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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시기와 질투 가득찬 인간,다른 사람 불행에서 기쁨 찾아…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고 행복을 빌어주는 마음

    고대 인도인들은 명상과 수련을 통해 자신들이 도달해 안주해야 할 정신적인 도량(度量)을 다음 네 가지로 구분했다. 불교는 이 네 마음을 계승해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인간이 상상할 수도, 셀 수도 없는 경지의 네 가지 마음’으로 정리했다. 첫째는 사랑, 둘째는 연민, 셋째는 기쁨, 넷째는 평정심이다. 이 모든 덕목의 기준은 상대방이다.‘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상대방이 행복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이자 그런 환경을 조성하는 배려다. ‘연민’은 내가 타인의 불행을 보고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소극적인 단계를 넘어선다.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타인이 불행하지 않도록 헌신하는 노력이다. 세 번째 덕목인 ‘기쁨’은 사랑이나 연민보다 힘들다. 왜냐하면, 상대방의 성공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나와 경쟁하던 상대방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 마지막 덕목인 ‘평정심’은 인생의 희로애락을 삶의 일부로 기꺼이 수용하는 마음이다. 선의(善意) 이 네 가지 마음에서 가장 실천하기 힘든 마음가짐과 행동은 ‘기쁨’이다. 기쁨은 산스크리트어로 ‘무디타(mudita)’다. 무디타는 모든 인간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보화다. 무디타는 ‘섞다, 하나가 되다’라는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동사 ‘무드(mud)’의 추상명사형으로 나와 너, 나와 그, 심지어는 나와 원수가 하나가 되는 마음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배 속에서 나와 어머니의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생존하지 못하는 취약한 동물이었다. 나는 기억할 수 없지만, 어머니는 갓난아이인 나의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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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경쟁은 신에 바치는 '거룩한 시도'…경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문화와 문명의 유전자죠

    인간은 원시적인 동물에서 이성을 가진 지적인 동물로 스스로 변화시켰다. 찰스 다윈은 인간을 포함한 동식물의 기원을 《종의 기원》(1859년)이란 저서에서 추적했다. 다윈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된 이유를 다음 두 가지로 설정했다. 한 가지는 ‘약육강식(弱肉强食)’이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동물뿐만 아니라 다른 유인원들, 다른 인종들, 다른 인간들, 심지어는 함께 살고 있는 부모나 형제자매와 경쟁한다.인간은 자신의 행복을 상대방과의 경쟁을 통한 승리에서 찾았다. 불과 도구의 발견은 인간에게 다른 동물을 압도하는 절대적인 우위를 선사했다.그리스 문화의 핵심, ‘경쟁’인간은 ‘적자생존(適者生存)’으로 만물의 영장이 됐다. 자신의 생존을 보장해주는 것은 단순히 타인과의 대결만은 아니었다. 인류는 생존을 위해 30만 년 전부터 동아프리카에서 중동을 거쳐 오늘날 유럽으로 이주(移住)했다. 특히 호모 사피엔스는 4만 년 전부터 유럽으로 이주해 당시 유럽에 자리를 잡고 있던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유인원들과 경쟁했다. 인간은 적자생존을 통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최선의 전략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판단했다. 자연의 변화를 민감하게 감지해 자신이 오랫동안 거주하던 ‘고향’을 떠나 낯선 장소로 이주했다.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와 스위스 역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1818~1897)는 고대 그리스 사회와 서양 유럽의 정신을 ‘경쟁’으로 해석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경쟁을 ‘거룩한 시도’라고 여겼다. 그들이 시작한 올림픽 경기를 비롯해 문화, 예술, 체육 분야를 발전시킨 핵심은 바로 경쟁이다. 인간을 끊임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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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를 잃어버려 의미 없는 삶을 끝내려는 아이아스…인간은 고통을 피할 순 없지만 대처하는 방식은 다르죠

    나는 왜 사는가? 내가 삶을 연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오스트리아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1905~1997)은 독일 나치 수용소에서 그가 생존한 이야기를 《의미를 추구하는 인간》(1946년)이란 책에 생생하게 기술했다. 그는 1942~1945년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비롯한 수용소 네 곳에서 노역을 하면서 살아남았다. 그와 함께 감금돼 있던 부모와 동생, 그리고 임신한 아내가 죽는 과정을 목격했다.프랭클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더 이상 출구가 없는 캄캄한 심연에서 괴로워했다. 특히 자신의 분신인 가족과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뱃속에 있는 미래의 희망인 자식의 죽음은 그를 정신적·영적으로 가사(假死) 상태에 빠지게 했다. 의미(意味)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프랭클은 자신의 경험과 자신이 관찰한 동료 유대인들의 행동을 토대로 인생이 품고 있는 소중한 비밀을 알게 됐다.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을 대처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고통은 자신의 소홀, 실수 혹은 잘못을 통해 생기기도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이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욥은 당대 최고 부자였다. 그러나 욥기에 의하면 그는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식마저 사고로 사망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온몸이 몹쓸 피부병에 걸려 길바닥에 앉아 기왓장 조각으로 몸을 긁는 신세로 전락한다. 프랭클이나 욥에게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생존한 사람들과 사라진 사람들의 차이를 발견했다. 생존한 사람들은 자신이 생존해야 하는 이유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 목적은 남들이 보기에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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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예롭지 못한 삶의 연명을 수치로 여기는 아이아스…우울은 이상과 현실의 정신적 화해가 어긋난 상태죠

    18세기 영국 낭만주의 전성기를 구가한 위대한 시인이 있다. 바로 존 키츠(1795~1821)다. 그는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말을 타다 떨어져 사망했고 어머니도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키츠의 태생적인 감수성은 이런 가정환경과 결합해 그를 심한 우울증으로 내몰았다. 키츠는 25세 젊은 나이에 폐결핵에 걸려 요절했지만, 셰익스피어와 견줄 만한 시인이 됐다.그는 불우한 환경을 오히려 자신의 위대함을 발휘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우울 증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깊은 물에 잠겨 있어. 내가 아무리 발을 차도 위로 올라갈 수 없을 것 같아!” 우울 누구나 인생의 여정에서 키츠가 언급한 고뇌를 한번쯤 경험하기 마련이다. 어떤 이는 갑자기 들이닥친 비극적인 사건에 휘말려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삶을 돌아보며 지금의 현실과 과거에 열망했던 삶의 간극 때문에 자신에게 실망도 한다. 이런 우울한 감정은 대부분 검은 구름처럼 시간이 지나면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몇몇 사람에게는 이런 감정이 시간이 지나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심화된다. 그들은 자신을 세상에 쓸데없는, 미움과 증오 그리고 동정의 대상으로 여긴다. 삶이 이젠 짐이 돼 점점 걸머지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스트리아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1905~1997)이 말한 것처럼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의 의미’를 찾을 때 살맛이 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가시적인 공간과 비가시적인 시간을 차지하면서 이 조그만 육체를 충족하고 정신을 만족시키다가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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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기(狂氣)’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마음 상태…격한 감정에 사로잡혀 저지른 악행은 고통과 슬픔만 따라

    나는 내게 묻는다. “나는 나를 객관적으로, 무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가?” 혹은 “나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대상에 투여해 보는가?” 무엇을 응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광기(狂氣)’란 관찰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는’ 마음의 상태다. 남들을 보기 전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미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모두 미움이다. 격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모두 칭찬할 대상이다.광기란 자신의 마음속에 불이 일 듯 일어나는 격한 감정으로 세상을 보려는 어리석음이다. 광기는 입을 통해, 글을 통해, 몸을 통해 폭력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여기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이 저지를 일을 알지 못하는 비극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아이아스다. 테크메사 아이아스는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고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오디세우스에게 줘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아가멤논과 메넬레우스, 그리고 오디세우스를 살해하려 한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가축들과 목동들을 그들로 착각해 무참하게 도륙한다. 아이아스의 막사에서 나온 자는 테크메사다. 테크메사는 아이아스가 트로이 전쟁 중에 잡은 포로다. 아이아스는 오늘날 터키 중앙에 있는 프리지아 왕국을 점령해 프리지아의 왕 텔레우타스를 살해했다. 이 사건을 기록한 1세기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아이아스가 텔레우타스의 딸 테크메사의 미모에 반해 첩으로 들였다고 전한다. 합창대는 테크메사를 “아이아스가 전쟁에서 자신의 잠자리를 위해 힘겹게 얻은 프리지아 텔레우타스의 딸이여!”라고 부른다. 테크메사는 아이아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우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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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투와 시기에 눈멀어 무차별 살육하는 아이아스…미움의 화살로 가장 큰 상처를 입는 자는 바로 자신

    기원후 2세기 인도 사상가 파탄잘리는 인도의 찬란한 세계 유산인 ‘요가’를 체계화하면서 요가와 관련한 다양한 경전을 집대성해 《요가수트라》란 네 권의 책으로 편찬했다. 파탄잘리는 인간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잡념을 제거하고 더 나은 자신이 되도록 수련하면서 네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했다. 이는 후대 불교인들에게 ‘사무량심(四無量心)’, 즉 ‘셀 수 없고 표현할 수 없는 숭고한 마음 네 가지’로 전수됐다.사무량심(四無量心) 첫 번째는 ‘마이트리(maitri)’다. 산스크리트어 마이트리는 한자로는 ‘자(慈)’로 표현됐다. ‘자’는 흔히 사랑으로 번역된다. 사랑은 내가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느끼고 가하는 감정이나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의 처지를 생각하고, 상대방이 간절히 원하는 것을 미리 살펴 아는 마음이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즐거워하는 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그것을 마련해주려는 애틋한 마음이다. 두번째는 ‘카룬나(karuna)’다. 카룬나는 한자 ‘슬플 비(悲)’로 번역된다. 슬픔이란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기 위해 서로 등을 대고 함께 울 수 있는 마음이며 그 이웃이 슬픈 상황에 처하지 않도록 미리 헤아리고 그 방안을 마련해주는 용기다. 인간이 ‘자비(慈悲)’라는 가치를 자신의 생각과 말, 행동을 통해 실천하면, 이보다 더 심오한 단계의 마음으로 진입한다. 바로 ‘무디타(mudita)’다. 무디타는 한자로 ‘기쁠 희(喜)’로 번역된다. 기쁨이란 한마디로 친구의 출세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이다. 우리는 친구의 불행을 함께 슬퍼하기는 쉬워도, 그(녀)의 행복을 함께 즐거워하기는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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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몽과 오만은 자신만의 색안경으로 세상을 이해…그리스 비극공연은 ‘3인칭 눈’으로 사물 보는 연습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눈앞에 등장한 대상은 내가 보고 분석해 이해하는 객관적인 대상과는 별로 상관없다. 내가 그 대상을 오래전부터 보고 관찰해왔다면, 나는 이미 그 대상에 관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그 이미지에 그 대상을 언제나 대입시킨다. 나는 어떤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이미 저장돼 있는 이미지를 다시 확인할 뿐이다. 만일 내가 마주친 대상이 이전에 본 적이 없거나, 나의 지적인 활동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이상한 것, 혹은 신기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해하기를 포기한다.색안경 나는 내 두 눈을 통해 내가 이해하고 있는 세계 안으로 매일 만나는 대상을 강제로 끌어당긴다.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내적인 통일성과 진정성을 인식하기 위해선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 나는 세상을 왜곡된 시선으로 보고 있다고 인식하고 고백해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인 어제까지의 시선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남들은 모두 내가 색안경을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의 배경과 환경이 나의 습관과 익숙함이 돼 나 자신은 색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기원전 5세기에 등장한 그리스 비극 공연의 가장 큰 목적은 디오니소스 축제에 앉아 비극 공연을 보고 있는 아테네인들에게 세상을 자신의 눈, 즉 1인칭의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옆에 앉아 있는 남편의 눈, 아내의 눈, 자식의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가장 비극적인 인간, 원수의 눈, 적군의 눈, 즉 3인칭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촉구한다. 영화, 연극, 방송, 신문을 포함한 엔터테인먼트는 제3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연습이다. 나의 눈에서 색안경을 벗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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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아림이 없는 크레온 왕이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 비극의 주인공은 오만·아둔·복수로 파국을 초래하죠

    실수하는 사람은 모른다. 자신이 그 일을 잘못했는지. 그는 자신의 습관대로, 혹은 자신이 이해한 사회의 관습대로 일을 저질렀을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다면 깨닫는다. 그가 양식이 있다면, 후에 그 일을 돌이켜보거나 혹은 그 실수가 더 큰 실수로 이어질 때, 실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실수하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는 안목이 있다면, 그는 행복하다. 매일매일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한 걸음씩 전진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거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겐 더 큰 실수가 엄습한다. 그 실수는 돌이킬 수 없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다.하마르티아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비롯한 문학 및 예술작품의 내용과 기준을 정의한 《시학》에서 비극의 주인공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성격을 하나의 그리스 단어로 표현했다. 바로 ‘하마르티아(hamartia)’다. 비극의 주인공은 하마르티아를 통해 자신과 자신의 친지를 해친다. 이 감정은 비극을 관람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성격이며,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어 언제든지 그의 생각과 말, 행동을 지배해 멸망의 길로 인도한다.하마르티아는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 지닌 성격이며 마음가짐이다. 하마르티아는 비(非)도덕적이거나 비윤리적이지는 않다. 그렇다고 반(反)사회적이거나 반가족적도 아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 동사 ‘하마르타노’의 명사형으로, 그 원래 의미는 ‘(궁수가 활시위를 당겨 날아가는 화살이) 과녁으로부터 빗나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