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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기타

    (32) 토지조사사업은 토지를 수탈하였는가?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040만원의 거금을 투입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사업은 매우 방대하여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조사하여 국유인지 민유인지, 그리고 민유이면 누구의 소유인지를 판정하였으며, 지세를 부과하기 위한 기준으로 결부제를 폐지하고 과세 지가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삼각법에 의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지적도를 만들고 토지대장을 비롯한 각종 장부를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된 지적도와 토지대장은 식민지 시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다.토지조사사업은 이미 재정고문이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개편할 때부터 계획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병합 전에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사업은 할 수 없다면서 유보되었다가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은 조세의 근간을 이루는 지세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정고문과 통감의 지배 하에 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이 설치되고 중앙집권적인 징수체계가 수립됨으로써 조세수입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31회 참조)결부제 폐지 과세지가 도입당시 토지에 대한 세금 부과는 결부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결부제(結負制)는 비옥도(생산성)에 따라 경지를 6등급으로 구분, 1등전 1결은 약 3000평, 6등전 1결은 약 1만2000평으로 정하는 지세부과 기준이다. 비옥도에 따라 1결의 실제 면적에 차등을 두어 같은 결수이면 같은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인 양전(토지조사)이 1720년 이후 오랫동안 시행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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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일본은 어떻게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였는가

    1904년 2월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전쟁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10월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사실상 ‘재정감독’이 돼 대한제국의 재정운영을 철두철미 감독하고 재정제도 전반을 개편했다. 1907년 7월의 제3차 ‘한일협약’ 체결 이후에는 재정고문이 해임되고 탁지부에 차관을 비롯한 일본인 관리가 임명돼 통감 지휘 아래 대한제국 재정을 직접 관장했다.재정고문과 통감에 의해 이뤄진 대한제국의 재정제도 개편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1)일본의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승격시켜 국고를 맡기는 한편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새 화폐를 기존의 동전 및 백동화와 교환해 대한제국의 법화로 만들었으며, (2)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을 설치해 지방관과 이서층을 조세행정에서 배제하고 조세금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했다. 그리고 (3)황실재정에 집중된 각종 재원을 정부재정으로 이관함으로써 황실의 자율적인 재정 기반을 완전히 해체했다.대한제국의 화폐제도는 일본에 의해 개편됐으나 당시 대한제국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백동화 인플레’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일본화폐의 유통, 특히 일본이 금본위제로 전환한 뒤 폐기 처분한 은화와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 설립과 금본위제 실시 및 태환권(금화와 교환을 보장하는 지폐) 발행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대한제국은 1901년 2월 금본위제를 실시한다는 법령을 제정하고(‘화폐조례’), 1903년 3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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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황실재정의 확충

    갑오개혁 중단 후에 수립된 대한제국은 ‘재정 능력’ 증대의 방법도 갑오개혁과 크게 달랐다. 대한제국은 결호전, 즉 결전(지세)과 호포전(호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재원을 황실 재정으로 집중하고자 했다. 시차를 두고 이뤄졌지만, 역둔토 등의 각종 국유지, 홍삼 전매사업, 금광을 비롯한 광산, 균역청에서 관할하던 어염선세, 상업 관련 ‘무명잡세’, 독점권을 행사하는 특권회사들이 모두 궁내부, 특히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으로 속속 집중됐다. 갑오개혁 정부는 상업 관련 조세 대부분을 ‘무명잡세’로 간주해 폐지했으며 국유지는 민간에 불하할 계획이었지만, 대한제국은 국가에 연고가 있어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명목을 불문하고 황실 재산으로 만들거나 과세하려고 했다.황실 수입 비대 정부 총수입의 절반황실에는 이 밖에도 ‘황실비’ 및 ‘궁내부비’로 편성돼 국고에서 지급하는 황실 경비가 있었다. 자체 수입과 황실 경비를 합한 황실 수입의 크기는 정부 총세입의 절반은 족히 됐다. 1905년의 개략적인 조사에 따르면 황실의 1년 수입은 국고에서 지급하는 165만여원(元)과 내장원 수입 326만원을 합한 491만여원으로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 실수입의 69.6%(1903년), 43.9%(1904년)에 달하는 규모였다. 내장원 수입이 국고에서 지급하는 수입보다 더 많아 전체 황실 수입의 66.3%를 차지했다.황실 수입이 국가 재정에 비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같은 시기의 일본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그림). 1896~1904년 사이에 한국은 총세출에서 차지하는 황실 경비의 비중이 최저 9.02%(1896년), 최고 15.5%(1897년)였으나 일본은 각각 1.02%(1900년), 1.78%(1896년)에 불과했다.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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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였는가?

    대한제국(1897~1910)은 근대국가였는가? 이 질문은 근대국가(modern state)의 기준이 없다면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서구에서는 16세기부터 영주들이 서로 경쟁하던 분권적인 정치체제가 퇴조하고 강력해진 국왕이 전국을 통치하는 절대주의 체제로 변화했다. 이것을 근거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근대국가 성립의 기준으로 삼으면 중국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부터 근대국가였다(F 후쿠야마 『정치질서의 기원』).좀 더 엄격하게 영국에서 명예혁명(1688년)으로 입헌군주제가 수립된 것을 근대국가의 기준으로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의적인 왕권의 남용을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 영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중요한 제도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프랑스혁명(1789년)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서구 역사에서 나온 ‘근대’라는 개념을 다른 세계의 역사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까?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서 ‘근대국가’를 정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근대국가의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져일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근대국가의 기준이라면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근대국가를 수립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국왕이 전국을 군현제에 의해 직접 통치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정치체제가 서구 근대국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개항 후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분권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후 중앙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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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재정능력 함정과 갑오개혁

    조선왕조는 500년을 유지한 발군의 내구성을 지닌 국가였지만, 개항의 충격에 대응하기에는 국가역량(state capacity)이 부족한 ‘약한 국가’(weak state)였다. 국방과 치안을 비롯한 공공재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였으며, 시장경제에 필요한 제도를 갖추고 공업화를 위한 산업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였다.무엇보다 국가역량의 기본이 되는 ‘재정능력’(fiscal capacity)이 매우 취약하였다.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 하에서 평화가 장기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재정제도를 개편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재정규모가 작았으며(중앙세입 쌀 환산 100만석, 조세부담률 3% 추정), 재정 곤란으로 시전상인이나 공인에 대한 채무가 누적되었다. 개항 이후 외교사절의 파견과 근대화 사업 등으로 지출이 급증하자 재정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기도 하였지만 관세 수입을 담보로 잡히고 해관 운영권도 빼앗겼기 때문에 재정운영은 더욱 곤란해졌다.재정강화와 시장경제 발달 위한 시도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84년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 후 조선왕조 체제를 근대국가 체제로 바꾸기 위한 ‘갑오개혁’(1894년 7월~1896년 2월)이 약 19개월간 시도되었다. 갑오개혁은 국가의 ‘재정능력’을 강화하고 신분제와 특권을 철폐함으로써 시장경제를 발달시키려는 방대한 개혁이었다.갑오개혁 정부는 우선 국가 재정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단일한 재정기관에 모든 국가재정을 집중함으로써 경비를 절감하고 중간유출을 막는 정책을 폈다. 당시 중앙 재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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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새로운 영리기회의 출현과 회사 설립

    개항은 분명히 심각한 위기였다. 값싼 면제품의 수입으로 재래 면업이 타격을 입었고, 쌀 수출로 쌀값이 올라 쌀을 사 먹던 사람들은 생계가 어려워졌다. 국가에 공물을 납부하던 공인들도 물가 상승으로 손해를 보았으며, 외국 상인들이 서울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자 시전상인의 특권이 위태로워졌다(26회 참조).그렇지만 개항기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의해 경제가 악화되기만 하였던 시기라고 이해한다면 너무 일면적이다. 개항은 경제적 선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상대가격과 제도를 변화시켜 개항 전에는 생각하기 어려웠던 새로운 영리기회를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농민 중에도 재산을 모아 대지주로 성장하는 자들이 나타났는데, 중농(中農)에 불과하였던 김성수 가문이 1909년에 1200석을 추수하는 대지주로 성장하였던 것도 쌀 수출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회사 출현했으나 대개 단명으로 끝나더 큰 변화는 ‘객주상회사’를 비롯한 ‘회사’라는 새로운 경제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회사’는 상법에 “상행위 기타 영리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한 사단(社團)”이며 “법인(法人)”이라고 규정하고 있듯이 영리활동을 위해서 조직한 법인이다. 회사가 일반적인 모임과 다른 점은 법률적인 인격을 가지고 있어 구성원이 교체되어도 그와 무관하게 영속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회사’를 설립하는 이유는 자본 규모가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거나 사업이 너무 위험하여 자본과 위험을 분담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영리기회에 대한 지식과 경영능력이 있지만 자본이 부족할 때 자본을 모으기 위해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이러한 회사가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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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탄테러범의 요구 조건은 '사과 한 마디'…불신과 증오의 '수요관리'가 필요하다

    한때 국민 앵커로 불렸던 윤영화(하정우 분)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청취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이 청취자는 “내가 폭탄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다”고 말한다. 그저 장난전화라 생각한 윤영화는 청취자에게 욕설을 내뱉은 뒤 전화를 끊어버린다. 잠시 후 서울 마포대교에선 폭탄이 터지고 다리가 붕괴된다.이 순간 윤영화의 머리 속에는 ‘특종’이라는 두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윤영화는 방송국 보도국장인 차대은(이경영 분)에게 “테러범과 생방송을 진행할 테니 프라임 시간대 뉴스로 복귀시켜 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윤영화는 테러범과의 통화를 독점으로 생중계하게 된다.테러의 기대이익 vs 기대비용테러와 같은 범죄는 경제학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국의 게리 베커 박사는 ‘범죄경제학’으로 각종 범죄가 일어나는 요인을 정리했다. 베커 박사는 범죄 역시 이 같은 경제학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그는 강의를 위해 급하게 주차할 곳을 찾다 불법주차를 결심하게 된다. 이 결정에 이르기까지 베커 박사는 강의시간 준수, 불법주차 단속에 걸릴 가능성, 벌금의 크기 등을 따졌고 그는 자신의 불법 행위에서 경제학적인 원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림>은 베커 박사가 말한 범죄 발생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범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이익(금전적 이익+심리적 보상)을 계산한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데 들어가는 기대비용(체포 가능성, 형벌의 크기 등)을 따져본다. 기대이익이 기대비용보다 크면 범죄자는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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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자유무역의 시작과 산업구조의 변화

    개항에 의한 가장 큰 충격은 자유무역의 시작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일본과의 무역은 거의 단절된 상태였지만 중국과는 홍삼을 수출하고 비단을 수입하는 육로 무역이 자못 활발하였는데 수량이나 품목, 그리고 인원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한된 관리무역은 1883년까지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고 시전상인이 독점하던 서울마저 외국상인에게 개방되자 불가능하게 되었다. 관세율도 낮았다. 1882년 임오군란 후에 중국과 체결한 ‘조청무역장정’에서 수입 관세율을 5%로 정한 다음에는 다른 나라와의 통상조약에도 채택되거나 여기에 맞추어 개정되었다. 1883년에는 ‘내지 관세’가 금지되어 일단 통관된 상품에 대해서는 어떠한 과세도 불가능하였다.공장에서 생산한 면제품이 가장 비중이 높은 수입품이었다는 것이 개항의 충격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중국상인이나 일본상인을 통해서 영국산 면제품이 수입되었지만, 1880년대 말부터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일본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일본산 면제품 비중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수입 면제품 중에 품질이 고급인 금건(金巾)은 중류층 이상인 사람들에게만 소비되었고, 품질이 거칠었던 시팅(sheeting)도 우리나라 재래의 ‘토포’(土布)가 경쟁할 수 있었다. 재래직기(베틀)로 직조한 토포는 시팅보다 비쌌지만 두텁고 질겨서 내구성이 좋았기 때문에 일하는 일반 서민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그림 1). 이것도 잠시, 일본에서 ‘시팅’을 개량하여 토포와 흡사한 면포를 생산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경쟁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가내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재래 면업은 급속히 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