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6) 족장사회 (하)
청색은 한경(漢鏡)·적색은 중국화폐가 출토된 지역.
청색은 한경(漢鏡)·적색은 중국화폐가 출토된 지역.
읍락은 보다 상위의 국(國)이란 정치체에 의해 통합됐다. 읍락이든 국이든 모두 중국인에 의한 한자 표기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대의 삼한인들이 어떻게 부르고 썼는지는 알 수 없다. 3세기 전반의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은 마한에 55개 국이, 진한에 12개 국이, 변한에 12개 국이 있다고 했다.

국의 규모에도 큰 편차가 있었다. 대국은 1만 호를 넘기도 하고, 소국은 수천 호에 불과했다. 후일 신라로 성장하는 사로국(斯盧國)은 6개 읍락이 결합된 것으로 범역의 직경이 30∼40㎞에 달했다. 아주 작은 600∼700호에 불과한 국도 있었다. 이 경우 국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읍락이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국은 2∼3개 읍락의 결합이었다.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국읍(國邑)에는 신지(臣智)라고 불린 장이 있었다. 그 호칭은 국에 따라 다양했다.

국의 성장을 알리는 고고학적 증거는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 각지에 조성된 고분군(古墳群)이다. 규모가 큰 고분은 직경이 17m, 높이가 9m에 달했다. 고분군으로서는 경북 대구·경산·성주, 경남 김해·양산, 전남 나주의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나주의 고분군은 7개의 소집단으로 구분되고 있다. 집단 간에는 묘의 크기나 부장품의 위세에서 차이가 있는데, 상위의 세 집단은 그 세력이 비등했다. 이로부터 나주 일대에서는 7개 읍락이 하나의 국으로 결집하고, 상위의 세 읍락이 국의 신지를 경쟁적으로 배출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철의 유통

읍락과 국이 성장한 요인으로는 우선 철기의 보급을 들 수 있다. 철 자원의 분포는 지역적으로 불균등했다. 이에 철기의 보급은 광역적 유통을 전제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토기, 곡류, 어염, 과실, 비단, 마포, 초피 등 다양한 재화의 생산과 교역이 촉진됐다. 이 교역 체계에서 읍락은 중간 거점을, 국은 고차(高次) 중심을 이뤘다. 말단의 개별 취락은 철기를 비롯한 중요 재화를 읍락으로부터 분배받았으며, 그 대가로 각종 공물을 상납했다.

철 자원과 생산이 풍부한 지역은 강세한 국읍으로서 후일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예컨대 신라와 가야가 성장하는 경주, 울산, 김해는 철 생산의 중심지였다. 이 지방에 대해 《삼국지》 동이전은 “국에서 철이 나는데 한(韓), 예(濊), 왜(倭) 모두가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 여러 물건을 사는 것도 모두 철을 가지고 함이 중국에서 돈(錢)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낙랑과 대방의 두 군에도 공급한다”고 했다.

위신재의 공급

또 하나의 요인으로는 정치적 위신(威信)의 수입과 보급을 들 수 있다. 전술한 대로 기원전 4세기 이래 요동, 요서, 중국으로부터 조선, 연, 한 군현과 같은 정치세력이 한반도로 차례로 진입했다. 기원후 2∼4세기에는 남만주에서 발흥한 부여와 고구려가 그 뒤를 이었다. 고구려는 당초 한 군현에 복속했으나 4세기 초에 그것을 쫓아냈다. 한강 중류에 정착한 백제는 고구려에서 분파한 세력이었다. 부여의 한 무리는 동해안을 따라 김해 지방까지 내려갔다.

여러 정치체의 유입은 토착세력을 소멸시키거나, 강화하거나, 상하 위계로 재편하는 정치적 위신을 공급했다. 예컨대 237년 중국 위(魏)의 명제(明帝)는 낙랑군과 대방군의 태수를 통해 삼한의 여러 신지를 읍군(邑君)과 읍장(邑長)으로 봉하고 술이 달린 인장을 하사했는데, 그것은 신지가 주변의 읍락에 행사하는 권력의 원천을 이뤘다. 한 군현이 공급한 한경(漢鏡·중국 한나라 때의 거울)과 중국 화폐도 그런 위신재로서의 역할을 했다. 제시된 지도는 한경과 중국 화폐가 출토된 유적의 분포를 보여준다.

족장사회

읍락이나 국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한 원리는 종교적이었다. 그것은 개나 돼지 같은 동물로부터 유추된 상징 내지 모형이었다. 중국인에 의하면 읍락의 지배층은 하층 성원을 ‘노(奴)’로 부르고 지배했다. 그 내실을 살피면 그리스·로마의 노예(奴)나 당대 중국의 노비(奴婢)와는 달랐다. 그것은 읍락의 성원이 지배층에 개처럼 복속하는 집단적 관계를 가리켰다. 신지가 죽으면 종자(從者)들이 순장을 당했다. 그렇지만 신지의 권력은 초월적이지 않았다. 신지는 독자적인 궁실이 아니라 일반 성원과 섞여 살았다. 제사와 정치가 일치하는 시대였다. 부여와 고구려에서는 재해가 발생하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교체하거나 죽였다. 이런 사회를 두고 관련 학자들은 족장사회(chiefdom) 또는 초기 국가(early state)로 규정하고 있다. 부족에서 국가로 이행하는 과도기 또는 중간형의 정치 권력이라는 뜻이다. 한반도의 2∼5세기는 크게 말해 족장사회에 해당했다.

"신라로 성장하는 사로국은 6개 읍락이 결합한 것…2~5세기 한반도는 국가 이전 단계인 '족장사회'였죠"
■기억해주세요

3세기 전반의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은 마한에 55개 국이, 진한에 12개 국이, 변한에 12개 국이 있다고 했다. 국의 규모에도 큰 편차가 있었다. 대국은 1만 호를 넘기도 하고, 소국은 수천 호에 불과했다. 후일 신라로 성장하는 사로국(斯盧國)은 6개 읍락이 결합된 것으로 범역의 직경이 30∼40㎞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