾고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CJ가 3억달러를 투자해 드림웍스의 대주주로 등장했다.‘본업’ 밖으로 눈을 돌리다3억달러면 당시 환율로 2300억원, 그룹 총자산 1조원의 23%에 해당했다. 그렇게 큰 금액을 설탕과 조미료 등 식품만 만들던 기업이 본업과는 전혀 무관한 영화에 투자한 것이다. 사운을 건 결단이었던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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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체호프 단편선'

    톨스토이가 네 번이나 읽었다안톤 체호프는 모파상과 함께 현대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립한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한국 유명 작가 가운데 “체호프는 단편의 재능이 없어 오래 고심해온 내게 중요한 스승이 돼준 작가”라고 공공연하게 말한 이들이 있다. 체호프가 ‘귀여운 여인’을 발표했을 때 톨스토이는 네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잡지 편집자와 평론가를 눈물을 흘리게 한 ‘골짜기’에 대해 러시아 대문호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갈채를 받는 체호프는 의대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유머 단편을 쓰다가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860년 러시아 남부 아조프해 항구도시 타간로크에서 태어난 체호프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식료품 잡화점이 파산하자 고학으로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대학 의학부에 입학했다. 1886년에 처음으로 ‘추도회’라는 작품을 본명으로 발표했으며 2년 뒤 단편집 황혼으로 푸시킨상을 수상하면서 눈에 띄었다.인간의 속물성과 허위를 배격하고 진실한 인간성을 반추하는 단편소설을 여러 편 남긴 체호프는 희곡에도 관심을 기울여 ‘갈매기’ ‘바냐 아저씨’ ‘벚꽃 동산’과 같은 세계 희곡사의 걸작들을 써냈다.현대 단편소설의 길을 가르치다체호프의 여러 작품 가운데 ‘귀여운 여인’ ‘약혼자’ ‘골짜기’를 중심으로 얘기를 나눠보자. 왜 톨스토이가 네 번이나 읽었을까? 네 번의 사랑을 각각 음미하느라 그랬을까? ‘귀여운 여인’을 읽으면 대문호 톨스토이의 심정을 헤아리게 된다. 자기주장이 강한 시대인 만큼 자기 색깔이 없는 올렌카의 삶에 고개를 갸웃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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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혁신적 음악기업가 이수만

    케이팝이 한국의 대표상품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이란에서도 남미 의 페루에서조차도 젊은이들이 한국 걸그룹, 보이그룹의 춤과 노래 와 모습에 열광한다.SM의 힙합 프로젝트K팝이 한국의 대표상품이 됐다. 프랑스에서도 이란에서도 남미의 페루에서조차도 젊은이들이 한국 걸그룹, 보이그룹의 춤과 노래와 모습에 열광한다.K팝의 뿌리에는 이수만이라는 기업가가 있다. 그는 주먹구구식 대중가요 산업에 체계적 예측과 투자 개념을 도입했다. 재능이 보이는 아이들을 뽑아서 매력적인 스타로 키워냈고 해외로도 진출시켰다. 외국 작곡가, 안무가들로 구성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만들어 세계적 감각의 음악을 생산했다. SM엔터테인먼트를 주식시장에 상장해 투자자들과 ‘윈윈’ 하는 채널도 만들어냈다.이수만은 원래 가수이자 방송진행자였다. 연예기획자가 되겠다고 마음을 정한 것은 1980년 미국 유학 중 음악 전문 케이블채널인 MTV를 보면서였다. 그전까지의 음악은 ‘듣는 것’이었는데 MTV는 그 음악들에 색채와 패션을 혼합해서 ‘보는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수만도 한국에서 ‘보는 음악’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었다. 귀국해서 돈을 모은 후 1989년 연예기획사인 SM기획의 문을 열었다. 본격적인 첫 기획은 힙합 프로젝트였다. 이태원의 어린 춤꾼들이던 현진영, 강원래, 구준엽을 발탁해 ‘현진영과 와와’를 구성했다. 미국에서 인기 절정이던 바비브라운을 모델로 훈련을 시켜나갔다. 성공의 조짐이 보이던 차에 마약사건이 터져 물거품이 된다. 모든 투자금을 날리고 거의 빈털터리 신세로 전락한다. SM기획 소속 가수와 작곡가들도 모두 곁을 떠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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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4) 정유정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세 친구으르렁대기 일쑤인 같은 학교 동급생 두 소년과 한 명의 소녀, 안 그래도 반항으로 터질 것 같은 열다섯 살인데 어른들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이들 셋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인, 덩치 크고 사나운 개 한 마리까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섯 조합이 운명공동체가 되어 남도를 향한다면? 개성적인 인물들이 끊임없이 티격대면서 목적지까지 가려면 얼마나 많은 사건이 일어나겠는가. 함께 떠난 길에서 불꽃 튀는 충돌이 일어나지만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면서 이해가 싹트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훌쩍 성장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전혀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이 함께 떠나 숱한 일을 겪으면서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는 영화나 소설에서 자주 써먹은 형식이다.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왜 그들이 함께 떠나는지가 중요하다. 성인이 등장하는 영화나 소설은 대개 ‘고향’을 찾아가지만 청소년소설은 대개 ‘집’을 떠난다.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의 세 친구도 호기롭게 집을 나가지만 숱한 모험 끝에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행방불명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준호에게 엄마는 연하의 사진작가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한다. 막걸리 공장 사장 아들인 승주는 일부러 고생을 해봐야 한다는 엄마의 이상한 법칙 때문에 절에서 스님과 함께 지내며 자유를 속박당하고 있다.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쁜 정아는 아버지에게 구타당하면서도 폐인이 되다시피 한 불쌍한 엄마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다.예측불허의 사건이 벌어지고엄마가 신혼여행을 떠난 사이 준호는 절친한 친구 규환으로부터 자신의 형에게 여권과 돈을 전달해 달라는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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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아모레퍼시픽 서경배

    한국 화장품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중국 소비자들이 한국에 와서 사가는 중요한 품목이 되었다.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도 한국 화장품의 인기가 높다. 국산 화장품은 랑콤이나 시셰이도 같은 외제 화장품보다 급이 한참 낮은 것으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는데 격세지감이 든다.창업자는 서성환··· ‘아모레’ 탄생이렇게 된 데에는 아모레퍼시픽그룹 서경배 회장의 역할이 컸다. 연구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아서 국산화장품의 품질을 높였다. 또 일찍부터 한국 화장품의 해외 시장 개척에 공을 들이기도 했다. 물론 K팝과 한국 드라마에 대한 인기가 한국 화장품에 대한 인기로 이어진 측면이 있지만 그 전에 품질과 판로 개척을 해두었기 때문이기도 했다.아모레퍼시픽의 뿌리는 개성의 창성상점이다. 1932년 개성에 살던 윤독정 여사가 머릿기름, 세안수 같은 것을 만들어서 팔기 시작했다. 아들인 서성환도 거들기 시작했고 모자(母子)가 같이하는 사업이 됐다. 가게 이름은 창성상점이었다. 해방 후 서성환은 서울로 옮겨와서 태평양화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화장품 제조판매를 시작했다. 6·25전쟁으로 내려간 부산 피난지에서는 독자적으로 개발한 가 큰 히트를 친다. 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서도 화장품 사업은 계속 이어졌다. 1961년에는 <아모레>를 화장품의 이름으로 정했다. ‘아모레 아모레 아모레미오~’라는 가사에서 따온 단어인데 당시 누구나 흥얼거리며 다닐 정도로 유행하던 노래의 가사였다.태평양화학을 바꾸다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태평양화학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해갔다. 서성환의 차남인 서경배가 태평양화학에 들어간 것은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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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리스인 조르바'

    세계인을 매혹시키다.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다. 단순히 ‘점심에 뭘 먹을 것인가’에서부터 ‘신은 있다 혹은 없다’라는 어마어마한 명제에 이르기까지. 그 선택이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상관없지만 인생 전체를 뒤흔드는 것이라면 신중하게 임해야 한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처음부터 끝까지 선택을 고민하게 만드는 내용으로 가득하다.내가 없다고 확신해도 엄연히 존재하는 사안이 있다는 게 인생의 난제다. 나의 확신으로 완결되는 것과 확신으로 완결되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에 대한 생각을 정립한 뒤 《그리스인 조르바》를 대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로 불리는 그리스 작가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마치 종교 서적처럼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세계는 물론 우리나라 명사들도 가장 감명받은 책으로 스스럼없이 꼽는 소설이다. 매혹적인 질문과 답변, 함께하고 싶은 공간과 음미하고 싶은 말들이 책 갈피갈피에서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무방비로 끌려가기보다 나만의 답변을 생각하며 책을 대하면 좋을 듯하다.이 책의 화자는 35세 남자로 방안에서 원고를 쓰고 책 읽는 데 빠져 산다. 방안에서 자판만 두드리거나 모바일로 천하를 주유하지만 제대로 된 경험이 없는 요즘 사람을 닮았다. 책벌레라는 놀림을 받던 나는 크레타 해안의 갈탄 광산을 개척하러 떠나기로 결정한다. 우연히 만난 65세의 알렉시스 조르바가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세 살 난 아들을 잃은 뒤 방랑자로 살아가는 조르바가 툭툭 내뱉는 말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여행과 경험, 만남과 부딪침에서 비롯된 생생함에 책만 읽던 나는 곧바로 매혹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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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 김유정 '동백꽃'

    1930년대 17세 처녀의 사랑그 시대 풍경을 이야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익히면서 감동까지 받을 수 있는 장르로는 소설이 가장 적합하다. 2017년 대한민국 17세는 대학입시 준비로 많은 것을 절제하며 지낸다. 1930년대 17세는 어떤 압박을 받았을까.<동백꽃>의 17세 점순이는 동네 어른들로부터 “너 얼른 시집 가야지?”라는 얘기를 듣는다. 남자는 스무 살만 넘어도 노총각이라고 불렸으니 1930년대 17세의 관심은 온통 결혼이었을 듯하다.일제가 조선을 일본화하려고 총력을 기울이던 때, 학교에서 우리말도 배울 수 없고, 우리말로 문화 활동도 하기가 쉽지 않을 때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동백꽃>을 읽기 바란다. <동백꽃>을 실은 <조광>이라는 잡지는 1940년대를 전후하여 일제의 강요에 의해 일본어로 글을 싣다가 끝내 종간되었다1908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난 김유정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서울로 이주해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0년에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두 달 만에 ‘더 이상 공부할 게 없다’고 선언한 뒤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로부터 4년 동안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야학과 간이학교를 운영하다가 방랑생활을 하거나 금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2년 남짓만에 쓴 단편들그러다 소설가 안회남의 권유로 소설 습작을 시작했고 1935년에 <소낙비>와 <노다지>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로부터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단 2년 동안 30여 편의 주옥같은 단편과 10여 편의 에세이를 남겼다. 나라 잃은 설움과 불우한 환경 속에서 김유정이 쓴 소설에는 작가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그 시대 사람들이 잘 표현되어 있다.&l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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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녹십자 허영섭

    한국은 백신의 강국이다. 2010년 신종플루가 유행했을 때 한국의 제약사가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백신 납품 자격을 인정받았다. 세계에서 여섯 번째였다. 제약 기업인 녹십자 이야기다.세계 6번째로 신종플루 백신 납품전자산업이나 자동차산업에 비한다면 한국의 제약산업은 많이 뒤떨어졌다. 화이자(독일), 노바티스(스위스), 로쉬(스위스) 등 세계적 제약사들과 비교가 안 된다. 그러나 혈액제제인 백신만은 녹십자의 한국산 백신이 세계적 수준에 올라 있다.녹십자의 뿌리는 1967년에 세워진 ‘수도미생물약품’이다. 동물용백신 제조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1969년 극동제약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71년에는 (주)녹십자로 상호를 바꿨다.녹십자를 백신 전문 제약사로 성공시킨 사람은 허영섭이다. 1941년생으로 원래 교수가 되고자 독일에 유학 중이던 공학도였다. 그가 제약업계에 발을 들인 것은 1970년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유학생이라도 입영을 연기할 수 없도록 법이 바뀌는 바람에 허영섭은 독일 유학 중 귀국해 방위산업체인 극동제약에 입사했다.필수의약품 국산화이 회사의 대주주 허채경은 허영섭의 부친이었다. 개성 상인으로 한일시멘트를 세워 성공한 기업가였다. 군의감(군의관 중 최고직) 출신 국립보건원장이던 김수명 씨의 청을 받아 혈액제제 사업에 투자하게 됐다. 혈액 관리는 전쟁 등 국가 비상사태 시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허영섭에게 녹십자는 의무복무 기간만을 채우려고 들어간 곳인데 평생을 함께한 기업이 됐다. 처음에는 공무부장으로 시작했지만 곧 중요한 결정에 관여하면서 떠날 수 없는 존재로 변해갔다. 처음 입사했을 때의 사명인 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