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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20) 조선후기 시장경제의 발전과 한계

    조선 전기에는 시장경제의 비중이 매우 낮았다. 건국 초기 국가정책에 의해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하여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농민들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장에 모여 유흥을 즐기거나 상업 활동을 위해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 생산에 해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서울에도 궁궐 앞 대로에 시전(市廛)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16세기 후반에 사헌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따르면, 10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시전을 이용한 횟수는 70여회에 불과하였다. 우선 녹봉과 관료에게 배정한 공노비와 호위병,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바치는 공물이 있어서 시전을 이용할 필요가 적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물이었다. 유희춘은 66개월간 학연이나 혈연관계가 있거나 자신의 추천으로 지방관으로 나간 관료들로부터 무려 2796회, 한 달에 42회꼴로 선물을 받았다. 쌀과 같은 곡물부터 시작하여 면포, 부채, 종이, 붓, 먹과 같은 문방구, 꿩, 생선, 전복, 소금, 감, 유자, 감자, 생강, 마늘, 인삼, 꿀과 같은 수산물, 과일, 약재는 물론이고 장작과 숯과 같은 땔감까지도 선물로 확보하였다. 공물과 선물로 물자를 확보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시전을 거의 이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임진왜란 이후 시장경제 점차 발전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 시장경제의 비중은 높아진다. 전쟁의 충격으로 농촌을 떠난 인구가 많아졌으며, 1608년 이후 점차 대동법이 전국에 확대되어 국가에 집중된 미곡이 대량으로 공인을 통해 방출됨으로써 상업 발달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1678년에 상평통보

  • 경제 기타

    빗장풀린 틈새시장서 큰 돈 번 변호사, 진입장벽 높은 곳은 부가가치도 없다

    '변호인'을 통해 본 이익집단과 면허의 경제학영화 ‘변호인’의 인기몰이엔 이유가 여럿 있다. 배우 송강호의 열연에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스토리가 먹혔다는 분석이다. 실존 정치인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기에 일어난 논란이 어쩌면 흥행에 가속도를 붙였을 수도 있다. 비록 정치색이 있는 작품이지만 경제학적으로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영화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문가집단 간의 줄다리기, 학력에 의한 차별, 공고한 전문직 시장 진입장벽 등을 아주 세심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면허의 경제학“저한테 죽이는 아이템이 하나 있습니다만…. 돈 좀 빌려주이소.” 영화 초반인 1981년 어느 날, 부산의 신참 변호사 송우석은 한 선배 변호사를 찾아간다. 판사로 잠깐 일하다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지만 파리만 날리던 시절이었다. “뭔데?” 시답잖아 하는 선배의 반응에도 우석은 자신만만했다. “법이 바뀌어 이제 변호사도 부동산 등기 업무를 할 수 있다 아입니꺼.”우석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법무사에게만 허용됐던 부동산 등기 업무가 변호사에게도 막 열린 상황. 그러나 당시 변호사들은 부동산 등기 업무를 하찮은 일로 치부했다. 하지만 우석은 부동산 등기 시장을 선점하면 떼돈을 벌 수도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더욱이 우석에겐 다른 법무사들에겐 없는 한 가지 경쟁력이 있었다. 변호사 자격증이란 고급 면허였다. 전문직 면허제는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진입장벽이다.면허 같은 진입장벽이 있으면 공급은 자연히 비탄력적이 된다. 공급의 가격탄력성이란 가격이 변할 때 공급량이 얼마나 민감하게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 역사 기타

    (19) 조선시대는 상품화폐의 시대

    조선시대는 상품화폐(commodity money)의 시대였다. 화폐는 교환을 매개하고 가치를 저장하며 지불 수단과 회계의 단위로서 기능하는 모든 것이다. 크게 상품화폐와 명목화폐(fiat money)로 구분된다. 상품화폐는 물품화폐나 실물화폐라고도 하는데, 재료(소재)의 가치에 기초하여 화폐의 가치가 정해지는 화폐다. 쌀, 무명, 삼베와 같이 일반 재화가 화폐로 사용되는 경우와 금화와 은화,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가 있다.이러한 상품화폐의 반대편에 있는 화폐가 명목화폐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짜리 지폐처럼 재료 자체는 아무 쓸모가 없고 국가의 법과 권위와 국민의 믿음에 의해 통용되는 화폐다. 상품화폐와 명목화폐의 양 극단 사이에 신용화폐(fiduciary money, credit money)가 있다. 소재 자체는 명목화폐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지만 액면에 기재된 만큼의 상품화폐나 자산과 교환해준다고 보증한 화폐를 말한다. 금본위제에서 금과 교환해주기로 약속한 태환지폐가 대표적이다.상평통보 이전에는 쌀· 포목 등 상품화폐 유통조선왕조는 1401년(태종 1년)에 저화(楮貨)라는 지폐를 발행했으며 세종대에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통용에는 결국 실패하였다. 1678년(숙종 4년)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발행하기까지 화폐로 통용된 것은 일상에서 꼭 필요한 필수품이면서 조세로 거두었던 쌀과 포목(삼베,무명)과 같은 상품화폐였다. 사용을 강제하였다가 보상도 없이 유통을 포기하는 일관성 없는 화폐 정책도 문제였지만, 사람들이 저화와 같은 명목화폐를 “굶주려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는 한 조각의 검은 자루에 불과한 것”(『태종실록』 3년)이라고 생각했고, 동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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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대동법과 공납제도의 개혁, 변화 속의 지속성

    17세기 이후 소농경영이 성장하였으며 18세기부터 노비를 이용한 농장경영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농업부문의 변화와 병행하여 조선왕조 재정제도도 17세기를 통하여 크게 변화되었다. 다름 아닌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것이다. 대동법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행된 후 점차 확대되어 1708년(숙종 34년)에 황해도를 끝으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꼬박 100년이 걸렸는데 대동법에 대한 저항이 컸으며 그런 저항을 이기고 시행된 만큼 재정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공물을 토지 1결당 12말의 쌀로 통일대동법의 요체는 왕실에 대한 ‘진상’과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대한 ‘공물’을 각종 현물로 납부하는 대신에 쌀로 납부하도록 한 것, 그리고 일정한 규정도 없이 가호(家戶)에 부과하던 것을 토지 면적 1결(편집자주:조선시대 1결은 약 1만㎡)에 대해 쌀 12말을 납부하도록 부과기준이 바뀐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일부 산간지역은 쌀 대신 무명이나 삼베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상평통보 발행 이후에는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한 지역도 생겼는데 기본은 쌀이었다. 전세가 1결에 쌀 4말이었기 때문에 이제 3배나 되는 쌀을 추가로 상납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 중앙과 지방에 납부하던 공물 값과 운반 비용 그리고 지방경비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부담은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공물 수취가 토지 면적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다.대동세는 대략 절반은 서울로 상납하고 절반은 지방경비로 남겨두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1769년(영조45)을 예로 들면, 8도 대동세 총액은 쌀 56만9000여석이었는데 중앙 상납은 55%에 해당하는 31만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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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적의 결과' 찾아 환상 헤매던 천재 수학자…'최적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존 내시는 역사상 대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하지만 그 공이 오롯이 내시 자신에게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가 떨친 유명세의 상당 부분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 역을 맡아 호연한 러셀 크로의 덕이다.영화는 게임이론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경제학의 새 지평을 열었지만, 40년 동안 정신분열증에 시달린 천재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내시의 삶을 다뤘다. 정신질환으로 황폐해져 가는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아내 앨리샤 라지(제니퍼 코넬리 분)와의 사랑이 감동적으로 그려졌다.영화는 2002년 제59회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4개 상을 받았고, 같은해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감독상·여우조연상·각색상을 받았다. 내시의 실제 삶 역시 영화의 화려한 수상이력 못지않다.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정신질환을 거의 극복하고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이 남자는 천재다”1940년대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프린스턴대 대학원. 무시험 장학생으로 입학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수학과 새내기가 눈길을 끈다. 내성적이며 무뚝뚝하고, 오만할 정도로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이 천재가 바로 내시다. 그는 기숙사 유리창을 노트 삼아 자신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찾는 데에 매달린다.실제 존 내시는 1928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블루필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이 됐을 땐 미국 전역에서 10명에게만 주는 웨스팅하우스 장학금을 받고 1945년 피츠버그의 카네기공대에 입학했다. 1948년 9월 카네기공대를 졸업한 뒤 프린스턴과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동시에 입학을 제안받는다. 스무 살의 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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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소농경영의 성장과 지주제의 발달

    18세기 이후에 노비제가 쇠퇴한 가장 큰 원인은 소농경영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17세기부터 부부가 중심이 된 소가족의 노동력을 이용한 농업경영이 확산됨에 따라서 노비에 대한 수요와 공급이 감소하게 되었다.전처럼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가 직접 노비를 부려서 경영을 하지 않아도 토지를 빌려주고 지대(소작료)를 수취할 수 있게 되었으며, 소농경영의 자립성이 강해져 노비로 전락하는 농민들이 줄어들게 된 것이 노비제가 쇠퇴하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조선전기에는 양반들의 농장은 노비를 구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일부 소작을 주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노비를 이용하여 경작되었다. 노비를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가작’(家作)이라고 하여 말 그대로 주인집에서 직접 농사를 짓는 것이다. 주로 집 근처의 경지에 대하여 노비를 직접 지휘 감독하여 수확한 생산물을 모두 주인이 취하는 방법을 말한다. 또 하나는 ‘작개’(作介)라는 생소한 이름으로 부르는 방법인데, 주인집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경지를 경작할 때 이용된 방법이었다. 노비에게 ‘작개’라고 부르는 토지와 ‘사경’(私耕)이라고 부르는 토지를 짝을 지어서 지급하되 ‘작개’의 수확은 거의 모두 주인에게 상납하고 ‘사경’의 수확은 노비에게 주어 생활 자료로 삼도록 하였다.노비 이용한 가작 작개 거쳐 소농경영 발전이러한 ‘작개제’에 의한 경영은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이루어졌다. 한 가지 사례로 1554년에 서울에서 사는 안(安)씨 양반가는 경기도 파주에 509두락(1斗落=1마지기=200평으로 계산해서 10만1800평)의 농장이 있었는데 9명의 노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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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하계 항로 독점하려는 무역연합의 공격…제다이 기사단의 반격은 시작됐는데…

    ‘스타워즈 에피소드1’ 로 본 자유무역 vs 보호무역아주 먼 옛날 은하계 저편. 평화롭던 은하계가 분쟁에 휩싸인다. 은하계 외곽의 무역항로를 독점하려는 무역연합이 아미달라 여왕(내털리 포트먼 분)이 다스리는 나부행성의 무역로를 차단하면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하 공화국 의회에서 제다이 기사 콰이곤(리엄 니슨 분)과 그의 제자 오비완(이완 맥그리거 분)이 파견되지만 무역연합은 이를 무시하고 나부행성을 공격한다. 1999년 개봉한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은 은하계의 평화를 깨는 요인을 무역분쟁에서 찾는다. 우주 평화의 수호자 제다이 기사들이 무찔러야 하는 나쁜 편은 기존 무역질서를 뒤흔드는 세력으로 묘사된다.이런 설정은 1977년 시작된 오리지널 스타워즈 3부작(에피소드4~6)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당시 악의 축은 전체주의를 연상시키는 사악한 독재권력이었다. 에피소드1 개봉 당시 미국 영화 전문지 ‘버라이어티’는 흥미로운 영화평을 내놨다. 냉전시대 스타워즈가 미국의 적을 전체주의로 간주했다면 통상전쟁 시대에 제작된 오늘날의 스타워즈는 자유무역을 위협하는 세력을 잠재적 위협으로 설정했다는 것.콰이곤과 와토의 첫 거래 실패 이유에피소드1은 스타워즈 시리즈의 다른 작품과 달리 교역을 다룬 장면이 영화 곳곳에 들어있다. 우주 평화의 수호자 제다이 기사들의 첫 임무가 나부행성과 무역연합 간 무역협상을 중재하는 역할이란 점부터가 그렇다. 위기에 빠진 아미달라 여왕을 구해 공화국 수도로 향하던 콰이곤 일행이 무역연합의 공격을 받고 타투인행성에 불시착하면서 벌어진 일도 흥미롭다.콰이곤 일행은 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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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조선시대 노비의 수요와 공급

    양반은 노비(奴婢)가 있어야 제대로 된 양반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양반의 나라인 조선은 노비의 나라이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의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는 노비제의 전성기였다. 전체 인구의 30~40%가 노비였다고 추측되는데 노비제가 발달한 남부지방은 더 높았을 것이다. “노비가 십중 팔구”라는 말은 과장이지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노비가 절반”이라는 성현(成俔)의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었다. 17세기의 호적을 봐도 1609년 울산은 47%가 노비였으며, 1606년의 단성은 무려 64%가 노비였다.조선은 양반의 나라이자 노비의 나라노비는 양반이 가장 많이 소유하였는데 천명이 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태종이 노비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하였을 때 노(奴·남자종)만 계산하여 왕실의 종친과 부마는 150명(1품)이었고, 문무관은 130명(2품 이상)이었다. 비(婢·여자종)와 처가에서 상속받은 노비는 빠져 있으므로 500~600명은 보유할 수 있었음에도 반대가 심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왕실과 양반이 소유한 노비 숫자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고위 관직을 지낸 양반들이 많은 숫자의 노비를 소유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이맹현은 노비 757명을 자손에게 상속하였는데(1494년), 현재까지 전하는 상속문서 중에서 가장 많은 숫자다. 퇴계 이황도 5명의 자녀에게 모두 367명의 노비를 상속하였다(1586년). 노비는 이렇게 토지와 마찬가지로 상속되고 매매되는 재산이었다.왜 노비제가 발달하게 되었을까. 노비 시장을 가정하고 노비의 수요와 공급을 생각해보자. 먼저 수요부터. 노비는 양반의 수족으로서 집안일부터 농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노동을 대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