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11)
을사늑약 근거로 일본 침략1905년 11월17일, 일본은 한일협상조약이라 불리는 불평등 조약을 고종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날 일본은 어전회의가 열리는 덕수궁 중명전 안팎에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하지만 고종은 황제의 도장인 옥새 찍는 것을 끝내 거부하였습니다.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입니다. ‘늑약’은 ‘굴레 륵(勒)’자와 ‘맺을 약(約)’자로 만들어진 낱말입니다. 굴레 쓰인 짐승은 고삐를 잡은 사람 손에 이리저리 끌려 다닐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늑약’은 강제로 맺은 조약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힘센 나라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 대한제국과 을사늑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은 나라 사이의 약속이기 때문에 체결 때는 각 나라 최고 책임자의 승인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을사늑약은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와 대한제국 외무대신 박제순이 체결했지요. 황제가 도장을 안 찍은, 그것도 총칼과 대포로 무장한 군대에 포위되어 맺은 조약을 국가 사이의 정식 약속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을사늑약을 내걸고 한반도를 침략했습니다.
일본 통감부 설치…황궁 자유출입
을사늑약의 주요한 내용은 첫째,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지휘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대한제국이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할 때는 반드시 일본 정부의 중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것이지요.
둘째, 일본 정부는 서울에 통감부를 만들고 한 명의 통감을 두겠다고 했습니다. 통감은 “직접 대한제국 황제 폐하를 궁중에 알현하는 권리를 가진다”라고 했는데 이는 통감이 황궁을 멋대로 드나들게 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실제 초대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황궁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우리 정치에 여러 가지 간섭을 해댔습니다.
식민지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한일합방은 1910년에 일어난 일이지만 을사늑약으로써 대한제국은 이미 국권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습니다. 남의 나라에 외교권을 빼앗겼고 내정 간섭을 허용했으니 나라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은 일제강점기가 36년이 아니라 40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종은 을사늑약을 무효로 만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미 외교권을 빼앗긴 상태라 대한제국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나라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고종은 이 문제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비밀리에 특사를 파견했습니다. 만국평화회의는 주요 국가의 대표와 기자단이 모이는 자리였습니다. 이준 열사는 병을 얻어 사망
그러나 특사로 파견된 이준, 이상설, 이위종은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했습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개인적으로는 대한제국을 동정하지만 외교권이 없으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나마 각국 기자단에 억울함을 호소한 덕분에 ‘한국의 호소’라는 글이 여러 나라의 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대한제국을 동정했지만 결과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특사 중 이준은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일본은 이 사건이 한일협약 위반이라며 고종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했지만 고종은 거부했지요. 그러나 일본은 끈질기게 고종을 괴롭혔습니다. 결국 고종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대신 황태자의 대리 청정을 명했습니다. 대리 청정은 황제 대신 황태자가 나랏일을 하게 하는 제도입니다.
1907년 7월19일은 고종이 황태자의 대리 청정 의식을 거행할 것을 명한 날입니다. 그런데 같은 날로 기록된 <순종실록> 첫 번째 기사에는 순종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친일파 대신들이 슬그머니 선위(임금이 살아서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의 형식으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것입니다. 또 일본은 고종 퇴위 이후 재정 부족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했습니다. 마침내 대한제국은 나라를 도둑맞고 황제의 자리까지 빼앗겼으며 나라를 지킬 군대마저 잃은 지경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자리를 순종에게 물려주고 태황제가 되었습니다. 제26대 임금이며 우리 역사상 최초의 황제였던 고종은 한일합방 후 이태왕으로 격하되어 살다가 1919년 67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순종은 허수아비 황제
순종은, 경술년 나라를 완전히 빼앗길 때까지 만 3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수많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던 고종 때와 달리 순종 때는 폭풍 전야처럼 조용했습니다. 이미 대한제국은 나라를 빼앗긴 상태였고 일본의 계획적인 침략이 거침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1907년 일본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맺을 것을 강요했습니다. 이로써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이 간섭하였고 정부 각부의 장관까지 일본이 임명하였습니다. 또 경제 수탈을 위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사법권마저 빼앗아버렸습니다. 이로써 순종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면에서 허수아비 황제가 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