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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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엉터리"와 "엉터리없다"는 같은 말이죠
지난 호에 이어 우리말 부정어 생략 현상을 좀 더 살펴보자. “그 사람 엉터리야.” 이때의 ‘엉터리’도 ‘엉터리없다’에서 바뀌었다. ‘엉터리’는 본래 ‘사물이나 일의 대강의 윤곽’을 뜻하는 말이다. “1주일 만에 겨우 일의 엉터리가 잡혔다”처럼 썼다. 그래서 이를 부정해 ‘엉터리없다’라고 하면 ‘정도나 내용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다’는 뜻이 된다. ‘엉터리없는 수작’ ‘엉터리없는 생각’처럼 쓴다.‘대강의 윤곽’을 뜻하던 말에서 의미 이동그런데 이 ‘엉터리없다’에서 부정어가 생략되고 의미 이동이 이뤄지면서 지금은 ‘엉터리’란 말 자체가 ‘엉터리없다’란 뜻을 갖게 됐다. 따라서 “네 말은 순 엉터리야”라고 하든지, “네 말은 순 엉터리없어”라고 하든지 같은 뜻이다. 문법적으로도 모두 허용된다.‘안절부절못하다’는 경우가 또 다르다. 흔히 “안절부절한 모습”이라고 한다. 또는 “안절부절하지 못한다”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틀린 말이다. 우리말에 ‘안절부절하다’란 말이 없기 때문이다. ‘안절부절’은 ‘초조하고 불안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을 뜻한다. 이 말은 특이하게 부정어가 결합한 ‘안절부절못하다’가 하나의 단어다. 활용할 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안절부절못하고~’ 식으로 써야 한다.전혀 합당하지 않을 때 “얼토당토않다”라고 한다. 이 말은 어원적으로 ‘옳+도+당(當)+하+도’로 분석된다. 이 역시 ‘얼토당토않다’가 한 단어라 부정어를 생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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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칠맞다"는 칭찬하는 말이에요~
지난 4월 치러진 삼성그룹 직무적성검사(GSAT)에서는 언어논리가 특히 어려웠다고 한다. 인터넷에는 ‘칠칠하다’ ‘서슴다’ 같은 생소한(?) 단어 앞에서 ‘멘붕’을 느꼈다는 후기가 잇따랐다. 이런 말은 낯설다기보다 우리말 용법의 허를 찌르는 사례라 할 만하다. 이들은 단독으로는 잘 쓰이지 않고 주로 ‘못하다/않다/없다’ 등 부정어와 어울려 쓰인다. 그러다 보니 본래 의미를 간과하게 된, 그러기 십상인 말이라는 점에서 그렇다.‘알차다’에서 ‘야무지다’로 의미 확대돼흔히 쓰는 용법을 토대로 원래 형태의 의미를 추리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사례들이다. SNS 등의 ‘일탈적 언어’ 사용에 익숙한 세대일수록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신문언어 등 규범어를 꾸준히 접했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였다. 생글 코너를 통해서도 몇 차례 다룬 내용이었다.‘칠칠하다, 서슴다, 탐탁하다, 심상하다, 아랑곳하다.’ 얼핏 보면 의미가 잘 안 떠오른다. 이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부정어와 함께 쓰는 말이라는 점이다. ‘칠칠하지 못하다, 서슴지 않다, 탐탁지 않다, 심상치 않다, 아랑곳없다.’ 이렇게 하고 보면 이들이 일상에서 흔히 쓰는, 아주 익숙한 말이라는 게 드러난다. 하지만 부정어를 떼어내고는 잘 쓰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그 의미가 퇴색해 기억에서 멀어진 것일 뿐이다.‘칠칠하다’는 본래 나무나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검고 칠칠한 머리’ 같은 표현에 이 말의 본래 쓰임새가 살아 있다. 물론 지금도 쓰는 말이다. 이 말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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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명간'은 한자어…'이른 시일 내'로 쓰면 쉽죠
지난 4월 26일 새벽 국회에서 ‘패스트트랙’을 놓고 여야가 대치하는 과정에서 ‘빠루’가 등장했다. 곧이어 포털사이트엔 ‘빠루’가 실시간검색(실검)에 올랐다. 이에 앞서 14일 치러진 삼성그룹 대졸공채시험 뒤에도 ‘칠칠하다’ ‘서슴다’ 같은 단어가 화제가 됐다. 신문들은 문제로 나온 낯선 낱말 앞에서 수험생들이 당혹스러워하던 분위기를 전했다.‘빠루-노루발못뽑이’ 둘 다 실패그런 사례는 많다. 지난 3월엔 ‘금명간’이 실검에 떠 주목을 받았다. 경찰에서 한 연예인의 구속 영장을 ‘금명간 신청한다’는 보도가 나온 뒤였다. ‘금명간’이 뭐지? 네티즌에게 이 말이 생소했던 모양이다.우리말을 둘러싼 이런 관심은 두 가지 상반된 화두를 던진다. 하나는 우리말을 대하는 인식이 사회적 화제가 될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니, 이런 말을 잘 모르나?’ 하는 안타까움도 묻어난다. 이런 사례는 우리말을 살찌우기 위해 필요한 언어정책 방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사한다.이들은 사실 오래전부터 써오던 익숙한 말이다. 하지만 어떤 연유에서든 지금은 덜 쓰는 말이 됐다. 왜 그렇게 됐을까? 지렛대 원리로 못을 뽑는 도구인 ‘빠루’는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영어로는 ‘크로 바(crow-bar)’다. 까마귀 발을 닮았다 해서 그런 말이 생겼다. 이걸 일본에서 뒤의 ‘바’만 따다 ‘바루(バ-ル)’라고 적었는데, 한국으로 넘어오면서 된소리 ‘빠루’가 됐다. 원어에서 멀어져 왜곡된 형태로 자리잡은 것이다.당연히 순화의 칼날을 피해가지 못했다. 국립국어원에서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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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둘'은 어색한 수 읽기죠
일상의 말을 가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수 읽기가 하나 있다. 숫자를 “사십둘” 식으로 말하는 게 그것이다. ‘마흔둘’도 아니고 ‘사십이’도 아니다. 의외로 이런 경우가 흔하다. 나이를 말할 때도 ‘사십두 살’이라고 한다. ‘마흔두 살’ 또는 ‘42세’라고 해야 자연스럽다.10 이하 숫자는 고유어로 많이 읽어말 쓰임새의 이런 차이는 지난 호에서 살폈듯이 숫자를 익힌, 지난 시절의 학습경험 때문인 듯하다. 일제강점기 때 아라비아숫자가 보급되면서 한국인은 숫자 읽기에 처음 눈을 떴다. 당시 문자보급교재와 신문을 보면 지금의 수 읽기에 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①달걀 일곱 개 중에서 세 개가 깨졌으니 남은 것이 몇 개인가.(조선일보 <문자보급교재>, 1936년) ②시계가 네 시 치오.(동아일보 <한글공부>, 1933년) ③제일 회 성적으로 보면 연령으로는 일곱 살부터 사십구 세까지 있고…(조선일보 1929년 10월 4일자)10까지의 수에는 고유어 하나, 둘, 셋 등이 자연스럽게 붙었다. 10을 넘는 수는 한자어가 우세했다. 예문의 ‘세 개’ ‘네 시’ ‘일곱 살’과 ‘사십구 세’에서 이런 구별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10 이하 숫자에서 고유어 수사의 쓰임새가 활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계를 볼 때 ‘두 시 삼십 분’ 식으로 고유어 수사와 한자어 수사가 따로 자리잡은 배경도 유추할 만하다. 12시까지인 시 개념은 고유어로, 60까지인 분/초 개념은 자연스레 한자어 수사로 읽었을 것이다.수 읽기에서 이 같은 경향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령 1명, 2명이라 쓰고 이를 일 명, 이 명으로 읽기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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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보다 '스무 살'로 쓰는 게 좋아요~
우리가 흔히 쓰는 1, 2, 3 등 아라비아숫자가 일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게 언제쯤일까? 아래 예문을 토대로 추정하면 대략 100년이 채 안 될 것 같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펼친 문자보급운동이 계기가 됐다.① 다음 숫자를 차례차례 한 자씩 쓰고 읽는 법을 가르칠 것. 一 1, 二 2, 三 3 …. (조선일보사 <문자보급교재> 1936년)② 필산숫자: 1(一), 2(二), 3(三) …. 한문숫자: 일 一 (하나), 이 二 (둘), 삼 三 (셋) …. (동아일보사 <일용계수법> 1933년)100년 전 ‘1, 2, 3’을 ‘일, 이, 삼’으로 가르쳐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숫자를 읽는 방식이다. 아라비아숫자 1, 2, 3을 나열한 뒤 이를 읽고 쓰는 법을 한자 ‘일(一), 이(二), 삼(三)…’으로 가르쳤음을 알 수 있다. 우리말 수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수량을 셀 때 쓰는 말을 ‘기수(基數)’라 하고, 사물의 순서를 나타낼 때 쓰는 것을 ‘서수(序數)’라고 한다. 일, 이, 삼(한자어 계열) 또는 하나, 둘, 셋(고유어 계열) 등이 기수다.(서수는 한자어로 제일, 제이, 제삼..., 고유어로 첫째, 둘째, 셋째 식으로 한다.)아라비아숫자는 수사가 아니라 수를 나타내는 여러 부호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읽을지는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에선 일, 이, 삼(한자어) 또는 하나, 둘, 셋(고유어)으로 읽고 영어로는 원, 투, 스리다. 일어에서는 이치, 니, 산이며 중국에선 이, 얼, 싼이다. 한국인이 1, 2, 3을 보고 유독 일, 이, 삼, 즉 한자음으로 읽는 까닭은 100여 년 전 문자 보급 당시 그리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당시부터 ‘일~십’을 소리는 한자음으로 익히고 뜻은 고유어 ‘하나~열’로 새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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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양해는 '드리는' 게 아니라 '구하는' 거죠
지난 몇 회에 걸쳐 언어에 내재한 논리적 구조에 대해 살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왕왕 언어의 논리성을 무시한다. 이것은 지력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논리적으로 말하고 쓸 때 합리적·과학적 사고 능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반대로 합리적이며 과학적인 사람이 말을 비논리적으로 할 까닭이 없는 이치와 같다.“양해 말씀 드립니다”는 의미상 성립 못 해“재판 결과 혹은 법관의 인사 문제는 삼권분립을 훼손할 소지가 있어 청원 답변에 한계가 있다는 점 거듭 양해 말씀 드리면서 답변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지난 3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청원에 답변하는 원고(청원답변 79호)가 올라왔다. 여기에도 이치에 맞지 않는, 어색한 곳이 하나 있다. ‘양해 말씀 드리면서’ 부분이 그것이다.‘양해’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 이 말을 썼다면 말하는 이가 어떤 문제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 된다. 예문은 정부가 국민에게 말하는 상황이다. 국민이 양해할 일을 정부가 한 꼴이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다.‘말씀’은 남의 말을 높여 이를 때도, 자기의 말을 낮춰 이를 때도 쓴다. 양쪽으로 다 쓸 수 있다. 예를 들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에서는 ‘남의 말’을 높인 주체존대 문장이다. “제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에서는 ‘자신의 말’을 낮춘 상대존대에 쓰였다. “철수야, 선생님한테 꼭 말씀드려라”에서는 화자가 아니라 철수를 낮춘, 객체존대형이다.그러면 ‘드리다’의 경어법상 정체는 뭘까? “철수가 동생 영희한테 저녁을 차려주었다”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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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나오셨습니다"는 사물을 높인 잘못된 말
우리말에서 ‘되다’의 유용성은 매우 크다. 활용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남용하는 경우도 많다. 지난 호에서 살핀 “좋은 하루 되세요”가 그런 사례다. 동사 ‘되다’의 쓰임새는 역사적으로 확장돼 왔다. 1957년 완간된 한글학회 <조선말 큰사전> 당시만 해도 ‘되다’ 풀이에 ‘물건이 다 만들어지다’ 등 세 가지밖에 없었다. 1990년대 나온 국어사전들에서는 열 가지가 넘는 풀이로 넓어졌다.‘-시’는 주어를 높이는 말…사물에는 안 써“5000원 되겠습니다” “다음 역은 서울역이 되겠습니다” 같은 표현은 괜찮을까? 어법에 틀리지 않는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되다’ 항목에 이들을 용례로 올리고 있다. ‘되다’는 어원적으로 ‘다(如)’에서 온 말이다(김민수 편, 우리말 어원사전). 쓰임새가 많이 확장됐다 해도 그 본질은 벗어나지 않는다.하지만 “5000원 되시겠습니다” “다음은 서울역이 되시겠습니다”라는 말은 곤란하다. 이런 용법은 우리말 경어 체계를 흔들어 놓는다. 사물존대이기 때문이다. 우리 경어법은 크게 나눠 주체존대, 객체존대, 상대존대 방식이 있다. “커피 나오셨습니다”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나오셨습니다’의 ‘-시’는 주체를 존대하는 데 쓰는 어미다. ‘선생님께서 오시었다’처럼 서술어미 앞에 온다고 해서 선어말어미라고 한다. 문장의 주체가 말하는 이보다 높을 때 이 ‘-시’를 사용한다. ‘커피(가) 나오셨습니다’이니 ‘커피’를 높인 셈이다. 사물을 존대할 수는 없으니 이 표현이 어법에 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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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세요"는 문법 어긋나도 흔히 쓰죠~
10여 년 전 제주시에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가장 친절한 전화 인사말이 무엇인지 조사한 적이 있다. “좋은 하루 되세요”가 단연 1위로 꼽혔다. 몇 해 전엔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학교 인사말로 “사랑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를 정하기도 했다. 굳이 이런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말을 일상에서 자주 쓴다. 동시에 이 말이 우리 어법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 지도 꽤 오래 됐다. 논란의 핵심은 ‘좋은 하루’가 ‘되다’와 결합할 수 있느냐에 있다.문법에 어긋나지만 일상적으로 많이 써이 말은 우리말의 규범 용법과 현실적 언어 사용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대표적 사례다. 우선 순수하게 어법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좋은 하루 되다’는 곰곰이 생각하면 확실히 어색하다. 누가 누구한테 무엇이 되라는 것일까?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말이다.‘물이 얼음이 되다’라고 한다(동사 ‘되다’는 다른 용법도 많지만 이 표현이 전형적인 쓰임새다). 즉 ‘A가 B(가) 되다’ 꼴인데 이런 문장 형태를 문법적으로는 보문이라 한다. 이때 B를 보어라 하고, A와 B는 동격 구조를 이룬다. 그렇다면 철수한테 ‘좋은 하루 되세요’라고 하면 ‘철수=좋은 하루’가 돼야 하는데 이런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표현이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은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되다’를 무분별하게 남용한 셈이다. 분명 쓰는 말이긴 하되 과학적으로, 이치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물론 말이란 항상 논리적으로만 따질 일은 아니다. 방송에서 이 말을 썼다면 이는 “시청자 여러분, 오늘 하루가 (당신에게)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rd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