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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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긴 뒤 '되찾자 운동' 시작…신문발행·국채보상 계몽운동 '역부족'
1910년 8월29일 이른바 ‘한일합병조약’이 선포되면서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때부터 1945년 8월15일, 전쟁에 패배한 일본이 물러갈 때까지 36년 동안을 일제강점기라고 합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강제로 점령한 시기’라는 뜻입니다. ‘제국주의’는 한마디로 자기네 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여기고 그 밑에 여러 식민 국가를 거느리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국주의 국가가 식민지를 가지려던 가장 큰 이유는 식민지로부터 자원과 노동력을 거의 공짜로 빼앗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였습니다.국력 안 키운 잘못…경제이권 빼앗겨조선이 나라의 문을 연 이후 일제강점기가 시작될 때까지 여러 힘센 나라가 한반도에서 경제적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일본은 물론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은 철도를 놓을 수 있는 권리, 광산에서 금 등을 캘 수 있는 권리, 산에서 나무를 베어갈 수 있는 권리 등 돈이 될 만한 권리는 앞다퉈 차지했습니다. 그중 철도 부설권은 빼앗은 자원을 자기네 나라로 싣고 가기 편하게 길을 놓는 아주 중요한 권리였습니다.나라와 나라 사이에 이런 권리를 인정하려면 조약을 맺어야 하지요. 그런데 이때 조선(대한제국)이 맺는 조약에는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최혜국 대우는 어떤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라도 뒤에 다른 나라에 인정한 내용은 앞서 맺은 나라에도 인정해야 한다는, 억지나 다름없는 대우입니다. 이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인 조항이지요. 힘이 없던 조선은 이런저런 불합리한 이유 때문에 한반도의 거의 모든 이권을 힘센 나라들에 내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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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 총격 사살…일본, 1910년 8월22일 대한제국 강제 합병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황제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리고 황태자였던 순종을 황제로 만들었지요. 하지만 일본은 여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완전히 자신들의 독차지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황제가 언제 다시 다른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 일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지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헤이그 밀사 사건이 있었던 1907년부터 대한제국을 어떻게 차지할 것인가에 대해 본격적으로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처럼 무찔러버릴 것인가, 보호국으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합병할 것인가? 일본의 야욕 앞에 대한제국은 바람 앞에 선 등불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을사늑약이 맺어진 이후 울분을 참을 수 없었던 우리 국민은 일본의 만행에 강력하게 저항했습니다.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고, 나라를 팔아먹은 사람이나 일본인에 대해 응징하기도 했습니다. 그중 가장 대단한 일은 이토 히로부미 총살 사건입니다. 서른 살의 청년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을사늑약의 원흉이고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를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1909년 7월 이토는 대한제국과 만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상의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만났습니다.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안중근은 역으로 숨어들었습니다. 일본인으로 변장했기 때문에 눈치 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열차에서 회담을 마친 뒤 이토와 코코프체프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고 군중 쪽으로 다가가는 순간 안중근은 권총을 쏘았습니다. 그중 세 발이 이토에게 명중했습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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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분위기 속 을사늑약 강제 체결…고종, 조약무효 알리려 밀사 파견
을사늑약 근거로 일본 침략1905년 11월17일, 일본은 한일협상조약이라 불리는 불평등 조약을 고종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날 일본은 어전회의가 열리는 덕수궁 중명전 안팎에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황제의 도장인 옥새 찍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습니다.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늑약’은 ‘굴레 륵(勒)’자와 ‘맺을 약(約)’자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굴레 쓰인 짐승은 고삐를 잡은 사람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늑약’은 강제로 맺은 조약을 뜻하게 되었습니다.일본은 힘센 나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은 나라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에 체결 때는 각 나라 최고 책임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을사늑약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무대신 박제순이 체결했지요. 황제가 도장을 안 찍은, 그것도 총칼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에 포위되어 맺은 조약을 국가 사이의 정식 약속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을사늑약을 내걸고 한반도를 침략했습니다.일본 통감부 설치…황궁 자유출입을사늑약의 주요한 내용은 첫째,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지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할 때는 반드시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이지요.둘째, 일본 정부는 서울에 통감부를 만들고 한 명의 통감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통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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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과 러시아 전쟁, 약소국 대한제국 운명… 전쟁 결과에 좌우
역사적 사건 가운데 원인이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건이 원인이 있어서 만들어진 결과지요. 고종이 임금으로 있는 동안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사건들이 한결같이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망국을 재촉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친러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러시아는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군주를 1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공사관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러시아는 조선에서 확실하게 세력을 뿌리내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일본의 의지는 그보다 더 확고했습니다. 조선은 요충지…러·일 각축전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 등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과 타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는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러시아에도 일본에도 한반도를 양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러시아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이른바 부동항(不凍港)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보기에 한반도는 부동항이 줄지어 있는 훌륭한 장소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안에서는 곧 혁명이 일어날 듯 불만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황제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좁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북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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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진 청나라, 독립국 조선 인정…대한제국 출범, 13년만에 패망 '단명'
조선의 군주 고종이 황제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날 무렵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조선은 청나라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의 그늘에 있었던 관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선이 황제의 나라라고 선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청나라와 아무 관계도 없는 독립국이라고 못을 박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 것입니다.우리 역사상 최초의 황제국 ‘대한’시모노세키조약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인 1895년 4월17일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의 제1조에는 “조선국이 완전한 독립자주국임을 승인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에 이긴 일본은 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라고 청나라에 요구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자신들이 조선을 쉽게 침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20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경복궁을 벗어난 지 꼭 1년 만이었습니다. 같은 해 8월 고종은 조선을 황제의 나라로 새로 세우고 자신이 황제가 됐음을 발표했습니다. 새 황제의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했습니다. 연호는 황제가 즉위한 해를 1년으로 삼아 날짜를 세는 칭호지요. 고종 이전의 조선에서는 주로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일본 주도로 이뤄진 을미개혁 때 처음 조선의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습니다. 1896년 1월1일을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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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몰아내기 위한 일본의 '황후 시해' 을미사변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고종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임오군란 때문에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졌고 그에 대한 반발로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엄청난 전리품을 챙기려 했습니다. 이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간섭을 하여 일본의 팽창을 막았고 이후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작전명이 ‘여우 사냥’이라니삼국간섭의 결과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인 이범진과 이완용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나랏일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또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를 초대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달라고 간절히 청하기도 했습니다. 베베르 공사는 큰 나라인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요. 그러나 그때 러시아는 일본에게서 한반도를 나누어 갖자는 제의를 받고 어떻게 할 것인가 궁리하던 참이었습니다.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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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노린 청나라·일본의 다툼 '청일전쟁'…갑오개혁으로 본격적인 근대사가 시작되다
일본은 1860년대부터 시작된 메이지유신으로 조선보다 한 발 먼저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일원이 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우던 일본은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먼저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청나라와 러시아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죠. 일본은 전쟁을 치러서라도 청나라와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청나라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농민군과 조정의 화해, 전주화약3000명이 넘는 일본 군대는 인천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군대에 일본 군대까지 외국 세력이 한반도 중심부에 진을 치자 농민군은 일이 커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하필 6월 초로, 보리 수확과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번기였죠. 농민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이에 전봉준은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의 개혁과 탐관오리의 제거를 주장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제안했습니다. 개혁을 약속한다면 농민군을 해산하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농민군과 조정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했습니다. 그때 화해의 약속이 전주에서 이뤄졌기에 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합니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폐정 개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이렇게 조정과 농민군이 화해를 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진정됐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둬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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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망국 부른 고종 때 숱한 사건들…'동학혁명'으로 이어진 관리들 부패
어떤 역사적 사건이 괜히, 갑자기, 느닷없이 터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요. 특히 고종 임금 때 일어난 그 숱한 사건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그 사건들은 한 줄로 세워도 될 정도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분명합니다. 갑신정변도 정변 자체는 실패했지만 다음 사건에 대한 원인을 확실히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이 이후 조선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조선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톈진조약일본은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지요. 군사를 보내 고종을 호위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슬그머니 손을 뗐습니다. 그런데 정변의 과정에 피해를 입었다고 조선과 청나라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과는 한성조약을, 청나라와는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그런데 이 톈진조약이 문제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일본, 청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는 자기네끼리 서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 조선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약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톈진조약은 이후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요. 청나라의 힘으로 갑신정변을 막았다고 생각한 조선 왕실은 청나라에 더욱 의존했습니다.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내정 간섭을 하였지요.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에서 여러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렇게 이웃 나라들이 서로 조선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조선의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