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26) 고려의 지배체제 (하)
고려 수도인 개경은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죠…고려는 귀족·관료·중앙군 등 국인과 지방 향인 차별
전호란 말의 기원은 중국 송(宋)이다. 송은 민간의 토지 임대차 관계와 소작농을 가리켜 각각 주전제(主佃制)와 전호라고 불렀다. 11세기 말 송은 주전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조정하기 위해 전주(田主)와 전호의 지위에 차등을 두는 법을 제정했다. 고려왕조는 그 법을 백성의 지위를 규정하는 데 적용했다.

전호란 말의 유래

종래 고려의 전호를 송의 전호와 동질의 존재로 간주함으로써 고려사 연구에, 나아가 토지제도사 연구에 큰 혼란이 빚어졌다. 한국사와 중국사의 발전 단계와 수준을 동일시한 역사가들의 선입견이 주요 원인이었다.

이전에 소개한 대로 12세기 고려의 인구는 250만~300만 명에 달했다. 그중 왕도 개경과 인근 주현(州縣)에 밀집한 인구는 대략 50만 명이었다. 그 중핵은 4000여 명의 문관과 무관, 대략 3만 명에 달한 중앙군, 그리고 그들의 가속이었다. 《고려사》는 이들을 가리켜 국인(國人)이라 불렀다. 국인은 개경에 살면서 왕실을 옹위하는 귀족, 관료, 중앙군의 집단을 말했다. 국인은 조정의 정치를 주도했고, 여론의 향배를 결정했으며, 나아가 왕위 계승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고려의 개경은 신라의 금성과 마찬가지로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다.

지방 향인으로 내쳐지는 귀향형은 가혹한 형벌

고려 수도인 개경은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죠…고려는 귀족·관료·중앙군 등 국인과 지방 향인 차별
고려왕조는 개경에 집주한 국인의 군사공동체가 전국의 580여 주현과 같은 수의 향(鄕)·부곡(部曲)을 예속공동체로 지배하고 그로부터 조세와 공물을 수취하는 공납제 국가였다. 고려는 국인과 향인을 차별했다. 지방의 향인은 거주와 직업을 속박당했다. 관청의 허락 없이 함부로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거나 직업을 바꿀 수 없었다. 향인이 국인으로 승격하는 것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특전이었다. 반면 국인이 향인으로 내쳐지는 것은 국인에겐 가장 가혹한 형벌인데, 귀향형(歸鄕刑)이라 했다. 고려는 송의 법을 빌려 썼는데, 귀향형은 송에 없는 고려 특유의 법이었다.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으로부터 많은 외침을 당하고서도 자력으로 물리치거나 강인하게 저항한 것은 그 국가체제가 3만 명의 중앙군으로 이뤄진 군사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이 같은 고려왕조의 국가체제를 많이 왜곡했다. 고려는 조선과 같은 선비의 나라가 아니었다. 전쟁이 나면 솔선해서 전장으로 뛰어가는 군인의 나라였다. 나는 그 나라가 아름다웠기에 후대의 한국사가 국체를 보전했다고 믿는다. 《고려사》가 무신정권(武臣政權)의 장군들을 반역의 무리로 규정한 것은 유교적 충역의 기준에서였다. 한국의 문화가 아직도 그런 사관을 답습하고 있음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고려의 지방행정 단위로서 주현은 대략 580곳이었다. 그 가운데 고려 말기까지 수령이 파견된 곳은 200곳을 넘지 않았다. 나머지는 속현(屬縣)이라 하여 수령이 파견된 주현(主縣)의 통제를 받았다. 이외에 향과 부곡이란 행정 단위가 있었다. 그 수는 대략 600이며, 역시 주현의 통제를 받았다. 그 아래에 촌(村), 리(里), 동(洞), 평(坪), 소(所), 포(浦) 등 다양한 명칭의 행정 단위가 있었는데, 총수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고작 알려진 두 현의 사례에서 촌리의 수는 각각 3과 7이었다. 촌리에 속한 정호(丁戶)의 수가 얼마인지도 알 수 없는데, 단 하나의 사례가 전한다. 1360년 공민왕이 홍건적을 피해 경기도 음죽현에 이르렀을 때 어느 촌의 10여 호가 남아서 왕의 군대를 영접했다. 촌의 호수가 10이라면 촌의 공연(孔烟)이 10~15개인 7세기 말 신라촌장적의 시대와 별로 다르지 않다.

팔관회로 국민 단합

고려의 주현은 노동과 신앙 등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잘 단합된 공동체였다. 주현의 수령은 부처의 탄생일을 맞아 백성이 결집하는 팔관회를 열었다. 고려인은 미륵의 강생을 기원하면서 향나무를 땅에 묻고 그 위에다 비석을 세웠다. 남아 전하는 비석에 의하면 그 건립의 주체는 주현이었다. 주현의 행정은 지방세력이 모인 읍사(邑司)에서 이뤄졌다. 읍사는 주현의 공동체적 결속의 중심이었다. 1178년 청주인이 청주에 사는 국인을 모조리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자 국인들이 결사대를 모아 청주를 쳤는데, 이기지 못했다. 경주는 평소 영주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1201년 경주의 별초군이 영주를 공격했으나 영주의 정예군을 이기지 못했다. 중앙정부가 이 소식을 듣고 경주를 칠 궁리를 했다. 신라와 고려의 주현은 원래 읍락이거나 소국이었다. 위의 두 사건은 그에 뿌리를 둔 주현의 정체성이 12세기까지도 이어졌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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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수도인 개경은 지배세력의 군사공동체였죠…고려는 귀족·관료·중앙군 등 국인과 지방 향인 차별
고려가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으로부터 많은 외침을 당하고서도 자력으로 물리치거나 강인하게 저항한 것은 그 국가체제가 3만 명의 중앙군으로 이뤄진 군사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이 같은 고려왕조의 국가체제를 많이 왜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