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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생전은 조선 현실과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죠

    《열하일기》 옥갑야화라는 부분에는 소설 《허생전》이 수록돼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사진)이 정조 시절 청나라 사신길에 동행하면서 보고 들은 내용을 담은 것이 열하일기입니다. 소설은 그 시기의 시대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허생전을 통해 조선 후기 경제 상황과 경제 용어를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살펴보시죠. 조선 과일이 씨가 마른 까닭은주인공 허생은 책 읽기만 좋아해서 그의 아내가 바느질을 해 겨우 먹고살 수 있었죠. 하루는 그의 아내가 책만 읽는 허생을 원망하자 집을 나와 한양에서 제일 부자인 변씨를 찾아가 돈 만 냥을 빌려 안성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시 안성은 각 지역에서 올라오는 물건이 모이는 곳이었죠. 허생은 상인들에게 기존 가격보다 두 배를 더 주고 과일을 사들였습니다. 그러자 전국에 과일이 없어 잔치나 제사를 치를 수 없는 상황이 되죠. 이때 허생은 상인들에게 열 배의 가격으로 되팔아 막대한 이윤을 얻습니다. 그리고 허생은 양반이 상투를 위해 꼭 필요한 말총을 모두 사들여 같은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죠.허생의 행위를 경제학에서는 ‘매점매석(買占賣惜)’이라고 합니다. 특정 물건을 많이 사둔 뒤(매점) 가격이 오를 때까지 팔지 않고 보관하는 행위(매석)를 일컬을 때 쓰죠. 매점매석은 그 물건이 필요한 소비자의 후생을 악화시킵니다. 매점매석 행위는 지금도 존재합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던 초기에 마스크가 엄청나게 부족했죠. 마스크 제조 및 유통업체가 창고에 마스크를 쌓아두고 시중에 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스크가 필요했던 국민은 약국에 오랜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리며 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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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금은 나라의 흥망성쇠에 큰 영향을 미쳤죠

    13세기 영국의 존 왕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기 위한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존 왕은 막대한 세금을 거뒀습니다. 세금 부담이 커진 영국의 귀족들은 군사를 일으켰고, 이에 굴복한 존 왕은 대헌장이라 일컫는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하게 됐죠. 여기에는 왕의 과세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세금을 부과할 때 왕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도록 제어하기 위해서죠. 역사적으로 과도한 세금은 왕조를 바꾸거나 권력의 재편을 가져왔습니다. 고려 후기 권문세족의 수탈한국 역사에서도 지배층의 부패와 백성에 대한 과도한 세금이 누적돼 왕조가 무너진 사례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사성어로 가렴주구(苛斂誅求)라고 합니다. 가혹하게 거두고 강제로 빼앗는다는 의미로, 지배층이 백성에게 세금을 과도하게 거두고 재물을 빼앗아 살기가 괴롭고 힘든 정치 상황을 나타내죠.고려 말기의 시대 상황도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 간섭기를 겪으면서 권문세족의 권세가 막강했습니다. 이들은 산과 천을 경계로 넓은 토지를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이 가렴주구라 할 수 있습니다. 원에 바칠 공물을 마련하기 위해 백성의 재산을 빼앗고 소작한 곡물을 수탈하는 등 권문세족의 횡포는 눈 뜨고 볼 수 없었습니다. 농민은 가혹한 부담에 스스로 노비가 됐습니다. 노비가 늘어나자 국가의 세금 수입은 줄어들고, 토지는 권문세족의 개인 재산이 되면서 고려는 점점 힘을 잃었습니다. 이를 개혁하기 위한 과정에서 이성계의 신흥 무인세력과 신진사대부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세우게 된 것이죠. 한국의 세금 부담은?정부가 국가 경제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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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못된 화폐 발행은 국가 경제를 위험에 빠뜨리죠

    독일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배상금 문제로 화폐를 무한정 찍었습니다. 그렇게 발생한 것이 초인플레이션이죠. 이때 독일 국민은 지폐를 무더기로 가져와서 물건을 사거나 불쏘시개로 사용했습니다. 잘못된 통화정책은 국민 경제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역사적으로도 이렇게 나라 경제를 피폐하게 만든 사례가 많습니다.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즉위하자 왕권 강화를 위한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임진왜란 때 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죠. 농민의 삶은 피폐했고, 지배층의 부패가 심해 세금을 늘리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당백전’(사진)이라는 화폐의 발행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기존에 유통되던 ‘상평통보’에 더해 당백전을 함께 발행했습니다. 당백전은 이름대로 명목가치는 상평통보의 100배였지만, 실제 가치는 5~6배에 불과했습니다. 당백전은 처음 6개월 동안 1600만 냥이 풀렸습니다. 당시 상평통보 유통량이 당백전 유통량보다 적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현금이 풀린 것을 의미하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상대적으로 가치가 높아진 상평통보는 시중에서 사라지고, 막대하게 풀린 당백전의 화폐가치는 계속 하락했습니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의미합니다. 1866년 쌀 한 섬에 7~8냥 하던 것이 2년 후에는 여섯 배나 폭등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시중에서 상평통보가 사라지고 당백전이 유통되는 상황을 ‘그레셤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 법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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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점 커지는 공공부문…바람직한 방향은?

    대통령선거 이후 주목받고 있는 회동이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인과 6개 경제단체장이 만났습니다. 당선인은 이 자리에서 “기업이 더 자유롭게 판단하고 투자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제도적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경제단체장들도 규제로 기업 활동이 제약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죠. 실제로 최근 5년간 정부의 예산 규모, 공무원 수, 규제 입법 건수가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요? 정부가 점점 커지는 이유는국민은 경제가 성장하고 기본적인 생활이 안정되면 복지나 사회적 가치 등에 대해 기대하는 수준이 높아지면서 정부가 역할을 해주길 바라죠. 정부는 국민적 요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관련 예산과 업무를 주관할 공무원 수를 늘립니다. 선진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도 정부 규모가 점점 커졌죠. 이에 따라 국민총생산에서 공공부문 비중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바그너 법칙’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경제학자 아돌프 바그너가 처음 제시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죠. 그는 연구에서 독일 경제가 커질수록 국민총생산에서 공공지출 비중이 커지는 점을 확인했습니다.‘피코크-와이즈만 가설’도 공공부문이 확대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앨런 피코크와 잭 와이즈만은 1891~1955년 영국의 공공지출을 통해 더 심화된 내용을 분석했습니다. 사회가 안정된 시기에는 공공지출이 안정적으로 증가하지만 경제위기, 전쟁같이 국가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하면 정부가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세금을 늘리고 지출을 확대하게 된다는 사실이죠.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기가 지나간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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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화정책의 독립성은 안정적 경제활동의 바탕이죠

    사진은 어떤 건물일까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본관입니다. 건물 이름은 에클스빌딩입니다. 7대 Fed 의장이던 매리너 에클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죠. 미국의 통화정책은 세계 경제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시작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Fed 사무실은 재무부 청사에 있었고 재무부의 지시를 따르는 하위 기관이었죠. 에클스가 취임한 후 Fed는 재무부를 떠나 지금의 건물(사진)로 독립했습니다. 그리고 Fed 산하 연방은행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쥐게 되었고, 재무부 관료들이 통화정책에 관여하는 것을 제한했죠. 이사의 임기 및 교체 시기 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며 미국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확보했습니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왜 중요한 것일까요.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한 미국미국 중앙은행 역사에서 폴 볼커는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과 오일쇼크를 겪었습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통화량이 풀렸고, 석유 가격이 급격히 오르는 오일쇼크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물가가 급상승했죠. 이에 폴 볼커는 연 11%대이던 금리를 20%까지 올리며 인플레이션을 꼭 잡겠다는 의지를 보였죠.정부 입장에서 볼커의 통화정책은 실업률을 높이고 경기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정부의 참모들은 폴 볼커를 그대로 두면 안 된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하지만 지미 카터는 재선에 실패할 정도로 경기가 침체했지만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했습니다. 이어 로널드 레이건도 정책에 개입하지 않았죠. 이 같은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을 꼭 잡겠다’는 명확한 신호를 주어 13%대였던 물가 상승률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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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턴 프리드먼은 공짜의 유혹을 경계했죠

    햇살이 무더운 여름, 개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식량을 나르고 있었습니다. 반면 베짱이는 나무 그늘에서 쉬며 노래를 흥얼거렸죠. 베짱이는 개미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핀잔을 줬습니다. 좋은 날씨에 여름이라 먹을 것이 주변에 넘쳐났기 때문이죠. 굳이 땀 흘려 일하지 않아도 배부르게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식량을 모아 두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왔고, 주변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었죠. 베짱이는 개미를 찾아갔지만, 개미는 핀잔을 주며 베짱이를 쫓아냈죠. 《이솝우화》에 나오는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개미는 겨울에 식량이 부족해질 상황을 예측하고 부지런히 식량을 비축해 뒀습니다. 반면 베짱이는 여름에 풍부하게 나오는 각종 과일과 열매를 보고는 미래의 걱정은 제쳐놓고 현재를 즐기기 바빴죠. 베짱이를 통해 우리는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경제학의 기본 명제를 알 수 있습니다. 이는 경제학에 입문할 때 많이 사용하는 《맨큐의 경제학》 10대 기본 원리에서도 첫 번째로 언급될 정도로 중요하게 여기는 원리입니다.현재를 즐기기 위해 미래에 닥칠 불행에 대비하지 않으면 결국 그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더 쉽게 표현한 사람이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사진)입니다. 그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라는 말로 유명하죠. 이 말은 ‘선택에는 대가가 따른다’와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짱이는 여름에 일하지 않고 휴식을 택했고, 결국 겨울에 굶주림이라는 대가를 치르게 된 것이죠. 국가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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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방을 통해 나라는 경제적 부를 축적하죠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이 지은 《고려도경》에 따르면 “개경엔 화려한 저택과 외국인 전용 숙소도 많다. 여성은 물론 남성도 비단으로 자신을 꾸미고 다녔다. 기름·종이·말·돼지 시장이 각각 있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고 서술했습니다. 송나라 사람이 본 고려는 말 그대로 경제가 부강한 나라였습니다. 고려가 이렇게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요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개방의 나라 고려고려는 건국부터 바다와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세력 기반이 바로 바다였습니다. 왕건은 해양세력을 바탕으로 고려를 건국하고, 후삼국 통일도 이룰 수 있었죠. 이후 고려는 개경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을 통해 다양한 나라와 교역을 했습니다. 송나라부터 요·금·원나라, 왜국 그리고 저 멀리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고려에 들어오면서 개경과 벽란도 주변은 상업 활동이 활발했죠. 고려는 외국인을 관료로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고려 광종 때 중국 후주 사람 ‘쌍기’입니다. 고려는 다양한 문물과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사회였습니다. 반면, 조선은 바다에 대한 활동을 금지하는 ‘해금정책’을 펼쳤습니다. 공무역 외의 사무역은 철저하게 규제했죠. 교역의 문을 닫은 조선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고, 결국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되죠. 고려와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은?고려시대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코레아’,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서양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현재 한국의 ‘코리아’가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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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가적으로 얻는 편익과 비용을 고려해 선택하죠

    때는 바야흐로 백제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4세기 근초고왕 시기. 369년 9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기병과 보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양국의 국경인 황해도 치양에 쳐들어왔습니다. 근초고왕은 태자인 수(후에 근구수왕)에게 이를 격파하라는 명을 내렸죠. 태자는 전투에 나가 용감하게 싸워 고구려 정예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내친김에 태자는 치양보다 더 북쪽인 수곡성으로 향했습니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백제군은 무서울 것 없이 고구려 영토 끝까지 갈 기세였죠. 이때 태자와 함께 원정을 왔던 장군 막고해가 더 이상의 진격을 막았습니다. 백제 태자가 진격을 멈춘 까닭은?“태자마마,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얻으려 하십니까?”라고 태자에게 간언했다. 그러자 태자는 이를 받아들여 군사를 정비해 백제로 돌아갔습니다. 막고해는 도가사상을 언급했지만, 경제학적인 사고로 발상의 전환을 해보면 태자가 더 이상 고구려 영토 깊숙이 들어가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고대 시대는 노동력이 국력인 시대였죠. 노동력이 많아야 농사를 통해 군량을 넉넉히 비축할 수 있었고, 전투인원부터 군량수송 인원까지 충분히 조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를 계속하며 상대방 진영 깊숙이 진격한다고 좋은 상황이라 할 수 없습니다. 승리는 하지만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비축해두었던 군량도 빨리 소모되고, 군사들도 지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적국에 반격을 당해 큰 피해를 볼 수 있죠. 막고해도 이러한 상황을 걱정해 진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