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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1863년 왕권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철종이 후사없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대까지 안동 김씨 등 세도가들이 오히려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신정왕후 조씨의 전교로 지명된 고종입니다. 그런데 그는 당시 12세밖에 안 되는 나이라 처음에는 신정왕후가 잠시 수렴청정을, 그리고 곧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맡게 됩니다. 왕의 적통이 없어, 종친 중에서 새 왕을 뽑았을 때, 그 아버지를 대원군이라 합니다. 흥선대원군 외에도 선조, 인조, 철종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불렀지요. 단 이들은 모두 죽은 후에 대원군이라 칭해진 것이고 살아서 대원군이라 칭해진 이는 흥선대원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는 10년 동안 살아있는 권력으로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였습니다.10년간 왕권 강화를 위해 일한 흥선대원군한 마디로 말하면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왕을 대신해 10년 동안 집권한 것이지요. 훗날 임오군란 때 잠깐, 그리고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도 잠깐 집권한 적이 있지만 여러분은 주로 이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집권기에 대해 배웁니다. 당시 44세였던 그의 눈에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백성들은 이미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일으킨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외부에서 들여오는 소리는 큰 나라로 섬기는 청 왕조가 서양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로 위의 러시아도 점차 세력을 넓힌다는 것이었지요. 안팎의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의 선택은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우선 외척일 뿐인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안동 김씨를

  • 역사 기타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5년(을묘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 지 2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수원화성박물관 등에서 특별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지요. 1795년 당시, 윤2월 2일부터 8일 동안 치러진 이 행차를 찬찬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두 행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바로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합니다. 둘째, 그 직후 정조는 자신이 만든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주요 신하들과 직접 참관합니다.조선 왕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정조당시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만 1779명, 말도 779필이나 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나 한강을 건널 때는 배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를 사용합니다. 아, 참고로 그 배다리를 제작하는 데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적극 참여하였지요. 자, 이렇게 대규모 행렬이 먼저 간 곳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필수적 요소인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것이지요. 사실 어머니 환갑잔치보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세력 또는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신하들은 매우 불편한 자리이거나 왕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정조, 그는 1776년 왕위에 올라 24년 여 동안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며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끈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매 순간이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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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조선의 미(美)…달항아리

    지난 호에서 저는 100년이나 걸려 완성된 개혁 민생 법안 대동법을 언급하였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대동법이 완성된 직후부터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그 후 100년 동안이나 유행을 지속한 최고의 예술품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숙종 말년부터 영조 시기에 최절정의 예술적 완성도를 뽐낸 문화재이자 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는 백자, 바로 18세기의 ‘달항아리’가 그것입니다.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은 ‘달항아리’사실 백자는 이미 고려 시기부터 제작되었고, 중국의 징더전에서 제작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백자가 엄연히 존재하였지요. 더구나 조선에서도 이미 세조의 통치 후반이었던 15세기 후반에 경기 광주 일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소, 즉 ‘관요’을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하면 곧 백자를 떠올릴 만큼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백자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오롯이 담은 최고의 미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고결하고 검소하면서도 청렴한 성인 군자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드러난 도자기가 바로 백자였습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이 백자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성인 군자를 상징하는 왕이 사용하는 그릇이기 때문이지요. 실제 15세기 후반 『경국대전』에는 백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청화백자를 왕실이 아닌 신분이 사용하면 장 80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어요. 그만큼 왕실이 백자를 독점하였던 것이고요.반대로 양반 사대부 입장에서는 성리학적 고결함을 담은 이 백자를 『경국대전』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어했지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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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17세기는 한편으로 전쟁의 시대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서서히 상품 경제가 발전하는 이른바 ‘상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혼란기였으나 이미 명대에 들어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외래 작물의 보급과 양쯔강 중류의 발전으로 상업에서도 활기를 띠었지요. 일본에서는 17세기 초에 에도 막부가 일찍 들어서면서 지역별로 거점 도시가 발전하는 양상을 띠며 조닌이라는 상공업자들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조선 후기 사회의 활력소, 대동법조선의 상황은 좀 더 극적입니다. 이미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됐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전을 거듭하며 시장과 상업의 물꼬가 트이며 조선 후기 사회가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요인은 바로 ‘대동법’입니다.대동법은 간단히 말하면 기존 공납제를 쌀로 환산해 내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 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데 걸린 시간만 무려 100년입니다. 그리고 이 대동법의 원인이 되는 공납제의 문제점은 이미 16세기부터 드러났고 우여곡절 끝에 대동법이라는 개혁 법안이 탄생하게 됩니다.사실 조선은 과전법이라는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을 보호하면서 대신 전세(토지세), 공납(토지세), 역(군역과 요역)이라는 수취 체제를 만들어 톱니바퀴처럼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양반지주 등이 더 많은 토지를 가지려 하고, 탐관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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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시켜나갔을까요. 한편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운동이 추진됐으며 또 한편에서는 성리학적 예법을 바로 세우려는 양반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북벌을 추진하던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효종이 의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정점이라는 예송논쟁으로 조선은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어떤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을 것이냐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죠. 바로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입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이미 소개된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중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는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둘째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효종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스승이 있었죠. 한 명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어부사시사>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남인 계열의 윤선도이며, 또 다른 이는 율곡 이이를 계승하고 김장생에게서 예법을 배운 서인 계열의 우암 송시열입니다. 둘은 같은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갈라지며 경쟁관계기도 했죠. 주자의 성리학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구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효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상복 문제로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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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36년 겨울,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서울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떨어진 곳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이 있습니다. 이곳은 불편하지만 반드시 마주쳐야 할 안타까운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1637년 1월30일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이 산성의 서문으로 나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기 위해 삼전도로 향했습니다. 1636년 겨울에 발발한 병자호란 또는 병자전쟁의 결과 조선은 청에 굴복하고 조공·책봉 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두 번의 전란, 그리고 인조의 선택한 국가의 최고 통치자를 평가할 수 있는 요소로 크게 세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통치 철학과 권력 의지, 그리고 민생 안정 등인데요. 광해군을 축출하고 반정을 단행한 인조와 서인세력은 앞의 두 가지는 명확했습니다. 지난호에도 언급했듯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친명배금’을 저버린 광해군의 정치 행위는 성리학적 가치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반대로 인조와 서인은 정치적 정당성과 그에 기반한 권력 의지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지막이었지요. 과연 인조가 광해군보다 더 개혁적 정책을 실시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는가 하는 부분에서 평가가 갈릴 수 있습니다. 특히 그 평가의 핵심에 바로 병자호란이 있습니다. 인조는 다수의 농민이 임진왜란 이후 궁핍해지고 농경지는 황폐화된 것을 감안해 풍년이건 흉년이건 상관없이 토지세를 1결당 4~6두로 고정해 징수하는 영정법을 실시했습니다.그리고 광해군이 실시했던 대동법을 강원도로 확대 실시했지요. 그러나 이런 민생 안정책에도 불구하고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어야 했으며, 특히 병자호란으로 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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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의 두 얼굴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다시 일으키고 실용적 외교노선으로 나라를 지킨 위대한 군주인가, 아니면 인륜을 어기고 무리한 토목공사로 나라를 망친 폭군인가. 조선의 역대 왕 중 오늘날까지 가장 상반된 평가를 받는 한 왕이 있습니다. 그는 너무나 정반대의 민낯을 역사에 고스란히 남겼습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한국사를 단지 위인전의 나열이 아니라 생각하고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두 얼굴의 사나이, 그는 조선 제15대 왕이자 연산군과 함께 ‘군’으로 역사에 영원히 남은, 광해군입니다.위대한 군주인가 패륜적 폭군인가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자 후궁의 자식이라 사실 조선의 예법을 엄밀히 적용하면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바로 위 형인 임해군이 있었고,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린 왕비(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이 적자로 존재했기 때문이지요. 객관적으로 보면 서자인 광해군이 왕이 되기에 무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임진왜란 때 광해군은 선조를 대신해 조정을 이끌던 왕세자였습니다. 이른바 ‘분조’ 활동이라 하여 의주와 평양에 있었던 선조를 대신해 조정을 쪼개 전쟁 상황에서 국가를 이끄는 것이지요. 전국을 돌며 광해군은 민심을 달래고 군량을 모았으며, 한편으론 의병활동을 펼치던 유생들과 뜻을 함께하게 됩니다. 이때 남명 조식의 제자이던 정인홍 등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데, 훗날 이들이 곧 북인 집권 세력이 됩니다. 이렇게 전쟁 속에서 국가를 이끈 경험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재위 15년 동안 나름대로 국가를 재건하기 위한 정책을 펼칩니다.특히 이원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조선 중기 이후 문제가 되었던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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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일본군의 기세를 꺾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시작돼 그가 죽음으로써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입장에서 이 전쟁이 시작되기 1년 전부터 직감적으로 전쟁을 예감하고 준비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물러가는 일본군에 결정타를 가했지만 안타깝게 산화한 영웅이 있습니다. 23전 23승의 전승을 올린 인물, 바로 성웅 이순신입니다.조선의 상식을 실천한 이순신이순신에 대해 제가 꼭 하고 싶은 말은 조선의 상식을 곧이곧대로 실천한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전라 좌수사로 임명되기 전, 한때 함경도에서 여진족을 물리치다 중과부적으로 밀리게 됩니다. 상관에게 추가 병력 지원을 요청하지만 상관이 이를 묵살했고, 나중엔 적장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백의종군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에서 거리낌없이 당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도 그 백의종군을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죠.어릴 적 친구였던 유성룡이 그를 늘 칭찬하고 추천하자,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가 그를 만나기를 청합니다. 그때도 이순신은 같은 문중(덕수 이씨)이지만 율곡 이이가 당시 이조판서, 즉 인사권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이라 만나지 않았습니다. 같은 문중이라 출세하게 된다는 둥 괜한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요. 임진왜란 중 원균의 오판과 모함, 그리고 일본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고 두 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될 때는 상황이 매우 심각했습니다. 마침 그의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에요. 그는 억울함과 슬픔을 모두 가슴에 안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그것이 그가 지켜야 할 상식선이었으니까요. 1598년 노량해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