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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시켜나갔을까요. 한편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운동이 추진됐으며 또 한편에서는 성리학적 예법을 바로 세우려는 양반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북벌을 추진하던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효종이 의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정점이라는 예송논쟁으로 조선은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어떤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을 것이냐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죠. 바로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입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이미 소개된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중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는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둘째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효종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스승이 있었죠. 한 명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어부사시사>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남인 계열의 윤선도이며, 또 다른 이는 율곡 이이를 계승하고 김장생에게서 예법을 배운 서인 계열의 우암 송시열입니다. 둘은 같은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갈라지며 경쟁관계기도 했죠. 주자의 성리학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구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효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상복 문제로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 역사 기타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이곳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쳐야 할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1637년 1월30일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이 산성의 서문으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로 향했습니다. 1636년 겨울에 발발한 병자호란 또는 병자전쟁의 결과 조선은 청에 굴복하고 조공·책봉 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두 번의 전란, 그리고 인조의 선택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평가할 수 있는 요소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통치 철학과 권력 의지, 그리고 민생 안정 등인데요. 광해군을 축출하고 반정을 단행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앞의 두 가지는 명확했습니다. 지난호에도 언급했듯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친명배금’을 저버린 광해군의 정치 행위는 성리학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반대로 인조와 서인은 정치적 정당성과 그에 기반한 권력 의지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지요. 과연 인조가 광해군보다 더 개혁적 정책을 실시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는가 하는 부분에서 평가가 갈릴 수 있습니다. 특히 그 평가의 핵심에 바로 병자호란이 있습니다. 인조는 다수의 농민이 임진왜란 이후 궁핍해지고 농경지는 황폐화된 것을 감안해 풍년이건 흉년이건 상관없이 토지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해 징수하는 영정법을 실시했습니다.그리고 광해군이 실시했던 대동법을 강원도로 확대 실시했지요. 그러나 이런 민생 안정책에도 불구하고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어야 했으며, 특히 병자호란으로 인해

  • 역사 기타

    광해군의 두 얼굴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 실용적 외교노선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군주인가, 아니면 인륜을 어기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나라를 망친 폭군인가. 조선의 역대 왕 중 오늘날까지 가장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왕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정반대의 민낯을 역사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한국사를 단지 위인전의 나열이 아니라 생각하고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그는 조선 제15대 왕이자 연산군과 함께 ‘군’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은, 광해군입니다.위대한 군주인가 패륜적 폭군인가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후궁의 자식이라 사실 조선의 예법을 엄밀히 적용하면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위 형인 임해군이 있었고,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왕비(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이 적자로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서자인 광해군이 왕이 되기에 무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임진왜란 때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조정을 이끌던 왕세자였습니다. 이른바 ‘분조’ 활동이라 하여 의주와 평양에 있었던 선조를 대신해 조정을 쪼개 전쟁 상황에서 국가를 이끄는 것이지요. 전국을 돌며 광해군은 민심을 달래고 군량을 모았으며, 한편으론 의병활동을 펼치던 유생들과 뜻을 함께하게 됩니다. 이때 남명 조식의 제자이던 정인홍 등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훗날 이들이 곧 북인 집권 세력이 됩니다. 이렇게 전쟁 속에서 국가를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나름대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특히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중기 이후 문제가 되었던 공

  • 역사 기타

    이순신, 일본군의 기세를 꺾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시작돼 그가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이 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부터 직감적으로 전쟁을 예감하고 준비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물러가는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했지만 안타깝게 산화한 영웅이 있습니다. 23전 23승의 전승을 올린 인물, 바로 성웅 이순신입니다.조선의 상식을 실천한 이순신이순신에 대해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조선의 상식을 곧이곧대로 실천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기 전, 한때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다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됩니다. 상관에게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지만 상관이 이를 묵살했고, 나중엔 적장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백의종군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에서 거리낌없이 당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도 그 백의종군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죠.어릴 적 친구였던 유성룡이 그를 늘 칭찬하고 추천하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가 그를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때도 이순신은 같은 문중(덕수 이씨)이지만 율곡 이이가 당시 이조판서, 즉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라 만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문중이라 출세하게 된다는 둥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임진왜란 중 원균의 오판과 모함, 그리고 일본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될 때는 상황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마침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에요. 그는 억울함과 슬픔을 모두 가슴에 안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그것이 그가 지켜야 할 상식선이었으니까요. 1598년 노량해전에서

  • 경제 기타

    (37·연재를 마치며) "역사는 자주 갈림길을 만나는 산길 같은 것"

    “역사는 자주 갈림길을 만나는 산길과 같은 것이 아닐까? 쉽게 돌아 나올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영영 길이 나뉘어져 ‘가지 않은 길’도 많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흔히 말하지만 다양한 갈림길에서 왜 하필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질문해야 할 것이며 또 다른 길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해보아야 한다.”<경제학자가 본 한국사> 시리즈를 마친다. 1980년대 이후는 역사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가까운 과거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 쓴 글을 모으면 짧은 책 한 권 분량은 되므로 소감 몇 마디를 적어 맺음말로 삼고자 한다. 매주 원고를 쓰는 것이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덕분에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먼저 1년 가까이 함께한 독자와 귀한 지면을 제공해 준 한국경제신문사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또한 매체의 성격 때문에 참고한 연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점에 양해를 구하며 감사드린다.이 글을 쓰기로 한 것은 한국사 교육은 너무 중요해 교과서에만 맡겨둘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독자라는 점 때문에 쉽게 써야 한다는 요청이 있었지만 생각해보면 성인이 된다고 저절로 한국사 지식이 진보할 까닭도 없다. 고교 졸업 후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거나 한국사에 각별한 관심이 없다면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일반 국민의 ‘상식’을 형성하는 것은 청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배우는 한국사 교과서가 대부분이다.문제는 이렇게 형성된 국민 ‘상식’이 최신 연구 성과와 괴리가 크다는 점이다. 독자들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자주 접했겠지만 근현대사 교과서를 두고 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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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수출지향 공업화와 급속한 경제성장

    산업혁명 이후 선진국과 후진국의 생활수준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개항으로 이러한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세계에 들어간 우리나라는 공업화에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왜 19세기 후반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20세기 후반에는 가능하게 됐을까?‘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나라 안팎의 수많은 요인이 절묘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후진국에서도 공업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환경이 제공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의 공업기술이 고도화되고 임금이 급속히 상승하게 됨에 따라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은 채산이 맞지 않게 됐다. 공장을 후진국으로 옮기거나 로열티를 받고 기술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경공업부문뿐만 아니라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와 같은 중화학 공업부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이 선두에서 한국과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를 이끄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의 공업화가 진행됐다.1960년대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채택이러한 국제환경을 잘 이용할 수 있는 공업화 전략이 수출지향 공업화였다. 후진국의 공업화 전략은 수입품을 국산품으로 대체하는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과 해외시장에 판매할 목적으로 생산하는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후진국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택했다. 높은 관세 장벽으로 유치산업을 보호함으로써 공업화를 달성하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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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체제선택

    1945년 해방에서 1950년대까지는 국가건설(state-building)과 체제선택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를 대체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경제체제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해방과 분단, 경제위축과 혼란, 인플레이션, 좌우 대립, 6·25사변, 부패와 부정선거, 원조경제 등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향하도록 방향을 결정한 실로 중대한 시기였다. 출발점에서 방향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수립에 실패하였거나 시장경제체제가 아닌 사회주의체제가 성립하였다면 우리는 휴전선 너머 북한과 비슷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의미는 총독이 대통령으로 바뀌고 일본인 관리가 한국인 관리로 바뀌었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자신을 대표하는 의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닌다.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도 조세를 거두어 공공재를 공급하였지만, 총독은 오로지 일왕에게만 책임을 질 뿐 재정운영을 비롯한 일체의 통치행위에 대해 식민지 주민인 한국인에게는 어떠한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식민지 경제 단절 충격 20년 지속3년간 미군정 기간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식민지 경제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국민경제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식민지 시기 동안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34회 참조). 발전의 동력이 외부에 있고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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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식민지 공업화와 경제성장

    식민지 시기 한국은 1940년에도 도시화율이 16%에 불과해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살고 있었고 지주제가 발달해 농민의 절반이 봄이면 식량이 떨어지는 극빈 상태에 놓여 있었다(33회 참조). 그러나 이런 점만 보고 식민지 시기를 생산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맬서스 함정’에 빠진 전통 농업사회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무엇보다 상당히 빠른 속도의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됐다.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였지만 식민지 조선 지역 안에서 1년 동안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합계해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GDP)’을 구해보면 1911년부터 1940년까지 연평균 3.6%의 속도로 성장했다. 그해 가격으로 계산한 명목 GDP는 물론 1935년 가격으로 계산한 실질 GDP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그림).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일어났던 세계적으로 저성장기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경제는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더욱이 GDP 증가율(3.6%)에서 인구 증가율(1.3%)을 빼 구한 1인당 GDP 증가율도 연평균 2.3%에 달했다. 이는 인구 증가 속도보다 생산 증가 속도가 빨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의 경제가 맬서스 함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농업비중 낮아지고 광공업 비중 높아져산업별로 보면 광공업 부문이 빠르게 성장했다. 1911~1940년 농림어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5%에 불과했지만 광공업은 9.7%였고 특히 1930년대에는 13.5%에 달했다(1930~1940년).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산업구조에도 상당히 큰 변화가 생겼다. 1911년에는 전체 생산에서 농림어업이 67.8%를 차지했지만 1940년에는 42.0%까지 낮아진 반면 광공업(전기가스 건설업 포함) 비중은 1911년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