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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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바뀌었다'를 '바꼈다'로 줄여 쓰는 건 잘못
“전화번호가 OOO-××××로 바꼈어요.” “그는 그녀와 중학교 때부터 사겼다고 한다.” “그 여자는 내 말에 콧방귀만 꼈다.” 이런 말에는 공통적인 오류가 들어 있다. ‘바꼈어요, 사겼다고, 꼈다’가 그것이다. 각각 ‘바뀌었어요, 사귀었다고, 뀌었다’를 잘못 썼다.한글 모음자에 ‘ㅜ+ㅕ’ 없어 더 이상 줄지 않아이들의 기본형은 ‘바뀌다, 사귀다, 뀌다’이다. 공통점은 어간에 모두 모음 ‘ㅟ’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뒤에 모음 어미 ‘-어’가 붙을 때 줄어들지 않는, 우리말의 독특한 모음 체계 한 가지를 보여준다.얼핏 보기에 ‘바뀌+어→바껴’로 줄어들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모음끼리 어울려 ‘-여’로 바뀌는 것은 어간 ‘이’와 어미 ‘-어’가 결합할 때다(한글맞춤법 제36항). ‘가지어→가져, 견디어→견뎌, 막히어→막혀’ 같은 무수한 말들이 모두 그렇게 줄었다. 그러면 예의 ‘바뀌다, 사귀다’ 등에 어미 ‘-어’가 어울리면 어떻게 바뀔까? ‘~이어→~여’의 원리를 적용하면 ‘ㅟ어→(ㅜㅕ)’, 즉 ‘바(꾸ㅕ), 사(구ㅕ)’쯤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모음 체계에는 이를 나타낼 글자가 없다. 컴퓨터 자판으로도 조합이 안 돼 두 글자로 써야 할 판이다.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당시부터 없던 것이다. 한글 자모는 자음 14개, 모음 10개로 24자다. 모음만 보면 ‘아, 야, 어, 여, 오, 요, 우, 유, 으, 이’이다. 이 10개 모음자로 적을 수 없는 소리는 두세 개를 합쳐 적는데, 그것은 ‘애, 얘, 에, 예, 와, 왜,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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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비튼 '야민정음', 파괴냐 진화냐
‘야민정음’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지난 2월 식품기업 팔도에서 한정판으로 선보인 ‘괄도네넴띤’이 논란을 증폭시켰다. ‘팔도비빔면’을 비슷한 형태의 다른 글자로 바꿔 내놨다. 이 작명이 마케팅에 성공하면서 화제가 되자 한글 파괴 비판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사물 모양 통해 한글 익혀…야민정음의 원조 격야민정음은 기존의 말을 비슷한 형태의 다른 표기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90도 또는 180도 뒤집거나 압축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다. 멍멍이를 ‘댕댕이’, 귀엽다를 ‘커엽다’ 식으로 바꾼 게 대표적 사례다. 그런데 우리 글자를 이런 식으로 푼 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100여 년 전 한글을 대중적으로 보급할 때도 야민정음의 아주 먼 원조격 학습법이 있었다.‘세 발 가진 소시랑은 ㅌ자라면, 자루 빠진 연감개는 ㅍ 되리라//지겟다리 ㅏ자를 뒤집음 ㅓ자, 고무래 쥐고 보니 ㅜ자가 되고….’(소시랑은 쇠스랑의 방언으로 갈퀴 모양의 농기구. 연감개는 ‘연(鳶)+감개’로 연줄을 감는 도구인 얼레를 말한다. 가운데 자루를 박아 만든다. 고무래는 밭일 할 때 쓰는 ‘丁(정)’자 모양의 농기구. 당시 일상어가 지금과 많이 달랐다는 것도 참고로 알아 둘 만하다.)1933년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한 <한글공부>(이윤재 저)에 실린 ‘문맹타파가’다. 당시 우리 민족 2000만 명 중에 80%가 문맹이었다. 한글을 보급하던 초기에 한글을 형상(생김새)으로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사물의 모양에 한글을 대입시켰다. 여기서 한 번 더 응용하면 모양을 본떠 만드는 야민정음 방식과 크게 다를 게 없다.한글의 다양한 변신…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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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때문이다'를 남발하면 글이 허술해져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글쓰기는 사고력과 논리력을 키워주는 훌륭한 도구다. 바꿔 말하면 모든 글은 논리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사고의 깊이가 더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글쓰기에서 이런 과정은 어휘 선택에서부터 문장 구성, 문장들의 전개 과정 등 하위요소들을 통해 드러난다.인과관계 따져 엄격히 써야 효과적그중에서도 대놓고 이 논리성을 요구하는 게 있다. 인과관계 표현이 그것이다. 대표적인 게 ‘때문이다’ 구문이다. ‘탓이다/덕분이다/여서다’ 같은 서술 용법도 같은 범주에 있는 말들이다. ‘덕분’(긍정 의미)과 ‘탓’(부정 의미)의 쓰임새를 달리 하는 것은 어휘적 차원에서의 구별이다. 문장론적 차원에서는 문장의 구성과 전개 과정에서 인과관계 구문의 성립 여부를 살펴야 한다. 이들을 자칫 남발하다 보면 글의 흐름을 어색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를 들어보자.“국내 기업의 ‘탈(脫)한국’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다. 각종 규제와 높은 인건비로 투자 매력이 떨어진 한국을 떠나 해외에 둥지를 트는 기업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찬찬히 읽다 보면 ‘늘고 있기 때문이다’에서 글의 흐름이 걸릴 것이다. ‘때문이다’는 어떤 일의 원인이나 까닭을 나타내는 말이다. 앞에서 ‘탈한국 가속화’를 언급했으면 뒤에 그 원인이나 배경이 나와야 자연스럽다. ‘해외에 둥지를 트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것은 ‘탈한국 가속화’를 달리 표현한 것일 뿐 같은 얘기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풀어 설명한 것이다. 서술어를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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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면서'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전혀 달라 져요
“그는 1961년부터 명성여고 야간부 교사로 재직했다. 이때부터 그는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는 시를 쓰면서 대표적인 저항시인의 면모를 보였다. 군(軍) 시절 앓았던 간디스토마가 재발하면서 1969년 39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껍데기는 가라>로 잘 알려진 시인 신동엽이 세상을 떠난 지 올해 50주년이다. 그를 소개한 이 대목은 얼핏 보면 딱히 꼬집을 데 없는, 완성된 글이다. 하지만 곰곰 뜯어보면 거슬리는 데가 있다.두 개 동작이 동시에 일어날 때 쓰던 말간디스토마가 ‘재발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 표현이 어딘지 어색하다. ‘-면서’의 사전적 용법은 ‘두 가지 이상의 움직임이나 상태 따위가 동시에 겸하여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표준국어대사전). 이 풀이의 핵심은 ‘두 가지 동작이 동시에 이뤄짐’에 있다. “두 사람은 악수를 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같은 게 전형적인 쓰임새다.‘재발하면서’가 쓰인 문맥은 좀 다르게 읽힌다. ‘간디스토마가 재발해 결국 세상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두 동작은 시간차가 있으며 인과관계에 놓여 있다. 문장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그런 데서 연유한다. 독자에 따라 비문으로 보기도 할 것이다.최근 이런 표현이 넘쳐난다.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독자들도 무심히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를 어법의 변화로 봐야 할까? 아니면 잘못 쓰는 말이므로 적극적으로 바꿔 써야 할까? ‘-면서’는 두 가지 이상의 동작이나 상태를 겸하여 나타내는 것이 원래의 전형적 용법이다. ‘책을 주면서 말했다’ ‘사나우면서 부드러운 데가 있다’ 같은 게 그 예다. 1961년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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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지않다'는 시간, '멀지 않다'는 거리에 써야죠
‘아가 아가 우지마라, 비야 비야 오지 마라, 저기 가서 노자….’ 1930년대 암울하던 일제치하에서 우리 국민을 일깨운 것은 브나로드운동이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주도한 이 계몽운동으로 비로소 한글의 대량 보급이 가능해졌다. 당시 문자보급 교재로 쓰인 <한글공부>(1933년 동아일보사)를 보면 우리말의 변천 과정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 많다. 위의 구절도 그런 사례 중 하나다.‘머지않아’는 한자어 ‘불원간’과 같은 뜻우선 눈에 띄는 게 ‘우지마라, 오지 마라, 노자’ 같은 말이다. 각각 ‘울다, 말다, 놀다’가 활용한 모습이다. 모두 ‘ㄹ탈락 용언’인데 현행 맞춤법에 따른 표기와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ㄹ탈락 용언은 활용할 때 어미 ‘-네, -세, -오, -ㅂ니다’ 앞에서 ㄹ받침이 탈락하는 게 원칙이다(한글맞춤법 제18항). 뒤집어 말하면 ‘울다’ ‘놀다’는 어미 ‘-지/-자’ 앞에서 어간이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울지’ ‘놀자’가 현행 표기 규범인데, 당시만 해도 이를 ‘우지’ ‘노자’로 적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역설적으로 예전부터 ‘ㄹ받침 용언’이 ‘ㅈ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 ㄹ받침이 탈락하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널리 알려진 대중가요 “홍도야 우지마라~”의 표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하지만 규범상으론 ‘울지 마라’가 바른 표기다.이런 ㄹ탈락 현상이 예외적으로 굳어져 단어로 인정된 게 있다. ‘마지못하다(←말+지+못하다)’ ‘마다하다(←말+다+하다)’ ‘머지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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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째'는 차례…수량 말할 땐 '열둘째'죠
헷갈리는 수의 세계에 조금 더 깊이 들어가보자. “왼쪽에서 (열두째/열둘째)에 있는 사람이 나야.” “이번 시험은 만점자가 많군. 이 답안지가 벌써 (열두째/열둘째)야.” 두 문장에 쓰인 ‘열두째’와 ‘열둘째’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답부터 말하자면 첫 문장은 ‘열두째’, 둘째 문장은 ‘열둘째’라고 해야 한다.둘째, 셋째, 넷째는 차례.수량 아울러 써‘열두째’는 맨 처음에서 열두 번째라는 뜻이다. 차례, 순서를 말한다. “위에서 열두째 줄을 읽어 보아라”처럼 쓴다. 이에 비해 ‘열둘째’는 열두 개째란 뜻이다. 지금까지 모두 해서 몇 개째임을 말한다. “이 라인에서 발견된 불량품이 오늘만 벌써 열둘째다” 식으로 쓴다. 표준어 규정 제6항 얘기다.말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음이 달라지거나 줄어들어 형태에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제6항은 발음 변화에 따른 표준어 사례를 담았다. 두 개의 비슷한 발음 중 하나는 버리고 다른 하나만을 표준어로 삼았다. 단수표준어의 사례다.예전엔 ‘두째, 세째’와 ‘둘째, 셋째’를 구별해 썼다. ‘두째, 세째’는 차례를 나타낼 때, ‘둘째, 셋째’는 수량이나 개수를 나타낼 때 썼다. 하지만 언어 현실에서 이 같은 구별이 쉽지 않고 다소 인위적인 측면도 있어 이를 ‘둘째, 셋째’로 통합했다(네째/넷째도 넷째로 통일). 따라서 지금은 ‘둘째, 셋째, 넷째’가 차례와 수량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쓰인다. 바꿔 말하면 우리말에 ‘두째, 세째, 네째’ 같은 말은 없다는 얘기다.하지만 예외가 있다. 십 단위 이상에서는 ‘열두째, 스물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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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너 명'이 옳고 '세네 명'은 틀리죠 ~
우리말 수의 세계는 들여다볼수록 오묘하다. 그동안 ‘맞춤법 바로 알기’를 통해 우리말 수사에 한자어 계열과 고유어 계열이 있다는 것을 살펴봤다. 하나, 둘, 셋 등이 고유어 수사고 일(一), 이(二), 삼(三) 같은 게 한자어 수사다. 고유어 수사는 관형어로 쓸 때 ‘한, 두, 세’ 식으로 또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더 복잡하다. 뒤에 오는 단위명사가 무엇이냐에 따라 ‘서 말’과 ‘석 자’ ‘세 명’ 식으로 구별해 쓰기도 해야 한다.서 돈, 서 말은 돼도 석 돈, 석 말은 안 써표준어규정 17항은 이들을 구별하는 까닭을 담고 있다. 요약하면, ‘의미는 같되 비슷한 발음으로 몇 가지가 쓰일 경우 그중 더 널리 쓰이는 하나를 표준어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선택된 게 ‘돈, 말, 발, 푼’ 앞에서는 ‘서-’다. ‘세-/석-’은 쓰지 못한다. ‘냥, 되, 섬, 자’ 앞에서는 ‘석-’을 쓰고 ‘세-’는 버렸다. ‘서-’는 당연히 못 쓴다. ‘넷’의 관형형인 ‘너-’와 ‘넉-, 네-’를 구별해 쓰는 요령도 같다. ‘돈, 말, 발, 푼’ 앞에서는 ‘서-, 너-’가, ‘냥, 되, 섬, 자’ 앞에서는 ‘석-, 넉-’이 주로 쓰이기 때문이다.그 외의 단어가 올 때는 어떻게 될까? 마찬가지로 무엇이 더 널리 쓰이는지를 보면 된다. 예컨대 ‘(보리) 서/너 홉’, ‘(종이) 석/넉 장’과 같이 쓸 수 있다. ‘세/네’는 비교적 널리 통용된다. 따라서 이를 ‘세/네 홉’, ‘세/네 장’이라 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든 단위명사를 분류해 제시할 수는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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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장광설'은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이죠
말의 세계는 깊고도 오묘하다. 별의별 단어들이 다 있다. 지난 호들에서 살핀 ‘주책’ ‘엉터리’ 등은 아예 뜻이 반대로 바뀌어 쓰이는 사례다. 세월이 흐르면서 말의 의미와 쓰임새가 달라지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장광설’도 그중 하나다. 쓸데없이 장황하게 말을 할 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고 한다.유창한 부처님 설법 뜻하던 ‘장광설’인류 역사에서 장광설을 가장 잘 늘어놓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석가모니다. 그는 이 말이 태어나게 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사연을 알아보기 전에 짧은 문답풀이를 하나 해보자. ‘천동설, 감언이설, 대하소설, 성선설, 횡설수설, 장광설.’ 모두 ‘-설’로 끝나는 복합어다. 이 중 특이한 ‘-설’이 하나 있다. ‘장광설’이다. 길게 늘어놓는 말을 가리키니 ‘말씀 설(說)’을 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혀 설(舌)’자다. 나머지는 모두 ‘말씀 설’이다.그 앞에 ‘긴 장(長), 넓을 광(廣)’이 붙었다. ‘길고도 넓은 혀’란 뜻이다. 여기에서 ‘길고 줄기차게 잘하는 말솜씨’란 의미가 나왔다. 이 장광설은 석가모니의 신체적 특징 중 하나였다고 한다. 석가모니의 장광설은 중생을 계도하는 진실한 설법을 상징하는 말이었다. 중국 북송 때 최고 시인인 소동파가 남긴 시구 ‘溪聲便是長廣舌…’에 본래 의미의 장광설이 나온다. ‘계곡 물소리가 곧 부처의 유창한 설법이네…’란 뜻으로, 폭포소리에서 얻은 깨달음을 담은 표현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이 말이 일상의 단어로 자리 잡으면서 원래 의미가 퇴색했다. 대신에 ‘길고 지루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