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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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사즉생이 사즉생으로 와전된 까닭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얼마 전 임원들에게 “삼성다운 저력을 잃었다. ‘사즉생’의 각오로 과감하게 행동할 때”라며 ‘독한 삼성인’으로 거듭날 것을 당부했다. 삼성 전 계열사 임원 2000여 명을 대상으로 이달 말까지 진행하는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 자리에서다. 반도체를 비롯해 TV, 가전, 스마트폰 등 주력 사업 전 부문에서 시장점유율이 하락하고 있는 가운데 나온 비상 선언인 셈이다. ‘死卽生’은 틀린 말…‘死則生’이 맞아그의 발언은 곧바로 언론의 대대적 보도로 이어지면서 ‘사즉생’도 함께 화두로 떠올랐다. 이 말은 ‘죽기로 마음먹으면 산다’는 뜻으로, 어떤 일에 대해 각오가 아주 대단함을 이를 때 쓴다. 애초 이순신 장군이 임전무퇴의 각오를 다지며 쓴 말이다. 현대에 와서는 정치 지도자나 기업 CEO들이 눈앞에 닥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종종 인용한다.주목해야 할 것은 의외로 이 말의 정체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대부분 ‘사즉생(死卽生)’으로 쓰지만, 이는 ‘사즉생(死則生)’을 잘못 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서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즉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으리라”라고 한 데서 따온 말이다. 이를 줄인 게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다. ‘필사(必死)’는 “죽을힘을 다함”이다. 그래서 ‘필사적’이라고 하면 “죽음을 각오할 정도로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원전이 있는 말이라 원전 그대로 써야 한다.이 표현은 이순신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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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 방지법'에서 엿보는 우리말의 그늘
“부모님 건강히 살아 계시는데 제사상을 준비하는 호래자식하고 똑같다.” 탄핵 정국 와중에 한 유명 인사 입에서 튀어나온 ‘호래자식’이 한동안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이는 ‘배운 데 없이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사전 풀이로 보면 욕은 아니지만 좋은 말도 아니다. 게다가 그 형태도 호래자식, 호로자식, 후레자식, 호노자식 등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 말의 정체는 무엇일까?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말의 속살이자 그늘을 엿볼 수 있다.후레자식은 ‘홀의 자식’이 변한 말2018년 국회에 발의된 특이한 법안 가운데 ‘불효자 방지법’이란 게 있었다. 자녀가 부모한테서 재산을 상속받고도 부양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학대하는 패륜 행위를 할 경우 증여 재산을 반환하도록 하는 내용이 골자다. 법을 따로 제정하는 것은 아니고 민법의 관련 조항을 바꾼 개정안을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효를 강제한다는 반론에 부닥쳐 아직 법으로 제정되지는 않았다.이 법안은 원래 ‘호로자식 방지법’이란 더 희한한 명칭으로 불렸다. 개정안을 발의한 민◇◇ 국회의원이 처음 제안한 2015년에 관련 정책 토론회를 열면서 쓴 용어가 통용됐다. ‘호로자식’이라는 어감이 너무 좋지 않다는 지적이 나오자 명칭을 ‘불효자 방지법’으로 바꿨다. 일명 ‘불효자 먹튀 방지법’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역시 독특하기는 마찬가지다.하지만 국어사전에 ‘호로자식’이란 말은 없다. 단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후레자식(후레아들)’, ‘호래자식(호래아들)’만 허용했다. &ls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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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말 '가품', 선택받은 말 '짝퉁'
지난해 말부터 이어지고 있는 ‘가품’ 논란이 패션·유통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작년 12월 국내 패션 플랫폼 1위 업체인 무신사에서 패딩 혼용률이 허위로 기재된 사실이 알려졌다. 올해 초엔 국내 1위 이커머스 쿠팡에서 ‘짝퉁’ 영양제 사건이 터졌다. 이들 업체는 소비자 신뢰 제고를 위한 ‘정책’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무신사 등은 입점 브랜드에 대한 전수조사에 나섰다. 롯데온, SSG닷컴, 네이버 등 국내 대기업 이커머스사도 ‘위조품’으로 판명되면 대금 정산을 보류하는 ‘정책’을 펴기로 했다. 100년 역사 ‘가품’은 사전에 없어유통가에 ‘짝퉁’ 시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우리 관심은 이들 논란을 전하는 저널리즘 언어에 있다. 우리말의 의미·용법과 관련해 주목할 말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가품’ ‘짝퉁’ ‘위조품’ 같은 말이 눈에 띈다.‘가품(假品)’이란 말이 요즘 많이 쓰인다. ‘거짓 가(假)’ 자를 썼으니 가짜 상품이란 뜻일 것이다. 하지만 국어사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단어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에 비해 ‘진품(眞品)’은 말 그대로 ‘진짜인 물품’을 가리킨다. ‘정품(正品)’이란 말도 쓴다. 진짜거나 온전한 물품이란 뜻이다. 이들은 사전에 올라 있다. ‘거짓 가(假)’를 쓴 ‘가품’이 ‘참 진(眞)’ 자를 쓴 진품에 상대하는 말이니 그럴듯한데, 아쉽지만 <표준국어대사전>은 다루지 않았다. 그 대신 가짜 물품을 가리키는 말로 ‘모조품’이 있다. 다른 물건을 본떠 만든 물건이란 뜻이다. 그림이면 ‘모사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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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의 힘: '교각'은 '다리 기둥'
“1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안성 고속도로 ‘교각 붕괴 사고’의 원인을 놓고 다양한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제 오전 경기 안성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교각 상판 구조물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기도 안성의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교량이 무너지는 사고’가 났습니다.” 지난달 25일 경기 안성의 서울세종고속도로 공사 현장에서 교각 위 철근 구조물이 붕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언론들은 이 사건을 속보로 앞다퉈 내보냈다.‘교각 붕괴’와 ‘교각 상판 구조물 붕괴’언론사마다 사고를 조금씩 다른 말로 전하고 있는 게 눈에 띈다. 무너진 것이 교각인지, 교각 상판 구조물인지, 교량인지 제각각이다. 교각은 다리를 받치는 기둥을 말한다. 교각 상판 구조물이라면 다리 기둥, 즉 교각 위에 얹어놓은 보의 일종이다. 교량은 보통 완성된 다리를 가리킨다. 그러니 가장 가까운 표현은 교각 상판 구조물 정도일 것이다.‘교각’이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그런데도 정확히 쓰지 않아 정보전달에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통사고 기사에서 특히 그렇다. 지난해 12월 21일 충남 공주시 대전·당진고속도로에서 일어난 유조 차량 사고에서도 같은 오류가 반복됐다. 이 사건에서 고속도로를 달리던 탱크로리가 눈길에 미끄러지면서 다리 난간에 부딪혀 4000L가량의 기름이 유출됐다. 많은 언론이 이를 “교각에 부딪혀…” 식으로 표현했다. 다리 위를 달리던 차량이 ‘교각’에 부딪힐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교각 붕괴’와 ‘교각 상판 구조물 붕괴’는 전혀 다른 말이라 엄격히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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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처'는 '범정부'와 다른 말
“정부는 18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주재로 제6차 수출전략회의를 열고 ‘범부처 비상 수출 대책’을 발표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2월 보도자료를 내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범부처 비상 수출 대책’을 발표했다. 이틀 뒤인 20일엔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이 수출 동향 점검 회의에서 다시 “지난 18일 발표한 ‘범정부 비상 수출 대책’을 속도감 있게 이행하겠다”고 말했다.‘범부처’는 부처 내 각 부서를 아우름언론을 통해 전해진 정부 발표에는 주목할 만한 표현상 차이가 있다. 애초에 ‘범부처’ 대책으로 발표한 것을 나중엔 ‘범정부’ 대책이라고 했다. 맥락상 두 말은 같은 의미로 쓰였다.비상 수출 대책을 위해 정부의 한두 개 부처가 아니라 모든 부처가 함께 대응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범부처’와 ‘범정부’는 같은 말일까? 부처와 정부가 서로 다른 말인데, 범부처와 범정부가 같은 의미일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잘못 쓴 말이라고 봐야 한다.요즘 언론에서 ‘범부처’란 말을 자주 쓴다. ‘범정부’란 표현도 함께 나온다. “물가 안정을 위해 ‘범정부’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총리는 수해 대책을 위한 ‘범정부’ 차원의 노력을 당부했다.”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범정부’를 ‘정부의 전체를 아우름’으로,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는 ‘정부의 각 부처들을 하나로 아우름’으로 풀이한다. 즉 정부의 특정 부처나 일부 부처가 아니라 정부 각 부처를 두루 아우른다는 뜻이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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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당선자-당선인'에 담긴 공과 과
“앞으로 대통령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써주기를 바랍니다.” 2007년 12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명박 당선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언론사에 다소 이례적인 주문을 했다. ‘대통령직인수에관한법률’ ‘국회법’ 등에서 ‘당선인’이란 말을 쓴다는 점이 명분으로 제시됐다. 항간에선 그동안 별문제 없이 써오던 말을 바꿔달라는 인수위 요청에 다양한 해석과 함께 열띤 논란이 이어졌다. 그중에 ‘놈 자(者)’보다는 ‘사람 인(人)’을 쓰는 게 격이 좀 높아 보인다는 해석도 꽤 그럴듯하게 제시됐다. ‘-자’와 ‘-인’의 구별은 사회적 규정논란이 커지자 헌법재판소에서 의견을 제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헌재 결정과 관련해서는 ‘대통령 당선인’보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대로 ‘대통령 당선자’라는 표현을 써달라”고 언론에 요청했다. 당시 ‘이명박 특검법’ 헌법소원에 대한 결정을 내리면서 입장을 덧붙인 것이다. 어찌 됐건 인수위의 요청에 언론사들은 대부분 ‘당선인’을 받아들였다. 지금은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당선자 대신 당선인을 쓰는 게 관행으로 굳어졌다.이보다 앞서 우리나라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장애인에 대한 인권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 그전에는 ‘장애자’로 불렸다. 서울올림픽 때만 해도 공식 표기가 ‘장애자올림픽’이었다. 장애자란 말 자체에 비하하는 의미가 담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이 말을 낮춰 부르는 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새로 제시된 말은 ‘장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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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이모'를 위한 변명
예전에 <수상한 가정부>라는 SBS 월화드라마가 있었다. 이 드라마 4회에 다소 이례적 대사가 등장한다. 시장 아주머니들과 대화하는 장면에서 한 아이가 “어, 가정부 아줌마다”라고 말하자 그 엄마가 “가정부 아니랬지. 가사도우미라니까?”라고 고쳐준다. <수상한 가정부>는 제목에 사용한 ‘가정부’라는 말 때문에 방영 전부터 한국여성노동자회와 전국가정관리사협회로부터 비하적 표현이라며 거센 항의를 받았다. 방송사에서 이를 받아들여 제목 대신 드라마 대사를 통해 정정 방송을 한 셈이다. 2013년에 있었던 일이다.현실 언어와 규범 언어 간 세력 싸움지난 시절에 ‘식모’(남의 집에 고용되어 주로 부엌일을 맡아 하는 여자)라고 불리던 직업이 있었다. 산업화가 이뤄지고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 말이 파출부, 가정부, 가사도우미를 거쳐 요즘은 가사관리사에 이르렀다. 그러다 지난해 말 ‘이모’ 사태가 터졌다.△‘필리핀 이모’ 100명 입국 … 논란 딛고 순항할까?(2024년 8월) △신문윤리위, ‘필리핀 이모’ 표현 쓴 언론 11곳에 ‘주의’ 조치(2024년 11월) △서울 외엔 수요 없는 ‘필리핀 이모님’, 이달 시범 사업 종료 … 확대 가능할까.(2025년 2월)초고령사회 진입과 맞벌이 부부 증가에 따라 가사 노동 부담도 커지고 있다. 정부는 그 대책으로 지난해 8월부터 외국인 가사관리사 시범 사업을 펼쳤다. 국내 언론에선 초기 보도와 최근 보도에 미묘한 표현상 차이가 드러난다. ‘언어의 세력 다툼’인 셈이다.‘필리핀 이모’는 현실 언어를 반영한 표현이다. 석 달 뒤 신문윤리위원회에서 제동을 걸었다. 이 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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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은 왜 '전통시장'에 밀렸나
“설을 하루 앞두고 재래시장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입니다. 판매대에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은 물론 여러 종류의 수산물이 풍성합니다.” “설 연휴를 맞아 전통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명절을 준비하기 위해 시민들이 전통시장을 찾았습니다.” 지속적인 내수경기 침체에 계엄과 탄핵 정국까지 겹치면서 자영업자들은 ‘생계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민족 최대 명절로 불리는 지난 설엔 그래도 차례상을 준비하는 이들이 전통시장을 찾아 북적이는 모습을 보였다. 시대 변천 따라 ‘단어 인식’ 달라져두 방송사에서 전한 내용은 비슷했지만, 용어 사용에서 중요한 차이가 눈에 띈다. ‘재래시장’과 ‘전통시장’이 그것이다. 각각 제목으로 쓴 말도 마찬가지다. ‘설 대목 맞은 재래시장, 활기 가득’과 ‘설 연휴 전통시장 북적’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재래시장을 “예전부터 있어 오던 시장을 백화점 따위의 물건 판매 장소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전통시장’은 어찌 된 일인지 아직 올라 있지 않다.예전에 재래시장이라 부르던 말이 전통시장으로 바뀐 것은 이미 15년 전 일이다. 정부에서는 2010년 7월 1일부로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을 시행하면서 ‘재래시장’을 버리고 ‘전통시장’을 쓴다고 밝혔다. 재래시장이라는 용어가 낙후된 느낌이 든다는 상인들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재래’라는 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물론 ‘전통시장’이 법정 용어이자 공인된 말이지만 현실 언어에선 아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