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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과 러시아 전쟁, 약소국 대한제국 운명… 전쟁 결과에 좌우

    역사적 사건 가운데 원인이 없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은 별로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건이 원인이 있어서 만들어진 결과지요. 고종이 임금으로 있는 동안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 사건들이 한결같이 조선 혹은 대한제국의 망국을 재촉하는 사건이었다는 점입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며 친러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러시아는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의 군주를 1년 동안이나 자신들의 공사관에 붙잡아 두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러시아는 조선에서 확실하게 세력을 뿌리내린 듯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손에 넣고야 말겠다는 일본의 의지는 그보다 더 확고했습니다. 조선은 요충지…러·일 각축전러시아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 등 자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과 타협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반도를 두고 일본과 러시아는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요. 러시아에도 일본에도 한반도를 양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러시아에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 이른바 부동항(不凍港)이 절실히 필요했습니다. 유럽 쪽으로 진출하려고 몇 차례 시도했지만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 의해 번번이 좌절됐습니다. 그런 러시아가 보기에 한반도는 부동항이 줄지어 있는 훌륭한 장소였지요. 게다가 당시 러시아 안에서는 곧 혁명이 일어날 듯 불만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황제는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불만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을 나라 밖으로 돌리려고 했습니다. 한편 일본은 좁은 섬나라에서 벗어나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북진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

  • 역사 기타

    일본에 진 청나라, 독립국 조선 인정…대한제국 출범, 13년만에 패망 '단명'

    조선의 군주 고종이 황제가 돼야 한다는 주장은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날 무렵부터 제기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조선은 청나라의 힘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중국의 그늘에 있었던 관습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조선이 황제의 나라라고 선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이 청나라와 아무 관계도 없는 독립국이라고 못을 박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청나라가 인정한 것입니다.우리 역사상 최초의 황제국 ‘대한’시모노세키조약은 을미사변이 일어나기 전인 1895년 4월17일 맺어졌습니다. 이 조약의 제1조에는 “조선국이 완전한 독립자주국임을 승인할 것”이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전쟁에 이긴 일본은 왜 조선이 독립국임을 인정하라고 청나라에 요구했을까요? 그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 자신들이 조선을 쉽게 침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2월20일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돌아왔습니다. 경복궁을 벗어난 지 꼭 1년 만이었습니다. 같은 해 8월 고종은 조선을 황제의 나라로 새로 세우고 자신이 황제가 됐음을 발표했습니다. 새 황제의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했습니다. 연호는 황제가 즉위한 해를 1년으로 삼아 날짜를 세는 칭호지요. 고종 이전의 조선에서는 주로 중국 황제의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일본 주도로 이뤄진 을미개혁 때 처음 조선의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습니다. 1896년 1월1일을 시

  • 역사 기타

    러시아 몰아내기 위한 일본의 '황후 시해' 을미사변은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

    고종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동안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임오군란 때문에 청나라의 입김이 강해졌고 그에 대한 반발로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갑신정변의 뒤처리로 일본과 청나라가 톈진조약을 맺었고 그 조약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있었지요. 그 때문에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 이긴 일본은 엄청난 전리품을 챙기려 했습니다. 이에 러시아와 독일, 프랑스 삼국이 간섭을 하여 일본의 팽창을 막았고 이후 조선은 러시아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습니다.작전명이 ‘여우 사냥’이라니삼국간섭의 결과 우리 역사상 가장 비극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을미사변입니다. 삼국간섭의 영향으로 조선에 친러 내각이 들어서자 일본은 다 된 밥에 코 빠뜨릴 것 같은 위기를 느꼈습니다. 조선을 차지하기 위해 공들였던 그동안의 노력이 헛일이 되고 그 공을 러시아가 대신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고종과 명성황후는 친러파 대신인 이범진과 이완용을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나랏일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또 러시아 공사인 베베르를 초대해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달라고 간절히 청하기도 했습니다. 베베르 공사는 큰 나라인 러시아가 조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큰소리쳤지요. 그러나 그때 러시아는 일본에게서 한반도를 나누어 갖자는 제의를 받고 어떻게 할 것인가 궁리하던 참이었습니다.일본은 친러 내각의 중심 인물이 명성황후라고 생각했습니다. 고종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명성황후만 처치하면 고종을 자신들의 손 안에 넣을 수 있을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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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노린 청나라·일본의 다툼 '청일전쟁'…갑오개혁으로 본격적인 근대사가 시작되다

    일본은 1860년대부터 시작된 메이지유신으로 조선보다 한 발 먼저 근대화의 길에 접어들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의 일원이 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내세우던 일본은 대륙으로 뻗어나가기 위해 먼저 조선을 손아귀에 넣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던 청나라와 러시아가 이를 용납하지 않았죠. 일본은 전쟁을 치러서라도 청나라와 러시아가 조선을 포기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조선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청나라를 몰아낼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농민군과 조정의 화해, 전주화약3000명이 넘는 일본 군대는 인천에 도착한 다음날 바로 서울로 들어왔습니다. 청나라 군대에 일본 군대까지 외국 세력이 한반도 중심부에 진을 치자 농민군은 일이 커지는 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땐 하필 6월 초로, 보리 수확과 모내기 준비에 바쁜 농번기였죠. 농민군들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이에 전봉준은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의 개혁과 탐관오리의 제거를 주장하는 27개조의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제안했습니다. 개혁을 약속한다면 농민군을 해산하겠다고 제의한 것입니다. 농민군과 조정은 싸움을 멈추고 화해했습니다. 그때 화해의 약속이 전주에서 이뤄졌기에 이를 전주화약이라고 합니다.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스스로 폐정 개혁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이렇게 조정과 농민군이 화해를 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진정됐습니다. 하지만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는 돌아가지 않았어요. 심지어 일본군은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가둬버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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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망국 부른 고종 때 숱한 사건들…'동학혁명'으로 이어진 관리들 부패

    어떤 역사적 사건이 괜히, 갑자기, 느닷없이 터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지요. 특히 고종 임금 때 일어난 그 숱한 사건들, 조선을 망국으로 이끈 그 사건들은 한 줄로 세워도 될 정도로 원인과 결과의 관계가 분명합니다. 갑신정변도 정변 자체는 실패했지만 다음 사건에 대한 원인을 확실히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갑신정변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하며 청나라와 맺은 톈진조약이 이후 조선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조선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톈진조약일본은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지요. 군사를 보내 고종을 호위하기도 했지만 상황이 불리해지자 슬그머니 손을 뗐습니다. 그런데 정변의 과정에 피해를 입었다고 조선과 청나라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과는 한성조약을, 청나라와는 톈진조약을 맺었습니다.그런데 이 톈진조약이 문제였습니다. 주요 내용은 일본, 청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낼 때는 자기네끼리 서로 알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두 나라 중 한 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보내면 조선이 원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약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톈진조약은 이후 조선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요. 청나라의 힘으로 갑신정변을 막았다고 생각한 조선 왕실은 청나라에 더욱 의존했습니다. 청나라는 본격적으로 조선에 내정 간섭을 하였지요. 일본은 일본대로 조선에서 여러 이권을 차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렇게 이웃 나라들이 서로 조선을 차지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데 조선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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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잃은 조선왕실과 조급한 개화파…3일 천하로 끝나버린 갑신정변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구식 군대를 지원했던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잡혀갔습니다. 이로써 고종은 아버지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았고 명성황후도 궁궐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큰 난리를 겪으면 지배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돌아보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요. 역사적으로 수많은 민란과 봉기가 있었고, 그중 성공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래도 사건 이후 권력자들의 반성과 개선의 노력, 민중의 깨달음이 조금씩이라도 있었기에 오늘날 같은 자유로운 세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혼란 또 혼란…제물포 조약그런데 조선의 왕실은, 왕비의 생사를 알 수 없어서 장례까지 치러야 하는 큰 난리를 겪고도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난리가 진정되자 먼저 주동자를 잡아다 고문하고 사형에 처했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나 바람이 무엇인지 알려는 노력보다는 어떻게 하면 자신들의 권력을 지킬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데 골몰한 것입니다.일본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 배상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군란으로 공사관이 부서지고 일본 외교관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군함과 군대를 이끌고 제물포항(지금의 인천항)에 와서 조선을 위협했습니다.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일본과 조약을 맺게 됐지요. 바로 ‘제물포 조약’입니다. 이 조약의 결과 조선은 5년 동안 50만원을 일본에 배상하고 일본이 자신들의 공사관에 군대를 두는 것을 허락해야 했습니다.청나라는, 조선이 자신들의 속국이라고 더욱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3000명의 군사를 조선에 데려다 놓고 청나라의 황실을 배신하면 안된다고 협박했습니다. 정치와 외교를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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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익현 '도끼상소'·임오군란·대원군 납치…조용한 날이 없었던 조선의 하루하루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인천항과 부산항, 원산항을 개방했습니다. 조선의 문이 활짝 열리자 여러 나라가 조선에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까이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는 물론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저 멀리 큰 바다 건너에 있는 나라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조선으로 모여들었지요. 그들은 겉으로는 서로 물건을 사고파는 교역을 원한다고 했지만 속마음은 달랐습니다. 조선에 있는 자원을 독차지하여 헐값에 가져가거나 아예 식민지로 만들 기회를 노리고 접근한 것입니다.개화와 외국의 침탈고종은 정부 조직과 군대 조직을 개혁하고 선진 문물을 배워 들이기 위해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보냈습니다. 고종이 개화 정책을 펴는 과정에 정치적, 경제적 침략을 가장 적극적으로 해온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개화의 바람이 침탈과 함께 불어닥치자 개화에 반발하는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바로 위정척사파였습니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는 뜻입니다. 여기서 사악한 것이란 서양 문물을 말하지요. 주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위정척사파와 서양 문명의 장점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한 개화파는 날카롭게 대립하기 시작했습니다.위정척사파의 대표적 인물로 최익현을 꼽을 수 있습니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던 사람이지요. 그는 1876년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려 개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이른바 ‘도끼 상소’입니다. 상소를 올리는 데 도끼를 들고 온 이유는, 자신의 말이 옳으면 받아들일 것이고 혹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자리에서 자신이 가져온 도끼로 목을 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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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이 열리다…일본에 이어 미국·프랑스·러시아 등과 조약

    고종이 조선의 제26대 임금이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였습니다. 원래 미성년이 임금이 되면 대비가 발을 내리고 그 뒤에서 정치를 돕는 수렴청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비가 된 신정왕후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섭정을 하게 했습니다. ‘대원군’이란 자신은 왕이 아니었지만 아들이 왕위에 오른 경우 그 아버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조선의 대원군들 중 정치에 직접 나선 사람은 흥선대원군밖에 없으므로 보통 ‘대원군’ 하면 흥선대원군을 가리킵니다.대원군, 안동 김씨·서원 축출흥선대원군이 가장 먼저 시작한 개혁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집안이나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당쟁의 근거지가 되는 서원을 철폐했습니다. 서원은 지방에 있던 유학자들의 사설 교육기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원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파당을 만들고 다른 파당과 싸우는 일이 잦아서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흥선대원군은 이름 없는 세금과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 제도도 없애서 백성들의 부담을 줄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한 일 가운데 가장 대담한 일은 양반들에게서도 세금을 거둬들인 것입니다. 가난한 평민은 세금을 내는데 상대적으로 더 부유한 양반들은 오히려 세금을 안 내는 모순된 일이 그때까지 당연시되고 있었지요.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민심을 수습했으며 국가 재정도 늘려나가는 등 개혁을 펼쳤습니다.당백전·통행세·쇄국정책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잘못한 일들도 있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