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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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모던뽀이'에서 'X세대'…진화하는 우리말
우리 사회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상전벽해와 같은 발전을 이뤄왔다. 말과 글도 이에 못지않은 변화를 겪었다. “근일에 와서는 조선에서도 ‘모던껄’이니 ‘모던뽀이’니 하는 말이 류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진정한 의미의 ‘모던’은 아즉 업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는 1929년 5월 25일자에서 당시 새로 등장한 모던걸, 모던보이의 행태를 이렇게 전했다. 한글 맞춤법도 없던 시절이다 보니 표기는 뜻만 통하면 될 정도였다.사전에는 말과 함께 사회 변천 담겨‘모던껄’ ‘모던뽀이’는 1920~1930년대 선진문물 유입과 함께 유행을 선도한, 지금으로 치면 신세대에 해당하는 이들이었다. 신문에선 이를 줄여 모껄, 모뽀 식으로도 썼으니 언론의 약어 선호는 꽤나 오래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성의 모던뽀이들은 머리에 ‘포메드’(포마드)를 바르고 ‘맥고모자’(밀짚모자)로 한껏 멋을 낸 뒤 ‘끽다점’(찻집)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이런 말들은 모두 1940년 문세영의 <수정증보 조선어사전>에 표제어로 올라 단어가 됐다.새로운 유행의 흐름은 1950년대 ‘단스바람’으로 이어졌다. 당시 큰 인기를 끈 영화 ‘자유부인’의 영향으로 댄스 열풍이 분 것이다.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인 <큰사전>(한글학회, 1957년)을 비롯해 이즈음 간행된 사전은 ‘단스’ ‘단스홀’ ‘유한마담’ 등과 같은 낱말을 실었다. 춤바람 풍조는 1982년 민중서림의 <국어대사전>에서 올린 ‘제비족’으로 이어졌다.1960~1970년엔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과 히피문화 등 자유를 중시하는 서양 문화의 영향으로 ‘장발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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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다'를 남발하는 글은 잘못된 거죠
“경직된 플레이가 나오기도 했지만 선수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잘해준 거 같다.” 2018 아시안게임에서 선동렬 야구 국가대표 감독이 우승한 뒤 한 말이다. 선수들에게 우승의 공을 돌렸다. 그런데 끝말이 자꾸 귀에 거슬린다. 잘했으면 잘한 것이지 ‘잘한 거 같다’는 무슨 뜻일까?느낌 나타내는 말과는 잘 어울리지 않아‘벌집 쑤신 것 같다’란 말이 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느니 ‘호떡집에 불난 것 같다’란 말도 많이 쓴다. 다 괜찮은 표현들이다. 그런데 ‘엄청 좋은 것 같다’느니, ‘기쁜 것 같다’ ‘슬픈 것 같다’ 따위는 매우 어색하다.‘같다’는 10여 가지 의미로 쓰인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관심을 두는 것은 ‘-는 것’ ‘-을 것’ 뒤에 쓰여 추측, 불확실한 단정의 뜻을 나타내는 용법이다. ‘사고가 난 것 같다/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처럼 쓰는 게 전형적인 용법이다. 이 말은 또 ‘그렇게 느껴지는 바가 있음’을 나타내는 데도 쓰인다. “날씨가 좋아 고기가 잘 낚일 것 같아” 등이 그런 것이다.‘같다’는 확실치 않을 때, 자신 없을 때 쓰는 표현이다. 그래서 입말에서도 공식적 대화에서는 쓰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수사학적으로는 완곡어법의 하나로 사용된다. 하지만 요즘 글쓰기에 보이는 ‘~인 것 같다/같아요’ 표현은 그런 것과도 상관이 없다. 그저 잘못 익힌 말투가 글에 반영된 것일 뿐이다. ‘예쁜 거 같아요, 아픈 거 같아요, 화나는 거 같아요, 맛있는 거 같아요.’ 느낌을 나타내는 감정어는 ‘같다’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거기다 강세부사 ‘너무&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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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2) '가지다'를 다른 말로 바꿔 보자
문장을 쓰는 방식은 소쉬르의 용어를 빌리면 계열체와 통합체의 조합이다. 계열체란 간단히 말하면 단어를 찾는 일이다. 최적의 단어를 찾아 써야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통합체란 그런 단어들을 유기적으로 연결한 것을 말한다. 가령 ‘사과’라는 단어 뒤에는 ‘맛있다, 썩다, 떨어지다, 시다, 붉다…’ 등의 말이 올 수 있다. 모국어 화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사과’ 뒤에 ‘잘’이라는 부사가 왔다면 이어지는 말의 수는 대폭 줄어든다. ‘익다’나 ‘먹다’는 그중 일부일 것이다. 이런 말들이 적절한 위치에 배치돼 매끄럽게 연결된 것을 통합체라고 한다.‘가지다’라는 함정을 피해야우리가 글을 이해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단어의 뜻을 파악해서 아는 것보다 주로 통합체상의 맥락을 통해 이뤄진다. 어떤 말 뒤에 뭐가 올지를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단어들 간에 서로 어울리는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 결합 체계가 단단할수록 언어의 생태계는 건강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말 체계를 위협하는 말 ‘가지다’를 살펴보자.‘그는 지난 3일 모교인 OO대를 찾아 후배들과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 이날 대학 본관 200호 강의실서 가진 특강엔….’언제부터인지 ‘~기회를 가지다’란 문구가 우리말에서 상투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이 표현은 잘 들여다보면 매우 어색하다. ‘만남의 기회를 가졌다’보다 ‘만남의 시간을 보냈다’라고 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이를 ‘(후배들과)만났다’고 하면 더 좋다. 훨씬 간결해진다. 이어지는 ‘~에서 가진 특강’도 ‘~에서 한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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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을 해치는 표현들 (1) '만들다'의 유혹에서 벗어나자
“언어를 다듬는 데는 조화롭고 아름다우며 정결하고 정미하게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 형태가 다양해 한 가지로 개괄할 수 없고, 내용이 명료해 여러 가지로 나눠지지 않으며, 형태와 내용이 적절하게 알맞아야 합니다.”(이건창, ‘조선의 마지막 문장’) 조선 후기 3대 문장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이건창(1852~1898)이 말하는 작문 비법 한토막이다. 학자이자 문신인 여규형이 작문에 대한 가르침을 달라고 청하자 편지로 답하는 형식을 빌려 썼다.10여 가지로 쓰는 ‘만들다’, 의미 모호해그의 문장론은 요즘의 글쓰기에 적용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나다. 지금의 눈으로 해석하면 단어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심혈을 기울이고, 다양한 ‘말’을 쓰되 ‘뜻’이 명료해야 한다는 게 요지다. 그런 관점에서 최근 우리 문장을 병들게 하는 표현들을 살펴보자. 언제부터인지 이런 말들이 시나브로 널리 퍼졌다.△어린이들이 ‘한가위 음식 만들기’ 체험행사에서 송편을 만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나팔꽃이 자라면서 창문에는 그늘이 만들어져 시원했다. △시민도 정부도 행복한 지속가능한 해법을 만들었다. △실내에서 운동을 하도록 체육관을 만든다.예문에는 서술어로 모두 ‘만들다’가 쓰였다. 이 말이 왜 문제가 될까?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은 올림말 ‘만들다’에 13개의 풀이를 올렸다. 뜻풀이 첫 항목은 ‘노력이나 기술 따위를 들여 목적하는 사물을 이루다’이다. ‘음식을 만들다/오랜 공사 끝에 터널을 만들었다/이순신이 거북선을 만들었다’ 같은 게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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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학회 110돌… 되돌아 보는 우리말 수난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회는 어디일까? 1908년 8월31일 서울 돈의문 밖 봉원사에 하기 국어강습소 졸업생들을 비롯해 우리말 연구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잘 아는 주시경 선생이 있었다. 이들은 기울어가는 국운을 한탄하며 겨레 말글을 지키고 살려야 할 필요성에 공감했다. 이 자리에서 ‘국어연구학회’가 탄생했다.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한글학회가 지난 8월31일 창립 110돌을 맞았다. 국어연구학회는 이후 1911년 배달말글?음, 1912년 한글모, 1921년 조선어연구회, 1931년 조선어학회란 이름을 거쳐 1949년 지금의 한글학회로 명칭을 바꿨다. 이때의 개명은 남쪽의 한국과 북한이 ‘대한’과 ‘조선’으로 말을 달리 사용하는 분단 현실도 한 원인이었다(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 ‘한글 새소식’ 552호).한글과 우리 글자, 우리말, 국어의 수난사는 곧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였다. 그중에서도 1942년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은 우리말을 절체절명의 위기로 몰아갔다.그 발단은 다소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그해 여름 함경남도 홍원군에서 한 청년이 조선총독부의 지령인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붙잡혔다. 불순분자 혐의로 청년의 집을 수색하던 일제 경찰은 그의 조카가 2년 전에 쓴 일기장에서 “오늘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란 글귀를 찾아냈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는 일본어가 곧 ‘국어’였다. 일경으로서는 ‘국어인 일본어를 썼다’고 해서 벌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자 담임교사를 내사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실제론 일본어가 아니라 조선어를 사용했다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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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서(處暑)란 "더위, 물렀거라!"란 뜻이죠
기록적 폭염이었던 올여름 무더위도 다 끝났다. 어느새 아침저녁으로 가을 분위기가 제법 느껴진다. 절기상으론 이미 처서(處暑·8월23일)를 지났다. 처서는 한자로 ‘곳 처(處), 더울 서(暑)’다. 누구나 아는 절기 이름이지만, 이 말의 뜻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더위가 그친다는 뜻으로, 이맘때가 되면 무더위가 물러나고 선선한 기운을 느낀다는 데서 붙여졌다.‘처(處)’는 호랑이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處는 보통 처소(處所) 등 ‘곳’으로 새기는 게 대표적인 훈(訓)이다. 그런데 더위가 물러난다는 뜻의 말에 왜 이 ‘처’가 쓰였을까? 한자의 유래를 알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處는 호랑이()가 뒷발()을 꿇은 채 웅크리고 앉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본래 ‘(날쌔게 움직이는 호랑이가)멈추다, 머무르다’란 뜻에서 시작됐다(하영삼, ‘한자어원사전’).처서는 곧 ‘더위가 머무르다, 그치다’란 뜻이다. 순우리말로 풀면 “더위, 물렀거라!”쯤 되는 셈이다. 處는 여기서 다시 ‘머물러 있는 곳’이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돼 거처, 처소 등을 나타내는 말로도 쓰이게 됐다. 말이나 행동이 경솔한 사람을 가리켜 “채신머리없게 굴지 마라”라고 한다. ‘채신머리없다’는 ‘채신없다’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이 말도 한자 處와 관련이 있다.어근 ‘채신’은 지금은 완전히 굳어져 고유어처럼 쓰이지만 본래 ‘처신(處身)’이 변한 말이다. ‘처신’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져야 할 몸가짐이나 행동을 말한다. 매우 부끄러울 때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이때의 ‘몸 둘 바’가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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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절'은 하루 아닌 6시간이죠
'낮'은 하루를 밤·낮으로 나눠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말하니 대략 12시간이다. 나절은 그 낮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안이다. 오전이나 오후 어느 한쪽의 낮을 가리켜 '한나절'이라고 한다. 6시간쯤 되는 셈이다.미·북 정상회담이 열린 6월12일. 오후 4시가 넘어가자 이들의 만남 결과를 전하는 소식들이 보도를 타기 시작했다. 그중 한 통신사와 한 방송사의 제목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140분 담판→화기애애한 오찬→역사적 서명 … 숨가쁜 한나절’ ‘트럼프·김정은, 역사를 만들었다 … 그들이 보낸 숨가쁜 반나절’.하룻낮>한나절>반나절로 줄어들어같은 시간을 전하면서 한 곳에선 한나절, 다른 데선 반나절이라고 했다. 한나절과 반나절은 다른 말이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옛날에는 시간 개념이 지금처럼 시, 분, 초로 세분화되지 않았다. ‘일상에서 활동하는 동안’을 어림잡아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생겨난 게 한나절이니 반나절이니, 한식경이니 일다경이니 하는 말들이다. 그중 한나절과 반나절은 유난히 헷갈려 하는 이들이 많다.한나절, 반나절에서 핵심어는 ‘나절’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나절은 어원이 확인되지 않은 말이다. ‘낮+알(파생접미사)’ 또는 ‘낮+절(折/切)’에서 변화한 것으로 추정만 할 뿐이다(고려대 한국어대사전). ‘낮’은 하루를 밤·낮으로 나눠 해가 떠 있는 동안을 말하니 대략 12시간이다. 그것을 ‘하룻낮’이라고 한다. 나절은 그 낮의 절반에 해당하는 동안이다. 오전이나 오후 어느 한쪽의 낮을 가리켜 ‘한나절’이라고 한다. 6시간쯤 되는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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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척'과 '엄지를 치켜들다'의 차이
'엄지척'도 제법 쓰인다. 국립국어원의 개방형 사전인 '우리말샘'에는 2016년 10월에 등재됐다. 하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사전에 등재된 표준어는 아니다.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회담이 지난 12일 열렸다. ‘역사적 만남’이었던 만큼 화제도 많았다. 그중 트럼프가 김정은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린 장면은 여러 해석을 낳았다. 그동안의 관계에 비춰볼 때 ‘파격적 행동’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동작은 상대방을 최고라고 치켜세우거나 잘했다고 칭찬할 때 나온다. 우리말과 관련해서도 생각할 거리가 있다.‘엄지를 치켜들다’가 가장 적절영어에서는 이를 ‘썸업(thumbs up)’이라고 한다.(외래어표기법으로 하자면 ‘섬업’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고 말맛도 없다.) 일상에서 자주 하는 동작이지만 아쉽게도 우리말에는 이를 나타내는 단어가 없다. 풀어서 설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형화된 표현이 없기 때문에 서술어가 중구난방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엄지를 올리고 있다.’ 이때 엄지를 단순히 ‘올린다’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엄지를 들다/세우다/들어올리다/치켜들다/추켜세우다/추어올리다’ 등 10여 가지 동사가 뒤섞여 쓰인다. 여기에 ‘들어보이다/세워보이다/치켜올려 보이다’ 등 ‘-보이다’ 동사가 결합하기도 한다.‘추키다’와 ‘치키다’는 의미상 거의 같은 뜻으로 바꿔 쓸 수 있는 말이다. 공통적인 의미는 ‘위로 올린다’는 것이다. 각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