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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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열하게 죽고 싶지 않다”는 외침은 불복종의 정신…스스로 최적의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는 게 참 인간
개인의 숙고를 통해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표현할 수 없을 때, 그 개인들은 자신의 불안감을 ‘대중(大衆)’이라는 거대한 가면에 씌워 힘을 규합하고 팽창한다. 깊은 생각을 연습하지 않고 육신의 편안함과 자극에 탐닉하는 대중의 힘을 정확하게 파악한 독재자는 미디어를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며 개인의 소수 의견을 다수결 원칙에 따라 무시하거나 묵살한다. 정보기술(IT) 세계에선 그런 조작이 더욱 용이하다.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행위는 거룩하다. 그 의견은 국가권력과 미디어가 원하는, 양 떼와 같이 순응하는 대중을 일깨우는 총성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위한 최적의 해결책을 찾으려 고군분투할 때 비로소 인간이다.대중(大衆)역사는 명료한 정신과 그 정신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의지를 실현하려는 용감한 개인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전진한다. 자주적이며 독립적이고 특정 이념에 편향되지 않은 공평한 인간이 선진적인 문명과 문화의 기둥이다. 만일 한 사회가 그런 개인들을 찾을 수 없다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력을 잃고 소멸할 것이다.한 사회의 의미심장한 변화는 항상 개인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의 청원이나 다수결을 통한 결정이 최선의 선택은 아니다. 그 결정에 참여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편견이나 욕심에 근거해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다양한 이유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대중으로부터 혹은 대중의 힘을 얻은 권력에 의존하는 행위는 개인이 지닌 고유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직무유기다. 한 국가의 수준은 개인의 수준이다. 국가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한 개인의 사사로운 태도가 국가의 좌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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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민주주의는 각성한 개인들이 모여서 탄생…자신의 양심에 복종한 안티고네는 위대한 사상가
옛 소련에서 가난한 홀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평범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1945년 포병부대에 근무하며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탈린에 대해 은유적인 용어를 사용해 비꼬았다. 그는 스탈린을 ‘가장(家長)’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코즈야인(khozain)’과 이디시어 ‘발라보스(Balabo)’란 용어를 빌려 표현했다. 이 편지가 소련 당국의 검열에 발각됐다. 그는 강제노역장에서 1945년부터 1953년까지 8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다. 그의 이름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1918~2008)이다. 솔제니친은 후에 이 수용소 시절 기억을 《수용소군도》(1973)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그는 20세기 가장 폭력적이며 비인간적인 삶을 경험한 정치범으로서 개인이 거대한 정치권력에 대항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물었다.집단과 개인솔제니친은 말한다. “용감한 개인(個人)의 단순한 발걸음은 ‘거짓’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개인의 힘은 소수의 권력자들이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대중정치에 맞서 이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의 진보와 행복을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보루(堡壘)다. 문명과 문화의 근간이 되는 위대한 사상은 결국 위대한 개인의 생각과 양심의 정교한 확신에서 시작한다. 소크라테스, 예수, 코페르니쿠스, 마르틴 루터, 프리드리히 니체 등과 같은 혁명가들은 새로운 세상을 개화시키는 거룩한 씨앗들이었다.사람들은 흔히 사회의 변화와 개혁은 집단행동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는다. 개인의 생각과 결단은 이기적이며 사회의 진보와 개선에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사회의 일원으로 사회의 공동 목적과 이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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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은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성이죠…고유성이 없는 인간은 대중(大衆)의 일부일 뿐이에요
누구나 개인(個人)으로 불리진 않는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고유성을 지녀야 개인이다. 자신의 고유성이 없다면, 그 인간은 대중(大衆) 혹은 대중의 일부일 뿐이다. 미디어와 정보기술(IT)이 주도하는 문명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매일 같은 뉴스와 이미지를 보고 접한다. 도시와 도시문명은 인간에게 역설적이다. 그 장소는 개인의 최선을 발견하고 발휘하는 훈련장이면서, 동시에 개인의 개성을 잠식하고 대중문화가 의도한 인간으로 동화시키는 미궁이다. 대중은 타인이 전하는 뉴스를 통해 세계를 보고 그것을 통해 형성된 가치체계와 관습을 ‘진리’로 수용한다.대중(大衆)대중과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감동적인 길과 목적을 발견하고, 자신이 정한 ‘내면의 법’에 의존한다. 바로 개인이다. 사회는 내면의 법에 의존하는 소수의 개인을 혐오한다. 대중은 그 문화를 지탱하고, 그 사회 구성원들의 물질적인 이익을 최적화한 관습으로 법을 만든다. 그 규범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법’이라는 미명 아래 제거 대상이 된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념이 이 세상의 어떤 원칙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도 바치는 순교자가 된다. 순교자에겐 명확한 삶의 가치가 있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행동원칙이 있다.현대문명은 이런 소수들을 격리하고 감금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1926~1984)는 《감시와 처벌》(1975)이란 책에서 서구사회에서 산업혁명 이후 도시로 몰려오는 사람들을 순화해 도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교정기관들이 대거 등장했다고 주장한다.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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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애·양심에 따라 행동하면 국가권력과 수시로 충돌…헤겔 "국가권력과 개인 인권 갈등이 근대정신의 씨앗"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1인칭인 ‘나’를 2인칭인 ‘너’와 불특정 다수인 3인칭 ‘그(녀)’로부터 구분하는가? 나는 우연히 태어난 한국이란 국가의 국민이다. 국가, 도시, 가문과 같은 공동체는 자신들을 다른 공동체와 구분하고 구별시키는 특징들을 인위적으로 만든다. 이 특징들은 헌법, 관습, 규칙, 도덕과 같은 것들이다. 나는 ‘나’라는 정체성을 허락한 커다란 틀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나는 그 틀 밖에서 나를 만들 수 있는가? 내 공동체는 자유의지로 구축한 나를 포용할 것인가, 혹은 억압할 것인가?‘나 자신을 위한 노래’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1819~1892)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자신다운 정체성을 시로 발표했다. 그는 빈농인 아버지와 퀘이커 교도였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초등학교 5~6년 교육이 그가 받은 정규 교육의 전부였다. 휘트먼은 11세부터 병원과 인쇄소, 신문사, 법률사무소 등에서 사환으로 일하면서 인류의 고전과 경전에 심취해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 세계관은 후에 미국의 세계관이 됐다. 그는 미국과 미국인의 좌표를, 36세가 되던 해인 1855년 첫 시집인 《풀잎》에 담았다.《풀잎》에 실린 첫 시 ‘나 자신을 위한 노래(Song of Myself)’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나 자신을 찬양합니다. 내가 지닌 것을 당신도 지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게 속한 모든 원자(原子)가 당신에게도 속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빈둥거리며 내 영혼을 초대합니다. 나는 (땅에) 기대어 편안히 빈둥거립니다.(…) (그러다) 여름 풀잎을 관찰(觀察)합니다.”휘트먼은 서양 서사시 전통의 운율 형식을 따라 노래를 시작하지만 그 내용은 파격적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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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는 비극적 영웅이면서 신적인 존재, 운명을 이겨내며 희망 잃지 않는 게 진정한 영웅
누가 영웅인가. 남들과 비교해 월등한 능력을 지닌, 반은 신이며 반은 인간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영웅인가? 아니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맞이해 영웅적인 극복을 보여준 사람인가?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전형적인 반신반인의 영웅이다. 그는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룩(오늘날 이라크 남부 알-와르카)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는 암소여신 닌순과 우룩의 사제였던 루갈반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탁월한 힘과 지혜를 소유한 길가메시에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우룩 시민들을 괴롭히는 일로 소일했다. 우룩 시민들은 신들에게 탄원해 길가메시가 함께 지낼 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두 종류 영웅그 친구의 이름이 ‘엔키두’다. 엔키두는 사막에서 태어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반인반수(半人半獸)’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우룩 한복판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한 판 씨름을 하며 힘을 겨룬다. 이들은 이 싸움을 통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신들은 길가메시의 오만함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단짝이자 반쪽이 된 엔키두를 병들어 죽게 한다.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죽음으로 권력과 명성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그 이후 실제로죽음을 극복해 준다는 불로초를 찾아 나선다. 죽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우트나피슈팀을 만난다. 우트나피슈팀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지하세계에서 영생을 사는 자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이 알려준 불로초를 찾아 떠난다. 페르시아만 심연으로 잠수해 내려가 마침내 불로초를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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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기품이자 위엄…명분은 일의 가치를 지탱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죠”
나다운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질문보다 더욱 당혹스럽고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나는 훌륭한 죽음을 위해 오늘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미국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2015년 펴낸 《인간의 품격(원제:The Road to Character)》에서 개인이 지닌 두 가지 단면을 소개한다. 한 단면은 우리 대부분이 목매는 소위 ‘이력서에 나열하는 내용들’이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성취한 소위 성공이라고 여겨지는 항목들의 나열이다. 이것과는 다른 단면이 있다. 그 사람의 장례식에서 다른 사람들이 죽은 그를 위해 말하는 내용들이다. 내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때 내 주위 사람들이 나를 두고하는 말들이다.두 종류의 인간브룩스는 한 랍비의 혜안을 빌려온다. 유대경전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 등장하는 중요한 은유를 사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상엔 두 종류의 ‘아담’이 있다. ‘제1 아담’은 남들이 만들어 놓은 성공을 위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세속적인 인간이다. 이 아담은 항상 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해 우위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된 짐승이다. ‘제2 아담’은 평정심을 유지하는 사람이다. 그는 침묵하지만 자신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는 남들에게 선행을 베풀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최선을 다한다. 남에게는 정직하고, 자신에게는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브룩스는 우리에게 제 1아담과 제2 아담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라고 충고한다.품격(品格)이란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할 기품이나 위엄이다. 그런 품격을 어떻게 만들어갈 수 있을까.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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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목소리 듣는 그리스 비극축제는 민주주의 연습…경청의 핵심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
문명은 도시와 문자의 조화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도시는 개인이 혈연과 지연을 넘어서는 타인들과 동거하며 타협하는 장소다. 문자는 상대방 심지어는 자신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만든 공동의 상징체계다. 그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이 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기로 한 약속이다. 도시와 문자는 동전의 양면이다. 도시라는 거대한 공간을 하나로 묶는 끈이 문자다. 도시와 문자가 문명을 구성하는 두 가지 조건이라면, 경청은 문명의 유전자(DNA)다. 경청은 드물다. 다른 사람이 말을 마칠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려 주는 것은 경청이 아니다. 우리는 대부분 그냥 준비 없이 듣는다. 우리는 귀로 사방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듣는 행위를 영어로 ‘히어링 (hearing)’이라고 한다.경청(傾聽)우리는 타인의 말 중 자신이 오랫동안 습관적으로 구축해온 주파수에 맞는 것만 듣는다. 그 주파수에 맞지 않으면 흘려보낸다. 만일 당신이 오늘 하루 동안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 즉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 혹은 부모, 혹은 딸이나 아들이 하는 말을 듣기를 시도해보라. 정말 ‘잘 듣는 행위’가 얼마나 어려운지 금방 깨달을 것이다. 부부 관계, 부모와의 관계, 그리고 자식과의 관계, 더 나아가 자신의 직장 동료 및 상사들과의 관계는 ‘잘 들으려는 시도’만으로 급격히 개선된다.인간관계의 기반은 경청이다. 경청은 말하고 있는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려는 마음에서 시작한다. 말이란 말하는 발화자의 오랜 생각과 습관의 표현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수화자의 생각과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수화자가 상대방의 말을 기꺼이 듣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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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는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호의를 베푸는 용기…경청과 연민 없는 정의는 자칫 폭력으로 변질되죠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그 다른 무엇을 ‘문화(文化)’라고 부른다. 문화란 향기 나며 유유자적하는 한 그루 나무를 가꾸는 과정이다. 누군가 오래전에 토양에 맞는 품종을 골라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줬다. 그리고 바람, 비, 안개, 공기와 같은 자연의 섭리를 간구하고 자연의 혜택을 입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병충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기다린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래서 고귀한 꽃을 피운다.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인간은 이런 문화를 위해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달리 제한된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서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 상부상조하는 것이 문화를 구축하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라는 공간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도시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지만, 자신의 직계 가족과 친족뿐만 아니라 자신과 상관없는 다른 가문, 이방인, 외국인들과 공존하려는 수고를 통해 인간이 된다. 가족과 친족이라는,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관습과 습관이 삶의 유일한 잣대로 여기는 인간들은,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사실 동물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한 이방인은 그것을 ‘정의’라고 선포했다. 그의 이름은 ‘함무라비’다. 함무라비는 바빌론 도시 한복판에 가로 225㎝, 세로 55㎝의 현무암에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