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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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폭탄테러범의 요구 조건은 '사과 한 마디'…불신과 증오의 '수요관리'가 필요하다
한때 국민 앵커로 불렸던 윤영화(하정우 분)는 생방송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중 청취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이 청취자는 “내가 폭탄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다”고 말한다. 그저 장난전화라 생각한 윤영화는 청취자에게 욕설을 내뱉은 뒤 전화를 끊어버린다. 잠시 후 서울 마포대교에선 폭탄이 터지고 다리가 붕괴된다.이 순간 윤영화의 머리 속에는 ‘특종’이라는 두 글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윤영화는 방송국 보도국장인 차대은(이경영 분)에게 “테러범과 생방송을 진행할 테니 프라임 시간대 뉴스로 복귀시켜 달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윤영화는 테러범과의 통화를 독점으로 생중계하게 된다.테러의 기대이익 vs 기대비용테러와 같은 범죄는 경제학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미국의 게리 베커 박사는 ‘범죄경제학’으로 각종 범죄가 일어나는 요인을 정리했다. 베커 박사는 범죄 역시 이 같은 경제학적 합리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느 날 그는 강의를 위해 급하게 주차할 곳을 찾다 불법주차를 결심하게 된다. 이 결정에 이르기까지 베커 박사는 강의시간 준수, 불법주차 단속에 걸릴 가능성, 벌금의 크기 등을 따졌고 그는 자신의 불법 행위에서 경제학적인 원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그림>은 베커 박사가 말한 범죄 발생의 조건을 보여주고 있다.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범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기대이익(금전적 이익+심리적 보상)을 계산한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는 데 들어가는 기대비용(체포 가능성, 형벌의 크기 등)을 따져본다. 기대이익이 기대비용보다 크면 범죄자는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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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6) 자유무역의 시작과 산업구조의 변화
개항에 의한 가장 큰 충격은 자유무역의 시작이다. 19세기에 들어와 일본과의 무역은 거의 단절된 상태였지만 중국과는 홍삼을 수출하고 비단을 수입하는 육로 무역이 자못 활발하였는데 수량이나 품목, 그리고 인원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이러한 제한된 관리무역은 1883년까지 부산, 원산, 인천이 차례로 개항되고 시전상인이 독점하던 서울마저 외국상인에게 개방되자 불가능하게 되었다. 관세율도 낮았다. 1882년 임오군란 후에 중국과 체결한 ‘조청무역장정’에서 수입 관세율을 5%로 정한 다음에는 다른 나라와의 통상조약에도 채택되거나 여기에 맞추어 개정되었다. 1883년에는 ‘내지 관세’가 금지되어 일단 통관된 상품에 대해서는 어떠한 과세도 불가능하였다.공장에서 생산한 면제품이 가장 비중이 높은 수입품이었다는 것이 개항의 충격을 더욱 크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중국상인이나 일본상인을 통해서 영국산 면제품이 수입되었지만, 1880년대 말부터 오사카와 고베를 중심으로 일본의 산업혁명이 시작된 후에는 일본산 면제품 비중이 높아졌다. 처음에는 수입 면제품 중에 품질이 고급인 금건(金巾)은 중류층 이상인 사람들에게만 소비되었고, 품질이 거칠었던 시팅(sheeting)도 우리나라 재래의 ‘토포’(土布)가 경쟁할 수 있었다. 재래직기(베틀)로 직조한 토포는 시팅보다 비쌌지만 두텁고 질겨서 내구성이 좋았기 때문에 일하는 일반 서민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그림 1). 이것도 잠시, 일본에서 ‘시팅’을 개량하여 토포와 흡사한 면포를 생산하면서부터는 더 이상 경쟁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 가내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재래 면업은 급속히 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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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한 방' 꿈에 부풀어 오른 증시 거품…주가는 결코 기업실적을 넘지 못한다
“돈 버는 것? 아주 간단해. 1달러짜리를 100달러에 팔 수 있는 정보를 안다고 슬쩍 흘려봐. 그럼 모두가 돈을 싸들고 달려올 테니까.”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2014년)’는 주식 브로커 조던 벨포트의 자전적 소설 ‘월가의 늑대’를 각색한 블랙코미디다. 벨포트는 1990년대 주식 거품을 유도한 뒤 차익을 내고 되파는 수법으로 억만장자가 된 입지전적(?) 인물. 영화 초반 스물두 살의 청년 벨포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분)는 그 꿈을 이루기에 가장 적절한 곳에서 등장한다.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 월스트리트에서다.‘찌라시’의 경제학1980년대 후반. 한 증권회사에 인턴으로 입사한 벨포트는 투자자로부터 전화받는 일을 한다. 당시 미국 금융시장은 대형 기업공개(IPO)가 이어지며 장기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하지도, 정보가 널리 공유되지도 못하던 때였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은 주식중개인들이었다. 영화 속 중개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투자는 정글입니다. 황소(bull market·상승장) 혹은 곰(bear market·하락장) 같은 위험에 직면하죠. 전문가들이 금융 정글에서 당신을 안내할 것입니다.”벨포트의 회사에는 하루 수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중개인들은 주식 거래를 성사시킨 뒤 수수료를 부지런히 챙겼다. “이런 기술을 갖춘 기업에 투자를 안 하면 바보죠. 마이크로소프트(MS) 주식 2만주만 사두세요. 바로 부자가 됩니다.” 오늘날 증권가 ‘찌라시’의 원형인 셈이다.전화로 임의의 고객에게 접근해 상품을 판매하는 세일즈 방법을 콜드 콜(cold call)이라고 한다. 중개인과 투자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클수록(어느 한 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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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5) 개항-근대의 시작과 새로운 국제질서
16세기부터 서구제국이 동아시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지만 군사적인 위협이 된 것은 19세기 이후였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면공업과 같은 경공업에서 철강, 전기, 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으로 공업화가 심화함에 따라서 월등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동아시아 국가와 서구 제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한 것은 아편전쟁(1840~1842년)이 최초였다. 이 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한 중국은 난징조약(1842년)에 의해 상하이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개방하고 홍콩을 할양해야만 하였다. 1860년에는 영국과 프랑스는 베이징조약을 체결해 항구를 모두 개방하고 내륙의 하천을 통행하는 권리까지 획득하였다. 중국의 수도가 서양 군대에 점령을 당하고 황제가 피신하였다는 소식은 조선왕조에도 엄청난 충격이었다.또한 베이징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러시아가 연해주를 할양받음으로써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는 영국·일본 간의 대립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1853년에 미국이 군함으로 도쿠가와 막부를 위협해 개항을 요구한 이후 1858년에 통상조약을 체결함으로써 개항이 이루어졌다.우리나라에도 1866년에 프랑스가 자국인 신부가 처형된 것을 문제로 삼아 강화도를 점령하고 통상을 요구하였지만 정족산성 전투에서 타격을 입고 후퇴하였으며(병인양요), 1871년에는 미국이 군함을 파견해 제너럴 셔만(General Sherman)호가 대동강에서 화공을 당해 침몰한 사건에 대한 사과와 통상을 요구하였다. 요구를 거부당하자 미국은 강화도를 공격한 후 철수하였다(신미양요). 대원군은 프랑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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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최고가격 경쟁하는 예술품 경매도 '경제 사이클'을 거스르진 못한다
“100만유로에서 시작합니다. 130만유로 나왔습니다. 뒤편에서 150만유로 제시했습니다.… 270만, 더 없습니까? 팔렸습니다!”버질 올드만(제프리 러시 분)은 70대 노인으로 나름대로 품위 있는 삶을 추구하는 예술품 감정사다. 바티칸 박물관장에게 작품 검증을 의뢰받을 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그는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예술품 경매를 주관한다. 하지만 그에겐 남모를 아픔이 있다. 어렸을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수녀원에서 자라 여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 것.주변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하며 독신으로 살아가는 그의 유일한 낙은 유명 화가들이 그린 여성 초상화를 수집해 틈날 때마다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체불명의 젊은 여인 클레어 이벳슨(실비아 획스 분)으로부터 집안의 모든 물품을 감정해달라는 의뢰를 받으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올드만은 광장공포증 때문에 집 밖으로 나오기를 두려워하는 이벳슨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며 결국 사랑에 빠진다.1000만원짜리가 1000억원으로‘시네마 천국’을 만든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주세페 토르나토레의 작품으로 더욱 화제가 된 이 영화는 지난해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돼 호평을 받기도 했다.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는 올드만이 긴박하게 미술품 경매를 진행하는 모습이다. 그는 작가, 그림이 그려진 연도, 피사체 등을 설명한 뒤 바로 입찰 가격을 정한다. 어떤 제품은 100만유로, 다른 제품은 2만파운드에서 시작한다. 모두 몇천만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예술품이다. 올드만이 진행하는 경매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만든 굴절접이식 망원경은 입찰가 100만유로(약 15억원)에서 시작해 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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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4) 19세기의 위기
조선왕조의 19세기는 위기의 시기였다. 16세기 말에 일어난 전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지만 17세기 말까지 황폐한 경지가 복구되고 인구도 급속히 증가하였다. 18세기에 이르러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조선왕조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였다. 여러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농업생산성의 하락으로 인해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19세기는 ‘대분기’(great divergence)의 시기로서 서구지역의 경제력과 생활수준이 급속히 상승하였기 때문에(23회 참조) ‘19세기의 위기’는 세계에서 차지하는 조선왕조의 지위를 악화시켰다.19세기가 위기였음은 이 시기가 ‘민란의 시대’였다는 사실로부터 먼저 감지할 수 있다. 1812년의 홍경래난과 1862년의 진주민란(임술민란),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봉기가 대표적이지만 그외에도 크고 작은 많은 민란이 전국에 걸쳐 끊이지 않았다. 단적으로 말하면 경제적 불황과 재정악화로 인해 조선왕조를 장기간 지속시켰던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양반 지배층에 특권을 부여하는 한편, 대중에게는 환곡제도를 비롯한 공공재 공급을 통해 최소한의 생존을 지지하였던 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22회 참조).경지면적 정체속 인구증가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인구증가였다. 조선왕조의 인구는 임진왜란으로 격감한 후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지만 식량을 생산하는 경지면적은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후에는 그다지 증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늘어나는 인구를 부양하는 것이 점점 곤란해졌다. 3년마다 시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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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노예 고용은 비싼 대가를 치른다, 동기부여와 혁신이 없기 때문에…
“살아남고 싶은 게 아니야. 살고 싶은 거지.(I don’t want to survive. I want to live.)”미국 의회가 ‘노예수입금지법’을 통과시킨 것은 1807년. 이듬해부터 노예 수입이 공식적으로 금지됐다. 하지만 노예 제도가 폐지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해외에서 노예를 사들이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자유주(州)에 살고 있는 흑인을 납치해 노예주에 팔아넘기는 인신매매가 늘어나게 됐다.지난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8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색상, 여우조연상 등 3관왕을 차지한 스티브 매퀸 감독의 영화 ‘노예 12년’은 1840년대 자유인이던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이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해 다시 자유를 찾기까지 겪었던 12년의 삶을 그려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노섭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자유의 상실: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미국의 노예사(史)는 17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19년 흑인 노예 20여명을 태운 배가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에 들어온 것이 시초였다. 처음부터 아프리카의 흑인들만이 노예였던 것은 아니다. 아메리카 대륙 개척 초기에는 백인 노예도 있었다. 특히 유럽에서 추방된 범법자나 대서양을 건너는 뱃삯을 내지 못한 사람들, 집시까지 다양한 사람이 존재했다. 하지만 미 대륙의 식민지 규모가 커지면서 이들과 하층계급의 백인만으로는 노동력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본격적으로 데려오기 시작했다.주인공 노섭은 뉴욕에 사는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노예 수입이 금지된 1808년 자유인으로 태어난 그는 아내와 세 자식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뛰어난 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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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기타
(23) 조선후기와 'Great Divergence'의 세계사
조선후기는 세계사에서 거대한 변화가 진행된 시기였다. 1500년의 시점에서 본 세계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조선왕조가 끝나가는 19세기가 되면 산업화에 성공한 서구(west)와 그렇지 못한 비서구 지역(rest) 간에 생활수준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그림1). 1000년에는 0.9:1로 서구지역의 1인당 GDP가 비서구 지역보다 조금 낮았는데, 1500년에는 1.4:1 정도로 역전되었으며, 1820년에는 2.1:1, 1913년에는 4.5:1로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커진 것이다. 이렇게 지구 전체를 놓고 볼 때 생활수준의 차이가 급격히 벌어지는 현상을 세계역사학계에서는 ‘Great Divergence’라고 부르고 있다. 보통 대분기(大分岐)라고 번역한다. 워낙 큰 주제이기 때문에 시작한 시점과 원인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대립하고 있지만, 1760년부터 1830년까지 영국에서 진행된 산업혁명이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하고 있다.산업혁명 계기로 생활수준 격차 벌어져산업혁명의 핵심은 공업부문에서 일어난 기술 변화였다. 전통적인 수공업에서는 수차와 풍차와 같이 물과 바람의 힘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사람이나 동물의 근력을 이용하였다. 열이 필요한 경우에는 나무를 주된 연료로 사용하였다. 이와 달리 산업혁명 이후에는 물건을 제조하는 데 노동 대신 기계와 설비를 사용하는 한편, 기계 작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화석연료인 석탄에서 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산업혁명이 ‘대분기’의 계기가 된 것은 무엇보다 제조업 분야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높였기 때문이었다.산업혁명 전에는 1파운드의 실을 생산하는 데 500시간 걸렸으나 1770년대 발명된 뮬(Mule) 방적기로는 20시간밖에 걸리지 않게 됐다. 이후에도 새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