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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수출지향 공업화와 급속한 경제성장

    산업혁명 이후 선진국과 후진국의 생활수준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크게 벌어졌다. 개항으로 이러한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세계에 들어간 우리나라는 공업화에 실패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공업화와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왜 19세기 후반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20세기 후반에는 가능하게 됐을까?‘한강의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므로 간단히 설명할 수가 없다. 나라 안팎의 수많은 요인이 절묘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우선 후진국에서도 공업화를 시작할 수 있는 유리한 국제환경이 제공됐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의 공업기술이 고도화되고 임금이 급속히 상승하게 됨에 따라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은 채산이 맞지 않게 됐다. 공장을 후진국으로 옮기거나 로열티를 받고 기술을 이전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경공업부문뿐만 아니라 전자, 조선, 철강, 자동차와 같은 중화학 공업부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이 선두에서 한국과 대만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를 이끄는 ‘기러기가 날아가는 모양’의 공업화가 진행됐다.1960년대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 채택이러한 국제환경을 잘 이용할 수 있는 공업화 전략이 수출지향 공업화였다. 후진국의 공업화 전략은 수입품을 국산품으로 대체하는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과 해외시장에 판매할 목적으로 생산하는 ‘수출지향 공업화’ 전략으로 나눌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후진국은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을 택했다. 높은 관세 장벽으로 유치산업을 보호함으로써 공업화를 달성하고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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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체제선택

    1945년 해방에서 1950년대까지는 국가건설(state-building)과 체제선택의 시기였다. 이 기간에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를 대체하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경제체제의 성격이 결정되었다. 해방과 분단, 경제위축과 혼란, 인플레이션, 좌우 대립, 6·25사변, 부패와 부정선거, 원조경제 등 온통 부정적인 이미지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향하도록 방향을 결정한 실로 중대한 시기였다. 출발점에서 방향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서 가는 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대한민국의 수립에 실패하였거나 시장경제체제가 아닌 사회주의체제가 성립하였다면 우리는 휴전선 너머 북한과 비슷한 사회에서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대한민국의 건국이 가지는 의미는 총독이 대통령으로 바뀌고 일본인 관리가 한국인 관리로 바뀌었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인이 자신을 대표하는 의회를 통해 정부를 구성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닌다. 식민지 국가인 총독부도 조세를 거두어 공공재를 공급하였지만, 총독은 오로지 일왕에게만 책임을 질 뿐 재정운영을 비롯한 일체의 통치행위에 대해 식민지 주민인 한국인에게는 어떠한 동의도 구할 필요가 없었다.식민지 경제 단절 충격 20년 지속3년간 미군정 기간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식민지 경제에서 벗어나 자립적인 국민경제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식민지 시기 동안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주의와 일본 자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34회 참조). 발전의 동력이 외부에 있고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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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식민지 공업화와 경제성장

    식민지 시기 한국은 1940년에도 도시화율이 16%에 불과해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살고 있었고 지주제가 발달해 농민의 절반이 봄이면 식량이 떨어지는 극빈 상태에 놓여 있었다(33회 참조). 그러나 이런 점만 보고 식민지 시기를 생산 증가가 인구 증가를 따라가지 못해 ‘맬서스 함정’에 빠진 전통 농업사회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무엇보다 상당히 빠른 속도의 공업화와 경제성장이 진행됐다. 일본에 병합된 식민지였지만 식민지 조선 지역 안에서 1년 동안 생산된 모든 재화와 서비스를 합계해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GDP)’을 구해보면 1911년부터 1940년까지 연평균 3.6%의 속도로 성장했다. 그해 가격으로 계산한 명목 GDP는 물론 1935년 가격으로 계산한 실질 GDP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그림).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대공황이 일어났던 세계적으로 저성장기였기 때문에 식민지 조선경제는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성장한 것이다. 더욱이 GDP 증가율(3.6%)에서 인구 증가율(1.3%)을 빼 구한 1인당 GDP 증가율도 연평균 2.3%에 달했다. 이는 인구 증가 속도보다 생산 증가 속도가 빨랐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식민지 시기의 경제가 맬서스 함정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농업비중 낮아지고 광공업 비중 높아져산업별로 보면 광공업 부문이 빠르게 성장했다. 1911~1940년 농림어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5%에 불과했지만 광공업은 9.7%였고 특히 1930년대에는 13.5%에 달했다(1930~1940년).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산업구조에도 상당히 큰 변화가 생겼다. 1911년에는 전체 생산에서 농림어업이 67.8%를 차지했지만 1940년에는 42.0%까지 낮아진 반면 광공업(전기가스 건설업 포함) 비중은 1911년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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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식민지 농업정책과 지주제의 발달

    일본은 식민지 조선을 일본 본토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쌀 생산기지로 만들고자 하였다. 일본에서는 1880년대 말부터 산업혁명이 시작돼 도시의 공장 노동자에게 공급할 쌀을 수입하고 있었는데 1차 세계대전으로 쌀에 대한 수요가 크게 늘어나자 쌀값이 폭등하였다. 급기야 1918년에는 쌀값 인하를 요구하는 ‘쌀소동’이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 유혈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쌀과 같은 자포니카 계통인 조선 쌀이 대안으로 떠오르게 됐던 것이다. 식민지 조선은 엔화 통화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국제수지 악화를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조선은 일본 쌀 생산기지로조선 총독부의 농업정책은 쌀 생산을 늘려서 일본 본토에 쌀을 공급하는 것이 핵심이었으므로 밭농사는 경시되고 논농사가 장려되었다. 1910년대는 다수확 품종인 일본 볍씨를 ‘우량품종’이라고 보급하는 정도였지만, 1920년대에는 ‘산미(産米) 증식계획’을 수립해 저수지 수로와 같은 관개시설을 대폭 확충하였다. 이에 필요한 자금은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이 일본 대장성으로부터 차입하거나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 후 지주와 농민들로 조직된 수리조합에 이자를 받고 제공되었다. 수리조합은 조합비 분배를 둘러싸고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관개 면적을 1920년 3만2000여정보에서 1935년 22만6000여정보로 크게 늘렸다(1정보=3천평=9917㎡).하지만 전체 관개 답에서 수리조합의 관개답이 차지하는 비중은 1930년대에도 20%에 불과했다는 점은 흥미롭다(그림).같은 기간 관개답이 34만여정보에서 116만여정보로 크게 증가해 전체 논에서 관개답이 차지하는 비율이 22.1%에서 68.3%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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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토지조사사업은 토지를 수탈하였는가?

    조선총독부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2040만원의 거금을 투입하여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였다. 사업은 매우 방대하여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해 소유권을 조사하여 국유인지 민유인지, 그리고 민유이면 누구의 소유인지를 판정하였으며, 지세를 부과하기 위한 기준으로 결부제를 폐지하고 과세 지가를 도입하였다. 그리고 삼각법에 의해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여 지적도를 만들고 토지대장을 비롯한 각종 장부를 작성하였다. 이때 작성된 지적도와 토지대장은 식민지 시기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다.토지조사사업은 이미 재정고문이 대한제국의 재정제도를 개편할 때부터 계획한 사업이었다. 그러나 병합 전에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사업은 할 수 없다면서 유보되었다가 1910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에 들어간 것이다. 총독부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한 것은 조세의 근간을 이루는 지세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재정을 장악하기 위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재정고문과 통감의 지배 하에 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이 설치되고 중앙집권적인 징수체계가 수립됨으로써 조세수입이 크게 증가하였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았다.(31회 참조)결부제 폐지 과세지가 도입당시 토지에 대한 세금 부과는 결부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결부제(結負制)는 비옥도(생산성)에 따라 경지를 6등급으로 구분, 1등전 1결은 약 3000평, 6등전 1결은 약 1만2000평으로 정하는 지세부과 기준이다. 비옥도에 따라 1결의 실제 면적에 차등을 두어 같은 결수이면 같은 세금을 납부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상당히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인 양전(토지조사)이 1720년 이후 오랫동안 시행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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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일본은 어떻게 대한제국의 재정을 장악하였는가

    1904년 2월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한일의정서’를 강요해 전쟁에 협력하도록 만들었다. 나아가 제1차 ‘한일협약’에 의해 10월 ‘재정고문’으로 부임한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는 사실상 ‘재정감독’이 돼 대한제국의 재정운영을 철두철미 감독하고 재정제도 전반을 개편했다. 1907년 7월의 제3차 ‘한일협약’ 체결 이후에는 재정고문이 해임되고 탁지부에 차관을 비롯한 일본인 관리가 임명돼 통감 지휘 아래 대한제국 재정을 직접 관장했다.재정고문과 통감에 의해 이뤄진 대한제국의 재정제도 개편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1)일본의 제일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승격시켜 국고를 맡기는 한편 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새 화폐를 기존의 동전 및 백동화와 교환해 대한제국의 법화로 만들었으며, (2)탁지부 직속의 징세기관을 설치해 지방관과 이서층을 조세행정에서 배제하고 조세금의 상업적 이용을 금지했다. 그리고 (3)황실재정에 집중된 각종 재원을 정부재정으로 이관함으로써 황실의 자율적인 재정 기반을 완전히 해체했다.대한제국의 화폐제도는 일본에 의해 개편됐으나 당시 대한제국도 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은 ‘백동화 인플레’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일본화폐의 유통, 특히 일본이 금본위제로 전환한 뒤 폐기 처분한 은화와 제일은행권의 유통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 설립과 금본위제 실시 및 태환권(금화와 교환을 보장하는 지폐) 발행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대한제국은 1901년 2월 금본위제를 실시한다는 법령을 제정하고(‘화폐조례’), 1903년 3월 중앙은행을 설립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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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황실재정의 확충

    갑오개혁 중단 후에 수립된 대한제국은 ‘재정 능력’ 증대의 방법도 갑오개혁과 크게 달랐다. 대한제국은 결호전, 즉 결전(지세)과 호포전(호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재원을 황실 재정으로 집중하고자 했다. 시차를 두고 이뤄졌지만, 역둔토 등의 각종 국유지, 홍삼 전매사업, 금광을 비롯한 광산, 균역청에서 관할하던 어염선세, 상업 관련 ‘무명잡세’, 독점권을 행사하는 특권회사들이 모두 궁내부, 특히 황실 재산을 관리하는 내장원으로 속속 집중됐다. 갑오개혁 정부는 상업 관련 조세 대부분을 ‘무명잡세’로 간주해 폐지했으며 국유지는 민간에 불하할 계획이었지만, 대한제국은 국가에 연고가 있어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명목을 불문하고 황실 재산으로 만들거나 과세하려고 했다.황실 수입 비대 정부 총수입의 절반황실에는 이 밖에도 ‘황실비’ 및 ‘궁내부비’로 편성돼 국고에서 지급하는 황실 경비가 있었다. 자체 수입과 황실 경비를 합한 황실 수입의 크기는 정부 총세입의 절반은 족히 됐다. 1905년의 개략적인 조사에 따르면 황실의 1년 수입은 국고에서 지급하는 165만여원(元)과 내장원 수입 326만원을 합한 491만여원으로 탁지부가 관할하는 국고 실수입의 69.6%(1903년), 43.9%(1904년)에 달하는 규모였다. 내장원 수입이 국고에서 지급하는 수입보다 더 많아 전체 황실 수입의 66.3%를 차지했다.황실 수입이 국가 재정에 비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는 같은 시기의 일본과 비교하면 잘 알 수 있다(그림). 1896~1904년 사이에 한국은 총세출에서 차지하는 황실 경비의 비중이 최저 9.02%(1896년), 최고 15.5%(1897년)였으나 일본은 각각 1.02%(1900년), 1.78%(1896년)에 불과했다.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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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였는가?

    대한제국(1897~1910)은 근대국가였는가? 이 질문은 근대국가(modern state)의 기준이 없다면 제대로 답할 수가 없다. 서구에서는 16세기부터 영주들이 서로 경쟁하던 분권적인 정치체제가 퇴조하고 강력해진 국왕이 전국을 통치하는 절대주의 체제로 변화했다. 이것을 근거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근대국가 성립의 기준으로 삼으면 중국은 이미 기원전 3세기 진시황 때부터 근대국가였다(F 후쿠야마 『정치질서의 기원』).좀 더 엄격하게 영국에서 명예혁명(1688년)으로 입헌군주제가 수립된 것을 근대국가의 기준으로 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의회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자의적인 왕권의 남용을 제한할 수 있게 된 것이 영국의 경제가 발전하는 중요한 제도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프랑스혁명(1789년)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됐던 것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서구 역사에서 나온 ‘근대’라는 개념을 다른 세계의 역사에 적용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닐까? 포스트 모던한 세계에서 ‘근대국가’를 정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근대국가의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져일단 중앙집권적 정치체제가 근대국가의 기준이라면 개항 이후 조선왕조는 근대국가를 수립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국왕이 전국을 군현제에 의해 직접 통치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정치체제가 서구 근대국가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개항 후 개혁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면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영주가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는 분권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메이지 유신 후 중앙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