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18) 영웅
누가 영웅인가. 남들과 비교해 월등한 능력을 지닌, 반은 신이며 반은 인간인 ‘반신반인(半神半人)’이 영웅인가? 아니면,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재난과 불행을 맞이해 영웅적인 극복을 보여준 사람인가?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전형적인 반신반인의 영웅이다. 그는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룩(오늘날 이라크 남부 알-와르카)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그는 암소여신 닌순과 우룩의 사제였던 루갈반다 사이에서 태어났다. 탁월한 힘과 지혜를 소유한 길가메시에겐 친구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며, 우룩 시민들을 괴롭히는 일로 소일했다. 우룩 시민들은 신들에게 탄원해 길가메시가 함께 지낼 친구를 만들어 달라고 간청한다.
두 종류 영웅
그 친구의 이름이 ‘엔키두’다. 엔키두는 사막에서 태어난,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반인반수(半人半獸)’다. 길가메시와 엔키두는 우룩 한복판에서 운명적으로 만나 한 판 씨름을 하며 힘을 겨룬다. 이들은 이 싸움을 통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신들은 길가메시의 오만함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단짝이자 반쪽이 된 엔키두를 병들어 죽게 한다.
길가메시는 엔키두의 죽음으로 권력과 명성의 무상함을 깨닫는다. 그 이후 실제로죽음을 극복해 준다는 불로초를 찾아 나선다. 죽은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 우트나피슈팀을 만난다. 우트나피슈팀은 대홍수에서 살아남아 지하세계에서 영생을 사는 자다.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이 알려준 불로초를 찾아 떠난다. 페르시아만 심연으로 잠수해 내려가 마침내 불로초를 손에 넣는다. 그가 고향 우룩으로 돌아오는 길에 날씨가 너무 더워 개울에서 수영하는 동안 뱀이 나와 불로초를 먹고 자신의 껍질만 남겨놓고 사라진다. 길가메시는 어리석은 행동을 자책하며 울었지만, 지혜로운 자가 돼 우룩으로 돌아와 훌륭한 왕이 됐다.
길가메시와 대조되는 또 다른 영웅이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욥이다. 욥은 신이 인정한 영웅이다. 그는 남에게 정직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는 ‘흠이 없는 온전한 인간’이다. 욥은 자신의 잘못을 돌볼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살펴 그들의 잘못이나 실수까지 신에게 대신 용서를 비는 완벽한 인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방의 제일가는 부자였다. 이스라엘의 신 야훼는 ‘신들의 모임’에서 욥이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자랑한다. 신들 중에는 사탄이 있었다. 원래 사탄은 우리가 아는 악마와 같은 존재가 아니다. 사탄은 신이 자랑하는 욥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 ‘시험하는 자’다. 사탄은 욥의 물질적인 풍요와 열 명의 훌륭한 자식이 있어 신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욥이 신을 찬양하는 이유는 세속적인 복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야훼는 욥의 신실함을 알고 싶어 사탄에게 욥의 세속적인 복을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욥에게 재난이 닥쳐 그의 재산이 다 사라지고 열 자녀도 하루아침에 사고로 죽는다. 그러나 욥은 흔들리지 않고 신을 의지하고 믿는다. 야훼는 신앙을 유지하는 욥을 다시 한번 신들의 모임에서 자랑한다. 그러자 사탄은 또다시 신에게 도전한다. “만일 욥이 스스로 몹쓸 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된다면, 그는 당신을 저주할 것입니다.” 야훼는 욥의 신앙을 다시 시험하기로 결정한다. 욥이 온몸에 피부병이 걸려 거의 죽게 됐다. 욥은 아무런 이유 없이 형용할 수 없는 운명적 시험을 당하고도 신을 저주하지 않는다. 그는 이 시험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알기 위해 지적이면서 영적인 탐구를 시작한다. 욥은 길가메시와는 다른 보통 인간으로서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은 영웅이다.
또 다른 영웅, 오이디푸스
소포클레스가 상상해 낸 오이디푸스는 길가메시나 욥을 초월하는 영웅이다. 오이디푸스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비참한 장님 추방자에서 아테네와 콜로노스를 구원하는 영웅이 된다.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왕》에서 왕이었다가 방랑하는 걸인이 됐다. 거룩하고 정결한 공간을 확보하는 신적인 왕에서 그 공간을 오염시키는 불행의 상징이 됐다.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지고 가는 비극적인 왕으로, 거친 운명의 희생양이 된 인간 불행의 상징이다. 《오이디푸스 왕》이 전달하는 운명의 부정적인 변화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전복된다. 이제 오이디푸스는 낯선 땅 콜로노스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며 비극을 초월해 신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비극적 영웅이지만 동시에 신적인 존재가 된다. 오이디푸스의 시신은, 그것을 소유한 도시에 전쟁에서의 승리와 지속적인 안녕을 보장하는 보루(堡壘)다.
오이디푸스는 임박한 죽음의 그림자를 보며 아테네 왕인 테세우스에게 유언한다. “내 목숨의 저울이 기울었습니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그대와 이 도시에 준 예언을 저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 예언이란 자신의 죽음과 시신이 상서로운 복이라는 선언이다. 테세우스는 이 보잘것없는 장님에게 그 증거를 대라고 요구한다. 오이디푸스는 “저 끊임없는 천둥소리와 아무도 이긴 적이 없는 팔에서 내던져진 번쩍이는 번개들이 그 증거들”이라고 말한 후 자신을 콜로노스와 아테네를 불행으로 몰아넣는 저주가 아니라 ‘세월을 초월하는 보물’이라고 스스로 평가한다. 누가 오이디푸스를 보물이라고 정의했는가? ‘세월을 초월하는 보물’은 무엇인가?
기억해주세요
이제 오이디푸스는 낯선 땅 콜로노스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며 비극을 초월해 신적인 존재로 거듭난다. 그는 비극적 영웅이지만 동시에 신적인 존재가 된다. 오이디푸스의 시신은, 그것을 소유한 도시에 전쟁에서의 승리와 지속적인 안녕을 보장하는 보루(堡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