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쌤이 전해주는 대한민국 이야기 (22)
소련은 남북을 잇는 길과 다리를 끊어놓고 38선 너머에서 이미 꼭두각시 괴뢰정부를 만들고 있었다.
소련은 남북을 잇는 길과 다리를 끊어놓고 38선 너머에서 이미 꼭두각시 괴뢰정부를 만들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 무기한 휴회

미소공동위원회는 남북한을 아우르는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우리 정당이나 사회단체 등과 협의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단체들을 그 협의에 참여시킬 것인가에 대해 미국과 소련은 합의하지 못했지요. 소련은 모스크바 협정에 반대하는 단체를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스크바 협정에서 언급한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단체, 즉 우익 단체들을 협의에서 빼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에는 소련이 원하는 정부가 세워지겠지요. 미국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하는데, 신탁 통치를 반대한 이유로 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일이지요. 그래서 동의할 수 없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끝내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했습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무기한 휴회로 들어가자 이승만은 미국과 소련의 결정을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1946년 6월 전북 정읍에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연설을 했습니다. ‘정읍 발언’이라고도 하는 그 연설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무기 휴회된 공동위원회가 다시 열릴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을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발언에 나온 ‘남방만의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는 미소공동위원회가 만들려고 한 통일적 임시 정부의 남한만의 조직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는 그때 이미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라는 임시 정부가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소련과 미국의 합의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소련은 겉으로는 통일 정부를 만들도록 애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38선에 길도 다리도 다 끊어놓고 그 너머에서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는 정부를 만들고 있었지요. 또 북한에 이어 남한까지도 자신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정부가 세워지는 방향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남북한 전체를 공산화하려는 술책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남북한 전체가 공산 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을 제시했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은 남북한 전체가 공산 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선택해야 할 길을 제시했다.
이승만은 소련이 믿을 수 없는 나라라는 것을 이전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해방 전에도 소련을 조심해야 한다고 미국에 계속 경고했던 것이지요. 이승만이 정읍에서 한 발언은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에 대처하기 위해 남한도 임시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남북한 전체가 공산 국가가 되지 않으려면 당연히 택할 수밖에 없는 길이었습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이며 소련에 반대해온 이승만에게 소련은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은 무척 위험한 나라였지요. 한반도 전체를 공산 국가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소련은 이미 북한을 자신들의 지령에 따르는 공산 국가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남한 사람들만이라도 단합해 임시 정부를 만들자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만들어진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에 주도권을 빼앗겨 한반도가 공산 국가가 될 수도 있었지요. 그런 위기감에서 이승만은 정읍 발언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남한의 여러 정치 세력과 언론들은 이승만의 이 발언을 비판했습니다. 이른바 ‘단정론(單政論)’이라 하여 민족의 분단을 가져올 위험한 발언이라고 여긴 것이지요. ‘단정’이란 단독 정부, 즉 통일을 포기한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승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이 발언 때문에 우리나라가 분단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할 때 북한에는 임시 정부격인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승만의 발언을 비판하려면 북한의 임시 인민위원회에 대해서도 비판해야 합니다. 또 분단의 근원적 책임은 정읍 발언이 아니라 소련과 북한 김일성에게 물어야 하겠지요. 그런데 소련과 북한이 겉으로 통일을 주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거기에 휩쓸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남한 내 공산당의 폭력투쟁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남한에서 활동하던 조선공산당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들도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박헌영이 지도자였던 조선공산당은 미 군정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했습니다. 그러려면 돈이 필요했겠지요. 그들은 투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조지폐를 만드는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 군정은 박헌영을 비롯한 공산당 간부를 모두 체포하려 했습니다. 그때 박헌영은 북한으로 도망쳤습니다. 박헌영은 북한에서도 남한의 좌익 세력에 폭력 투쟁을 벌이라고 계속 지령을 내렸습니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한반도 문제를 소련과 협의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1차 회의 때 문제가 되었던 참가 자격에 대해 소련과 미국의 입장 변화는 없었습니다. 결국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미국은 미·영·중·소 네 나라가 다시 모여 한반도 문제를 의논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끝내 모스크바 협정만을 고집했습니다.

글 황인희 / 사진 윤상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