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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인기스타 앞세우고, 흥겨운 CM송 내세우고, 독점적 경쟁시장에서 왜 광고전쟁을 벌일까?

    “주말에 밖에서 식사하지 않을래? 내가 ‘좋은 소식’을 앞두고 있거든.”광고회사의 잘나가는 중간간부인 닉 마샬(멜 깁슨 분)은 평소 관심있던 커피숍 여직원을 찾아가 이렇게 추근거린다. 훤칠한 외모에 든든한 직장을 앞세워 여자들 후리는 데는 이골이 난 인물. 요즘은 인생이 더 즐거워 보인다. ‘광고회사의 꽃’, 기획부장으로의 승진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명의 날이 왔지만 닉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기획부장 자리가 경쟁사에서 스카우트해온 여성인 달시 맥과이어(헬렌 헌트 분)에게 돌아갔다는 통보를 받은 것.영화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는 우연히 감전 사고를 당한 이후 여성들의 속마음을 들을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을 갖게 된 한 남자가 비즈니스와 사랑,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그린 코미디 영화다.물거품이 된 기획부장의 꿈영화 초반 닉의 상사는 달시를 기획부장으로 스카우트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1980년대엔 술 담배 자동차로 재미 좀 봤지. 근데 1990년대부터 남성 시장은 죽었어. 우리가 맥주 광고나 만들고 있는 동안 비즈니스의 판도는 변했고 광고 시장 1위 자리도 내주게 됐지.” 여성의 취향을 잘 알고 관련 광고 경험이 많은 여성 기획자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그렇다면 광고는 왜 생겨난 것일까. 경제학은 독점적경쟁시장을 광고의 태생적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는 독점시장의 속성을 지녔으면서도 경쟁적인 시장을 뜻하며 △다수의 기업이 같은 소비자 집단을 대상으로 하며 △각 기업이 경쟁 기업과는 차별화된 제품을 생산하며 △기업의 시장 진입에 장벽이 없다는 세 가

  • 경제 기타

    (21) 조선왕조는 세계 최대 곡물저장 국가

    현대 국가는 세입과 세출을 일치시키는 재정균형을 목표로 하지만 조선왕조는 수입을 가능하면 많이 남겨 비축하는 것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국 초기부터 쌀을 비롯한 각종 곡물을 저장해 전쟁과 기근에 대비하였는데, 평상시에도 봄마다 민간에 대여한 후에 가을에 이자를 더하여 환수하였다. 다름 아닌 환곡(還穀)제도다. 대략 30%는 창고에 남겨두고 70%를 민간에 대여하였으며 10%의 이자를 수취하였다. 본래는 이자 수입을 위한 것은 아니었으며 곡물을 오래 저장하면 변질되고 쥐가 먹거나 하여 축이 나기 때문이었다.조선전기에는 태종 후반기부터 저장한 곡물의 규모가 증가하기 시작해 세종대부터 세조 전반기까지 가장 큰 규모를 유지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매년 대부하고 환수할 수 있는 의창(義倉)의 곡물이 100만석이 넘었으며 세종 27년(1445)에는 270만여석이 분배됐다. 세조 후반기부터 16세기에는 환곡이 감소해 임진왜란으로 바닥에 이르렀지만 17세기 후반인 숙종 대부터 다시 늘어나기 시작하여 18세기 초에는 500만석, 18세기 후반에는 최고 수준인 1000만석에 이르게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감소하였지만 19세기 중반까지도 800만 석 수준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환곡의 관리가 부실하게 되어 장부상으로만 기록된 곡물이 늘어나 1862년에 전체 환곡의 54.4%나 되었다. 이 무렵이 되면 환곡의 정상적인 운영은 중단되었으며 조세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환곡 1000만석은 쌀로 환산하면 600만석 정도가 되는데, 중앙과 지방을 합한 1년 세입이 400만석 정도였으므로 조선왕조는 국가재정보다 더 큰 규모의 곡물을 저장하고 있었던 셈이다. 같은 시기 1790년대의 중국의 경우에 상평창(常平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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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음·자원 왕국' 노르웨이의 번영보다 더 극적인 경제성장은 '한강의 기적'

    지난 1월 대한민국이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에 푹 빠졌었다. 겨울왕국은 아렌델 왕국의 두 공주 엘사와 안나의 ‘자매애’를 그린 애니메이션으로 누적 관객 수 1029만명을 돌파했었다. 이야기는 언니 엘사가 지닌 신비한 초능력에서 시작된다. 그녀는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엘사와 그녀의 동생 안나는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고 엘사의 초능력을 이용해 함께 눈사람을 만들며 놀곤 했다. 하지만 엘사의 초능력은 나이가 들수록 점점 강해진다. 엘사가 여왕에 올라 대관식이 열리는 날 엘사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아렌델 왕국을 모두 얼려버린다. 엘사는 결국 자책감에 왕국을 떠나고 안나는 언니를 찾아 험한 여정에 나선다.자원과 무역의 나라, 노르웨이겨울왕국은 아름다운 영상으로도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신비함으로 가득한 오로라, 높은 산과 바다를 배경으로 한 대자연의 수려함을 담았다. 영화는 동시에 아렌델 왕국의 실제 배경인 노르웨이가 경제적 번영을 이룰 수 있었던 지정학적 특성과 산업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노르웨이는 국토의 절반 이상이 북극권에 속하고 빙하와 호수로 이뤄져 있다. 내륙에는 험준한 산맥들이 자리 잡고 있어 육로보다는 해로가 일찌감치 발달한 국가다. 수산물 석유 천연가스 등 천연자원에 무역경쟁력까지 겸비해 강소국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2012년 세계은행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은 9만9000달러.노르웨이는 연어 대구 등 풍부한 어획량을 앞세워 세계 2위의 수산 수출국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영화에서도 노르웨이의 수산자원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쇼핑을 위해 찾

  • 경제 기타

    (20) 조선후기 시장경제의 발전과 한계

    조선 전기에는 시장경제의 비중이 매우 낮았다. 건국 초기 국가정책에 의해 농촌에 장이 서는 것을 금지하여 고려시대에 있었던 농촌 장시도 사라졌다. 농민들이 농사에 힘쓰지 않고 장에 모여 유흥을 즐기거나 상업 활동을 위해 이동하는 것은 국가의 근본인 농업 생산에 해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서울에도 궁궐 앞 대로에 시전(市廛)이 조성되어 있었지만, 많이 이용되지는 않았다. 16세기 후반에 사헌부 대사성과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따르면, 10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시전을 이용한 횟수는 70여회에 불과하였다. 우선 녹봉과 관료에게 배정한 공노비와 호위병,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노비가 바치는 공물이 있어서 시전을 이용할 필요가 적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선물이었다. 유희춘은 66개월간 학연이나 혈연관계가 있거나 자신의 추천으로 지방관으로 나간 관료들로부터 무려 2796회, 한 달에 42회꼴로 선물을 받았다. 쌀과 같은 곡물부터 시작하여 면포, 부채, 종이, 붓, 먹과 같은 문방구, 꿩, 생선, 전복, 소금, 감, 유자, 감자, 생강, 마늘, 인삼, 꿀과 같은 수산물, 과일, 약재는 물론이고 장작과 숯과 같은 땔감까지도 선물로 확보하였다. 공물과 선물로 물자를 확보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시전을 거의 이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임진왜란 이후 시장경제 점차 발전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 시장경제의 비중은 높아진다. 전쟁의 충격으로 농촌을 떠난 인구가 많아졌으며, 1608년 이후 점차 대동법이 전국에 확대되어 국가에 집중된 미곡이 대량으로 공인을 통해 방출됨으로써 상업 발달을 자극하였다. 더욱이 1678년에 상평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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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빗장풀린 틈새시장서 큰 돈 번 변호사, 진입장벽 높은 곳은 부가가치도 없다

    '변호인'을 통해 본 이익집단과 면허의 경제학영화 ‘변호인’의 인기몰이엔 이유가 여럿 있다. 배우 송강호의 열연에 단순하면서도 힘있는 스토리가 먹혔다는 분석이다. 실존 정치인의 삶을 모티브로 삼았기에 일어난 논란이 어쩌면 흥행에 가속도를 붙였을 수도 있다. 비록 정치색이 있는 작품이지만 경제학적으로도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주는 영화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문가집단 간의 줄다리기, 학력에 의한 차별, 공고한 전문직 시장 진입장벽 등을 아주 세심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면허의 경제학“저한테 죽이는 아이템이 하나 있습니다만…. 돈 좀 빌려주이소.” 영화 초반인 1981년 어느 날, 부산의 신참 변호사 송우석은 한 선배 변호사를 찾아간다. 판사로 잠깐 일하다 그만두고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지만 파리만 날리던 시절이었다. “뭔데?” 시답잖아 하는 선배의 반응에도 우석은 자신만만했다. “법이 바뀌어 이제 변호사도 부동산 등기 업무를 할 수 있다 아입니꺼.”우석의 아이디어는 단순했다. 법무사에게만 허용됐던 부동산 등기 업무가 변호사에게도 막 열린 상황. 그러나 당시 변호사들은 부동산 등기 업무를 하찮은 일로 치부했다. 하지만 우석은 부동산 등기 시장을 선점하면 떼돈을 벌 수도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더욱이 우석에겐 다른 법무사들에겐 없는 한 가지 경쟁력이 있었다. 변호사 자격증이란 고급 면허였다. 전문직 면허제는 일반인들에게 엄청난 진입장벽이다.면허 같은 진입장벽이 있으면 공급은 자연히 비탄력적이 된다. 공급의 가격탄력성이란 가격이 변할 때 공급량이 얼마나 민감하게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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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조선시대는 상품화폐의 시대

    조선시대는 상품화폐(commodity money)의 시대였다. 화폐는 교환을 매개하고 가치를 저장하며 지불 수단과 회계의 단위로서 기능하는 모든 것이다. 크게 상품화폐와 명목화폐(fiat money)로 구분된다. 상품화폐는 물품화폐나 실물화폐라고도 하는데, 재료(소재)의 가치에 기초하여 화폐의 가치가 정해지는 화폐다. 쌀, 무명, 삼베와 같이 일반 재화가 화폐로 사용되는 경우와 금화와 은화,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가 있다.이러한 상품화폐의 반대편에 있는 화폐가 명목화폐다. 한국은행에서 발행하는 세종대왕이 그려진 만원짜리 지폐처럼 재료 자체는 아무 쓸모가 없고 국가의 법과 권위와 국민의 믿음에 의해 통용되는 화폐다. 상품화폐와 명목화폐의 양 극단 사이에 신용화폐(fiduciary money, credit money)가 있다. 소재 자체는 명목화폐와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지만 액면에 기재된 만큼의 상품화폐나 자산과 교환해준다고 보증한 화폐를 말한다. 금본위제에서 금과 교환해주기로 약속한 태환지폐가 대표적이다.상평통보 이전에는 쌀· 포목 등 상품화폐 유통조선왕조는 1401년(태종 1년)에 저화(楮貨)라는 지폐를 발행했으며 세종대에 동전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통용에는 결국 실패하였다. 1678년(숙종 4년)에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발행하기까지 화폐로 통용된 것은 일상에서 꼭 필요한 필수품이면서 조세로 거두었던 쌀과 포목(삼베,무명)과 같은 상품화폐였다. 사용을 강제하였다가 보상도 없이 유통을 포기하는 일관성 없는 화폐 정책도 문제였지만, 사람들이 저화와 같은 명목화폐를 “굶주려도 먹을 수 없고 추워도 입을 수 없는 한 조각의 검은 자루에 불과한 것”(『태종실록』 3년)이라고 생각했고, 동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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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대동법과 공납제도의 개혁, 변화 속의 지속성

    17세기 이후 소농경영이 성장하였으며 18세기부터 노비를 이용한 농장경영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농업부문의 변화와 병행하여 조선왕조 재정제도도 17세기를 통하여 크게 변화되었다. 다름 아닌 대동법(大同法)이 시행된 것이다. 대동법은 광해군이 즉위한 1608년에 경기도에서 시행된 후 점차 확대되어 1708년(숙종 34년)에 황해도를 끝으로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전국적으로 실시되기까지 꼬박 100년이 걸렸는데 대동법에 대한 저항이 컸으며 그런 저항을 이기고 시행된 만큼 재정제도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되었다.공물을 토지 1결당 12말의 쌀로 통일대동법의 요체는 왕실에 대한 ‘진상’과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대한 ‘공물’을 각종 현물로 납부하는 대신에 쌀로 납부하도록 한 것, 그리고 일정한 규정도 없이 가호(家戶)에 부과하던 것을 토지 면적 1결(편집자주:조선시대 1결은 약 1만㎡)에 대해 쌀 12말을 납부하도록 부과기준이 바뀐 것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일부 산간지역은 쌀 대신 무명이나 삼베로 납부하도록 하였고 상평통보 발행 이후에는 동전으로 납부하도록 한 지역도 생겼는데 기본은 쌀이었다. 전세가 1결에 쌀 4말이었기 때문에 이제 3배나 되는 쌀을 추가로 상납하게 되었지만, 그 안에 중앙과 지방에 납부하던 공물 값과 운반 비용 그리고 지방경비까지 포함되었기 때문에 지방민의 부담은 가벼워졌다. 무엇보다 공물 수취가 토지 면적이라는 객관적인 기준을 갖게 되었다.대동세는 대략 절반은 서울로 상납하고 절반은 지방경비로 남겨두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1769년(영조45)을 예로 들면, 8도 대동세 총액은 쌀 56만9000여석이었는데 중앙 상납은 55%에 해당하는 31만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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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적의 결과' 찾아 환상 헤매던 천재 수학자…'최적의 선택'은 사랑이었다

    존 내시는 역사상 대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다. 하지만 그 공이 오롯이 내시 자신에게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가 떨친 유명세의 상당 부분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에서 내시 역을 맡아 호연한 러셀 크로의 덕이다.영화는 게임이론에 대한 새로운 분석으로 경제학의 새 지평을 열었지만, 40년 동안 정신분열증에 시달린 천재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내시의 삶을 다뤘다. 정신질환으로 황폐해져 가는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아내 앨리샤 라지(제니퍼 코넬리 분)와의 사랑이 감동적으로 그려졌다.영화는 2002년 제59회 골든글로브 드라마 부문에서 작품상, 남우주연상 등 4개 상을 받았고, 같은해 제7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작품상·감독상·여우조연상·각색상을 받았다. 내시의 실제 삶 역시 영화의 화려한 수상이력 못지않다. 그는 끈질긴 노력 끝에 정신질환을 거의 극복하고 199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이 남자는 천재다”1940년대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인 프린스턴대 대학원. 무시험 장학생으로 입학한 웨스트버지니아 출신의 수학과 새내기가 눈길을 끈다. 내성적이며 무뚝뚝하고, 오만할 정도로 자기 확신에 가득 찬 이 천재가 바로 내시다. 그는 기숙사 유리창을 노트 삼아 자신만의 ‘오리지널 아이디어’를 찾는 데에 매달린다.실제 존 내시는 1928년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블루필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이 됐을 땐 미국 전역에서 10명에게만 주는 웨스팅하우스 장학금을 받고 1945년 피츠버그의 카네기공대에 입학했다. 1948년 9월 카네기공대를 졸업한 뒤 프린스턴과 하버드대 대학원에서 동시에 입학을 제안받는다. 스무 살의 내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