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12) 모순
폴란드 화가 안토니 보로로우스키(1784~1832)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1828년 작, 유화, 293㎝×191㎝). 폴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폴란드 화가 안토니 보로로우스키(1784~1832)의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1828년 작, 유화, 293㎝×191㎝). 폴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내가 삶의 기준으로 삼을 옳은 것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그름은 무엇인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 어디가 지옥이고 어디가 천국인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이며 너는 누구인가. 누가 스승이고 누가 학생인가. 배움이란 자신이 우연히 던져진 환경의 관습이나 도덕이 나에게는 ‘옳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배움이란 내가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수많은 ‘다름’에 대한 존경이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무식(無識)에서 탈출할 수 있다.

두 도시 이야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문명이란 무엇인가’를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시민들에게 묻는다. 작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의 과거를 상징하는 테베의 문명을 아테네 근교에 있는 콜로노스에서 구축하려는 새로운 문명과 대비시킨다. 이 비극은 도저히 함께할 수 없는 부랑자이며 방랑자인 오이디푸스를 당시 아테네 시민들이 구축하려는 새로운 도시문명 안으로 수용하려는 과정이다.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상징하는 테베에서 추방돼, 새로운 도시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애쓴다. 그는 자신을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자비로운 도시’를 찾는다. 이 비극을 이해하는 열쇠는 이 두 도시가 상징하는 가치들에 대한 대비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처한 불쌍한 운명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오이디푸스의 딸 안티고네는 눈먼 아버지와 낯선 땅으로 들어갈 참이다. 오이디푸스가 안티고네에게 건네는 말로 비극이 시작된다. “눈먼 노인의 딸 안티고네야, 우리가 대체 어떤 곳에, 어떤 사람들의 도시에 온 것이냐? 오늘은 또 누가 떠돌아다니는 오이디푸스를 보잘것없는 동냥으로 맞아줄 것인가?” 자신이 처한 운명을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어 스스로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도 모르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신비한 경계에 들어섰다. 그는 안티고네와 함께 오랫동안 자신과 같이 저주받은 사람들을 받아줄 도시와 시민들을 찾고 있었다.

오이디푸스는 혼자가 아니다. 장님이 된 아버지를 이끄는 안티고네도 모순적 인간이다. 그녀는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의 결혼’이란 터부를 통해 태어난 자식이다. 안티고네는 동시에 미래 문명과 인류를 구축할 유일한 끈이다. 오이디푸스의 과거가 그를 장님으로 만들었다면, 그 과거는 동시에 그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발판이다. 그녀는 오이디푸스를 새로운 도시문명으로 진입시키면서, 도시문명을 지탱하는 문법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알려주는 지혜로운 여성이다. “아버지, 우리는 이 나라의 관습을 따라야 하며, 정당한 일에는 승복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진입하려는 새로운 문명의 핵심은 승복과 경청이다.

경계(經界)

오이디푸스는 테베라는 과거 도시에서 탈출해 나왔다. 그리고 방랑자가 돼 콜로노스에 진입하고 그곳에서 죽음으로써 아테네라는 새로운 도시를 축복할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도착한 곳은 동떨어진 섬이나 후미진 동굴 혹은 험준한 산 정상이 아니다. 그곳은 도시와 야만의 중간지대인 ‘거룩한 숲’이다. 이곳은 도시와 연결된 장소다. 도시 질서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일부가 아니다. 이곳은 신의 축복과 저주가 혼재한 공간이다. 안티고네는 이 ‘거룩한 숲’을 이렇게 묘사한다. “불쌍한 아버지 오이디푸스여! 이 도시를 지켜주는 성탑들이 내 시야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분명 ‘신성한 장소 (그리스어 코로스 히에로스)’입니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는 이곳이 신비한 공간이란 것을 알아차렸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를 ‘거룩한 숲’ 밖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에 앉힌다. 오이디푸스는 자신들이 들어가려는 공간에 대해 다시 한번 안티고네에게 묻는다. “안티고네야!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나에게 말해다오?” 안티고네는 대답한다. “이곳이 아테네라는 도시인 것을 알겠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장소(그리스어 코론)가 아닙니다.” 그녀의 설명은 모순이다.

코라(chora)

안티고네는 이 장소를 ‘신성한’ 곳으로 부른다. 그러면서 이곳은 ‘장소’이면서 동시에 ‘장소가 아니다’라고 묘사한다. 안티고네가 사용한 그리스 단어인 ‘코라(chora)’는 아테네 도시문명을 이해하는 핵심 단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과 거주할 수 없는 지역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그리스 용어를 사용해 구분했다. 험준한 돌산이나 사막과 같은 장소를 ‘에레모스(eremos)’라고 불렀다. 이 장소는 혼돈 그 자체로 질서가 될 수 없는 버려진 땅이다. 인간들이 정해진 공간에 모여 살면서 관습과 법률이 지배하는 공간은 ‘폴리스 (polis)’, 즉 ‘도시’다. 도시는 ‘질서’의 상징이다. ‘에레모스’도 아니고 ‘폴리스’도 아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신비한 공간이 있다. 안티고네가 언급한 코라라는 공간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주 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티마이오스》라는 책에서 코라를 만물을 담을 수 있는 ‘수용체’, ‘원초적인 공간’, ‘만물을 떠받치는 기저’ 혹은 ‘틈’이라고 설명했다. 코라는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닌 공간으로 우주에 생성되는 모든 형태가 원래 있었던 ‘중간’이다. 코라는 자신을 정의할 의미를 본질로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철학적인 개념도 아니고 신화적인 요소도 아닌, 한마디로 ‘전혀 다름’이다. 그래서 안티고네는 이 장소를 ‘신성하다’고 말한다.

세상은 명암·선악 등 서로 대립적인 두 항의 짝으로 구성…배움이란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다름에 대한 존경이죠
■기억해주세요

배움이란 자신이 우연히 던져진 환경의 관습이나 도덕이 나에게는 ‘옳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배움이란 내가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수많은 ‘다름’에 대한 존경이다. 인간은 배움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세계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무식(無識)에서 탈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