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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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몰아내기 위한 일본의 '황후 시해' 을미사변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고종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임오군란 때문에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졌고 그에 대한 반발로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엄청난 전리품을 챙기려 했습니다. 이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간섭을 하여 일본의 팽창을 막았고 이후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작전명이 ‘여우 사냥’이라니삼국간섭의 결과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인 이범진과 이완용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나랏일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또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를 초대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달라고 간절히 청하기도 했습니다. 베베르 공사는 큰 나라인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요. 그러나 그때 러시아는 일본에게서 한반도를 나누어 갖자는 제의를 받고 어떻게 할 것인가 궁리하던 참이었습니다.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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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노린 청나라·일본의 다툼 '청일전쟁'…갑오개혁으로 본격적인 근대사가 시작되다
일본은 1860년대부터 시작된 메이지유신으로 조선보다 한 발 먼저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일원이 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우던 일본은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먼저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청나라와 러시아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죠. 일본은 전쟁을 치러서라도 청나라와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청나라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농민군과 조정의 화해, 전주화약3000명이 넘는 일본 군대는 인천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군대에 일본 군대까지 외국 세력이 한반도 중심부에 진을 치자 농민군은 일이 커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하필 6월 초로, 보리 수확과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번기였죠. 농민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이에 전봉준은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의 개혁과 탐관오리의 제거를 주장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제안했습니다. 개혁을 약속한다면 농민군을 해산하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농민군과 조정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했습니다. 그때 화해의 약속이 전주에서 이뤄졌기에 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합니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폐정 개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이렇게 조정과 농민군이 화해를 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진정됐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둬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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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망국 부른 고종 때 숱한 사건들…'동학혁명'으로 이어진 관리들 부패
어떤 역사적 사건이 괜히, 갑자기, 느닷없이 터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요. 특히 고종 임금 때 일어난 그 숱한 사건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그 사건들은 한 줄로 세워도 될 정도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분명합니다. 갑신정변도 정변 자체는 실패했지만 다음 사건에 대한 원인을 확실히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이 이후 조선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조선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톈진조약일본은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지요. 군사를 보내 고종을 호위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슬그머니 손을 뗐습니다. 그런데 정변의 과정에 피해를 입었다고 조선과 청나라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과는 한성조약을, 청나라와는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그런데 이 톈진조약이 문제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일본, 청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는 자기네끼리 서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 조선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약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톈진조약은 이후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요. 청나라의 힘으로 갑신정변을 막았다고 생각한 조선 왕실은 청나라에 더욱 의존했습니다.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내정 간섭을 하였지요.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에서 여러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렇게 이웃 나라들이 서로 조선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조선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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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조선왕실과 조급한 개화파…3일 천하로 끝나버린 갑신정변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구식 군대를 지원했던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잡혀갔습니다. 이로써 고종은 아버지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았고 명성황후도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큰 난리를 겪으면 지배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란과 봉기가 있었고, 그중 성공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도 사건 이후 권력자들의 반성과 개선의 노력, 민중의 깨달음이 조금씩이라도 있었기에 오늘날 같은 자유로운 세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혼란 또 혼란…제물포 조약그런데 조선의 왕실은, 왕비의 생사를 알 수 없어서 장례까지 치러야 하는 큰 난리를 겪고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리가 진정되자 먼저 주동자를 잡아다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나 바람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데 골몰한 것입니다.일본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군란으로 공사관이 부서지고 일본 외교관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군함과 군대를 이끌고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에 와서 조선을 위협했습니다.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됐지요. 바로 ‘제물포 조약’입니다. 이 조약의 결과 조선은 5년 동안 50만원을 일본에 배상하고 일본이 자신들의 공사관에 군대를 두는 것을 허락해야 했습니다.청나라는, 조선이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더욱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3000명의 군사를 조선에 데려다 놓고 청나라의 황실을 배신하면 안된다고 협박했습니다. 정치와 외교를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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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도끼상소'·임오군란·대원군 납치…조용한 날이 없었던 조선의 하루하루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인천항과 부산항, 원산항을 개방했습니다. 조선의 문이 활짝 열리자 여러 나라가 조선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까이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는 물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저 멀리 큰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조선으로 모여들었지요. 그들은 겉으로는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교역을 원한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조선에 있는 자원을 독차지하여 헐값에 가져가거나 아예 식민지로 만들 기회를 노리고 접근한 것입니다.개화와 외국의 침탈고종은 정부 조직과 군대 조직을 개혁하고 선진 문물을 배워 들이기 위해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고종이 개화 정책을 펴는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온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개화의 바람이 침탈과 함께 불어닥치자 개화에 반발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위정척사파였습니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악한 것이란 서양 문물을 말하지요.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파와 서양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개화파는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최익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던 사람이지요. 그는 1876년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려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른바 ‘도끼 상소’입니다. 상소를 올리는 데 도끼를 들고 온 이유는, 자신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혹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온 도끼로 목을 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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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이 열리다…일본에 이어 미국·프랑스·러시아 등과 조약
고종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였습니다. 원래 미성년이 임금이 되면 대비가 발을 내리고 그 뒤에서 정치를 돕는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비가 된 신정왕후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하게 했습니다. ‘대원군’이란 자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아버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선의 대원군들 중 정치에 직접 나선 사람은 흥선대원군밖에 없으므로 보통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을 가리킵니다.대원군, 안동 김씨·서원 축출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시작한 개혁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집안이나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당쟁의 근거지가 되는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서원은 지방에 있던 유학자들의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파당을 만들고 다른 파당과 싸우는 일이 잦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흥선대원군은 이름 없는 세금과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 제도도 없애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한 일 가운데 가장 대담한 일은 양반들에게서도 세금을 거둬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평민은 세금을 내는데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양반들은 오히려 세금을 안 내는 모순된 일이 그때까지 당연시되고 있었지요.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민심을 수습했으며 국가 재정도 늘려나가는 등 개혁을 펼쳤습니다.당백전·통행세·쇄국정책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잘못한 일들도 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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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는 언제부터인가요?…부정부패로 조선이 망하면서 시작
우리 역사에서 근대(近代)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이에 대한 확실한 답은 없습니다. 두부를 자르듯 딱 떨어지게 시대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근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와 ‘가까운 시대’입니다. 근대 사회는 그 이전의 사회와 어떤 점이 달라진 것일까요. 근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정치적으로 민주주의가, 경제적으로 자본주의체제가 도입됐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1876년(고종13)부터 시작됐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해 조선은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은 일본의 힘에 떠밀려서 맺은 불평등 조약입니다. 하지만 이 조약으로 조선의 항구가 열리고 서양의 문물이 물밀 듯 들어오면서 조선의 근대화가 시작됐다고 보는 것입니다. 신분 제도와 노비 제도가 폐지된 갑오개혁(1894)을 근대의 시작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근대의 시작에 대한 다양한 학설이 있지요.아무튼 우리 역사에서의 근대는 조선 말기부터 시작됐습니다. 조선이 망하고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강제로 점령한 시기를 근대로, 해방 이후부터 오늘날까지를 현대로 구분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앞으로 필자가 쓸 ‘펭귄쌤이 들려주는 근현대사’는 안타깝게도 조선이 기울어가는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조선이 망하는 길로 접어든 것은 1800년대 초부터입니다. 강력한 왕권으로 나라의 질서를 세우고 학문과 국방,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뤄냈던 제22대 임금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였지요. 정조는 후계자를 제대로 길러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조가 제23대 임금에 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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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겨레의 독립 만세 운동
1919년 3월 13일, 미국 뉴욕타임즈 신문에는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하다” 그리고 “수천 명의 운동 가담자들이 일본에 연행되다”라는 기사가 실립니다. 기사에는 이 운동이 예상보다 더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 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되었고 일본이 대규모 헌병대를 추가로 부를 것이다고 보도하였습니다. 또한 AP통신의 보도로,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이쯤되면 여러분도 이 운동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겨레의 독립 만세 함성이 울려퍼진 바로 3·1 운동입니다.1919년 뉴욕타임즈에 소개된 3·1 운동3·1 운동이 발발한 직후 이를 소개한 신문은 더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 신문은 한국인들이 비무장(비폭력) 혁명을 일으켰다고 대서특필하였으며 프랑스의 앙탕트, 영국 모닝포스트는 물론 일본 반도신문과 조일신문 및 중국 민국일보에도 기사화하였지요. 이처럼 전세계 언론이 주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그것은 3·1 운동이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채택된 민족 자결주의와 같은 세계사적 흐름을 반영하였으며,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만세 운동을 직접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1919년 4월 1일자 베이징대 학생들의 잡지 <<신조>>에는 3·1 운동에 대해 첫째, 무기를 갖지 않은 혁명, 둘째 불가능한 것을 알고 한 혁명, 셋째 순수한 학생혁명에서 출발한 점 등을 주목하며 '혁명계에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심지어 인도의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활동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