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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기타

    제국을 선포하다

    오늘날 덕수궁(경운궁)에서 약 5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조선 시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이라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서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의 즉위식이 치러집니다. 더 이상 청 황제의 제후국 조선이 아니라 ‘대한제국’임을 선포하고 고종 황제는 ‘광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됩니다. 조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이에 근대적 입헌 체제를 수립한 제국, 대한제국이 있었습니다.근대적 개혁 군주를 자처한 고종 황제당시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조선은, 그리고 고종은 정신이 없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있었던 을미개혁, 그리고 당사자인 고종 자신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것까지, 그야말로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와 같은 날들이었지요. 독립협회는 물론 전 현직 관료들조차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국임을 선포해야 한다는 호소와 주장이 계속해서 고종에게 올라왔습니다. 결국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됩니다.단, 이 과정을 저는 고종의 시선으로 한 번 바라볼 필요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상당히 상황에 떠밀려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이미 아관파천 당시인 1896년 고종은 민영환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보냅니다.또한 다음해인 1897년 민영환을 영국대사로 임명하고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행사에 참석케 합니다. 제정 러시아는 여전히 황제권이 막강했지요. 영국은 이미 의회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기반으로 하는 입헌군주제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지요. 이 두 가지 경우를 고종은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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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땅의 주인은 농민이다

    개항 이후 조선은 내부의 근대적 개혁 요구와 외부의 제국주의적 침략이 동시에 들이닥치는 위기의 순간이자 환골탈태할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지난호에서 보았듯 1884년 급진개화파가 중심이 된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 후 딱 10년 뒤 이번에는 조선의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이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시대의 개혁을 온몸으로 요구한 그들, 바로 전봉준과 동학 농민 운동입니다.시대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일어선 농민들비록 갑신정변 이후 정부는 나름대로 개화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각 지역의 농민들은 탐관오리의 수탈과 1880년대 이후 내륙으로 진출한 청과 일본의 상인들이 판매하는 값싼 영국산 면직물 등에 의해 경제적 타격을 심하게 입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특히 삼남 지방의 농민들을 중심으로 1860년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많은 공감을 하며 받아들이게 됩니다. 동학은 기존 양반 중심의 신분제를 거부하고 평등 사상과 함께 이른바 ‘후천개벽’이라 하여 조선 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가 다가올 것을 설파하였습니다. 당연히 조선의 지배층은 동학을 용인할 수 없었지요. 반대로 농민들에게 동학은 새로운 희망의 빛 줄기였지요. 2대 교주 최시형의 포교 활동과 좀 더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구한 전봉준의 활동으로 동학은 하나의 사회 세력으로 성장해 갑니다.처음에는 동학 포교의 자유와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종교적 운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탐관오리 숙청과 외세에 반대하는 사회 정치 운동으로 확장되어 갔지요. 결정적 사건은 1894년 1월 전라도 고부에서 발발합니다.반봉건, 반외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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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로 근대 국가를 시도하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저녁 7시 종로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초의 우체국인 우정국에서 이 낙성식을 축하하기 위한 연회가 개최됩니다. 당시 실세였던 민씨 세력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민영익부터 청을 위해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에 간섭하던 묄렌도르프 등이 대거 이 연회에 참여하였지요.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곧 창문밖으로 불이 난 광경이 포착됩니다. 사람들은 불이야 불이야 라고 소리지르고 있었지요. 놀란 민영익은 우정국 문을 박차고 나갔지만 곧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옵니다. 급진 개화파가 주축이 된 개화당의 칼에 맞은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근대 국가를 지향한 사건, 바로 갑신정변의 시작이었습니다.조선을 아시아의 프랑스로 만들겠다는 김옥균제가 개인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정변의 핵심 인물인 김옥균이 남긴 말입니다. 그는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개화당)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영국의 17세기의 명예혁명처럼 왕정을 유지하면서도 근대 입헌 체제로 나아가는 것에 비교하여 우리나라는 프랑스혁명처럼 근대 국민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김옥균은 명확하게 당시 세계 정세와 역사의 흐름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혁명처럼, 근대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 기득권 세력과 구체제를 강한 의지로 밀어부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사실 조선은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으로 근대 경제 체제, 즉 자유 무역이라는 틀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제 어떻게 정치적 근대 개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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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의 아버지가 정치를 대신하다

    1863년 왕권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철종이 후사없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뜹니다. 19세기 순조, 헌종, 철종대까지 안동 김씨 등 세도가들이 오히려 조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었습니다. 철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이는 신정왕후 조씨의 전교로 지명된 고종입니다. 그런데 그는 당시 12세밖에 안 되는 나이라 처음에는 신정왕후가 잠시 수렴청정을, 그리고 곧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맡게 됩니다. 왕의 적통이 없어, 종친 중에서 새 왕을 뽑았을 때, 그 아버지를 대원군이라 합니다. 흥선대원군 외에도 선조, 인조, 철종의 아버지를 대원군이라고 불렀지요. 단 이들은 모두 죽은 후에 대원군이라 칭해진 것이고 살아서 대원군이라 칭해진 이는 흥선대원군이 유일합니다. 그리고 그는 10년 동안 살아있는 권력으로 고종 대신 조선을 움직였습니다.10년간 왕권 강화를 위해 일한 흥선대원군한 마디로 말하면 흥선대원군은 조선의 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린 왕을 대신해 10년 동안 집권한 것이지요. 훗날 임오군란 때 잠깐, 그리고 1894년 1차 갑오개혁 때도 잠깐 집권한 적이 있지만 여러분은 주로 이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집권기에 대해 배웁니다. 당시 44세였던 그의 눈에 조선은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왕권은 땅에 떨어져 있었고 백성들은 이미 1862년 임술 농민봉기를 일으킨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외부에서 들여오는 소리는 큰 나라로 섬기는 청 왕조가 서양에 의해 무너지고 있었으며, 바로 위의 러시아도 점차 세력을 넓힌다는 것이었지요. 안팎의 위기 속에 흥선대원군의 선택은 과감한 개혁이었습니다.우선 외척일 뿐인데 권력을 가지고 있던 안동 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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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가 1795년(을묘년)에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 화성으로 행차한 지 2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래서 수원화성박물관 등에서 특별 기획전을 개최하고 있지요. 1795년 당시, 윤2월 2일부터 8일 동안 치러진 이 행차를 찬찬히 살펴보면 매우 중요한 정치적 함의를 가진 두 행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정조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바로 사도 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행차합니다. 둘째, 그 직후 정조는 자신이 만든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군사훈련을 팔달산 정상 서장대에서 주요 신하들과 직접 참관합니다.조선 왕 중 가장 드라마틱했던 삶을 산 정조당시 이 행렬에 참가한 인원만 1779명, 말도 779필이나 됩니다. 그 규모가 엄청나 한강을 건널 때는 배가 아니라 아예 수많은 배를 엮어 만든 배다리를 사용합니다. 아, 참고로 그 배다리를 제작하는 데 실학자이자 정조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이 적극 참여하였지요. 자, 이렇게 대규모 행렬이 먼저 간 곳은 영조의 노여움으로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자신의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묘소입니다. 그리고 왕권 강화의 필수적 요소인 친위부대의 군사훈련을 참관한 것이지요. 사실 어머니 환갑잔치보다 이 두 가지가 먼저 있었다는 점에서, 결국 사도 세자의 죽음을 지지했던 세력 또는 정조와 대척점에 있었던 신하들은 매우 불편한 자리이거나 왕의 숨은 뜻을 헤아려 보기 위해 극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겠지요.정조, 그는 1776년 왕위에 올라 24년 여 동안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하며 조선 후기 정치 사회적 발전을 이끈 왕입니다. 그러나 그가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1800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매 순간이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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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조선의 미(美)…달항아리

    지난 호에서 저는 100년이나 걸려 완성된 개혁 민생 법안 대동법을 언급하였는데요. 이번 호에서는 대동법이 완성된 직후부터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그 후 100년 동안이나 유행을 지속한 최고의 예술품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숙종 말년부터 영조 시기에 최절정의 예술적 완성도를 뽐낸 문화재이자 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는 백자, 바로 18세기의 ‘달항아리’가 그것입니다.하루종일 봐도 또 보고 싶은 ‘달항아리’사실 백자는 이미 고려 시기부터 제작되었고, 중국의 징더전에서 제작된 매우 다양하고 화려한 백자가 엄연히 존재하였지요. 더구나 조선에서도 이미 세조의 통치 후반이었던 15세기 후반에 경기 광주 일대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소, 즉 ‘관요’을 설치하고 지속적으로 제작한 상황이었습니다. 조선시대하면 곧 백자를 떠올릴 만큼 상징적 존재이기도 했지요. 왜냐하면 백자는 성리학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를 오롯이 담은 최고의 미적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고결하고 검소하면서도 청렴한 성인 군자의 정신 세계를 그대로 드러난 도자기가 바로 백자였습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아무나 이 백자를 소유할 수는 없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성인 군자를 상징하는 왕이 사용하는 그릇이기 때문이지요. 실제 15세기 후반 『경국대전』에는 백자 중에서 가장 화려한 청화백자를 왕실이 아닌 신분이 사용하면 장 80에 처하도록 규정하였어요. 그만큼 왕실이 백자를 독점하였던 것이고요.반대로 양반 사대부 입장에서는 성리학적 고결함을 담은 이 백자를 『경국대전』의 규정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어했지요.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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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년 만에 완결된 수취 제도 '대동법'

    17세기는 한편으로 전쟁의 시대였지만, 또 한편에서는 서서히 상품 경제가 발전하는 이른바 ‘상업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중국을 차지하는 혼란기였으나 이미 명대에 들어온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 외래 작물의 보급과 양쯔강 중류의 발전으로 상업에서도 활기를 띠었지요. 일본에서는 17세기 초에 에도 막부가 일찍 들어서면서 지역별로 거점 도시가 발전하는 양상을 띠며 조닌이라는 상공업자들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조선 후기 사회의 활력소, 대동법조선의 상황은 좀 더 극적입니다. 이미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국토가 황폐화됐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백성들의 삶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17세기 후반부터는 반전을 거듭하며 시장과 상업의 물꼬가 트이며 조선 후기 사회가 활력을 되찾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역사학자들이 공통적으로 꼽는 요인은 바로 ‘대동법’입니다.대동법은 간단히 말하면 기존 공납제를 쌀로 환산해 내는 것입니다.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이 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데 걸린 시간만 무려 100년입니다. 그리고 이 대동법의 원인이 되는 공납제의 문제점은 이미 16세기부터 드러났고 우여곡절 끝에 대동법이라는 개혁 법안이 탄생하게 됩니다.사실 조선은 과전법이라는 토지 개혁을 통해 농민을 보호하면서 대신 전세(토지세), 공납(토지세), 역(군역과 요역)이라는 수취 체제를 만들어 톱니바퀴처럼 국가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도록 시스템을 잘 마련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점차 양반지주 등이 더 많은 토지를 가지려 하고, 탐관오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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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붕당 정치, 예송 논쟁으로 이어지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어떻게 사회 질서를 회복시켜나갔을까요. 한편에서는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한 북벌 운동이 추진됐으며 또 한편에서는 성리학적 예법을 바로 세우려는 양반 지배층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북벌을 추진하던 인조의 둘째 아들이자 형 소현세자를 대신해 조선을 통치하던 효종이 의외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붕당정치의 정점이라는 예송논쟁으로 조선은 휘말려 들어가게 됩니다.어떤 예법에 따라 상복을 입을 것이냐1659년 조선 제17대 왕 효종이 세상을 떠납니다. 원래 그에게는 형이 있었죠. 바로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입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이미 소개된 서구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이 중 일부를 가지고 귀국했으나 삼전도의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는 오히려 외면당합니다. 그리고 의문의 죽음을 당해 둘째였던 봉림대군, 즉 효종이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효종에게는 두 명의 걸출한 스승이 있었죠. 한 명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계승한, <어부사시사>의 가사문학으로 유명한 남인 계열의 윤선도이며, 또 다른 이는 율곡 이이를 계승하고 김장생에게서 예법을 배운 서인 계열의 우암 송시열입니다. 둘은 같은 성리학을 탐구했지만 학문적으로 미묘하게 갈라지며 경쟁관계기도 했죠. 주자의 성리학을 누가 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가 하는 부분에서 선의의 경쟁 구도에 놓이기도 했습니다.그런데 효종이 4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나자 상복 문제로 본격적인 대립 구도를 형성하게 됩니다. 당시 현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