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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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노숙인은 '이슬 맞고 자는 사람'을 말하죠
'노천'의 한자는 '이슬로(露)'이다. 이를 자칫 '길로(路)'로 착각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한데에 있어서 이슬을 맞고 하늘을 볼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니 절묘한 작법이다.지난 9월7일은 절기상 백로(白露)였다. 더위가 물러간다는 처서(處暑) 다음에 든 백로는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하는 때다. 곧이어 추분(秋分·9월23일)이 되면 이때부터 밤의 길이가 낮보다 길어진다. 백로는 글자 그대로 ‘희고 맑은 이슬’이라는 뜻이다. 이맘때가 되면 새벽녘 풀잎에 이슬이 맺힌 것을 볼 수 있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이슬이 맺히는 온도를 ‘이슬점’이라고 한다. 대기 온도가 낮아져 수증기가 응결하기 시작할 때의 온도다. 우리가 잘 아는 ‘어는 점(빙점)’, 즉 물이 얼기 시작할 때의 온도인 섭씨 0도가 되기 전이다.노숙은 순우리말로 ‘한뎃잠’노점상(길가의 한데에 물건을 벌여 놓고 하는 장사), 노숙인(길이나 공원 등지에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 노천극장(한데에 임시로 무대만 설치해 만든 극장)….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이런 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풀이에 힌트가 있다. 모두 ‘한데’와 관련돼 있다는 점이다.한데는 주위를 둘러봐도 가리거나 덮을 게 아무것도 없는 곳을 말한다. 즉 집 바깥인 것이다. 한자어로 하면 ‘노천(露天)’이다. 노천극장을 비롯해 노천카페, 노천강당, 노천탕 같은 게 있다. 모두 한데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노천’의 한자가 ‘이슬로(露)’라는 점이다. 이를 자칫 ‘길로(路)’로 착각하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한데에 있어서 이슬을 맞고 하늘을 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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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매점매석' 대신 '사재기'라고 쓰세요
얼마 전 살충제 파동으로 달걀이 품귀 조짐을 보이자 중간 유통상인들의 '사재기'가 불거지기도 했다. 사재기는 한자어 '매점매석'을 순우리말로 순화한 말이다.지난 호에선 ‘입도선매(立稻先賣)’에 담긴, 지난 시절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살펴봤다. 입도선매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말이 ‘매점매석(買占賣惜)’이다. 얼마 전 살충제 파동으로 달걀이 품귀 조짐을 보이자 중간 유통상인들의 ‘사재기’가 불거지기도 했다. 추석을 앞두고는 각종 제수용품의 사재기가 단속 대상이 되곤 한다. 사재기는 한자어 매점매석을 순우리말로 순화한 말이다.어려운 한자어에서 쉬운 우리말로조선 정조 때 연암 박지원이 지은 풍자소설 ‘허생전’에는 이 매점매석이 중요한 대목으로 나온다. 주인공 허생원은 남산골 다 쓰러져가는 초옥에서 글만 읽던 선비다. 부인의 삯바느질로 끼니를 이어가던 그는 부인의 성화에 못 이겨 ‘돈벌이’에 나선다. 도성 안 갑부에게서 1만 냥을 빌린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전국의 ‘길목’ 분석이었다. 경기도와 충청도가 갈리는 안성 땅에 주목한 허생원은 그곳에 터를 잡은 뒤 삼남(충청·전라·경상)에서 올라오는 과일류를 싹쓸이해 쟁여놓았다. 얼마 뒤 나라 안에 과일이 품귀를 빚자 그제서야 과일을 풀어 열 배 가격으로 되팔았다. 시쳇말로 ‘떼돈’을 번 것인데 그 수법이 바로 매점매석이었다.허생원은 “겨우 만 냥으로 나라 경제를 흔들었으니 이 나라가 얼마나 허약한지 알겠구나!” 하고 탄식했다. 박지원은 허생원을 통해 매점매석의 폐해와 함께 당시 보잘것없는 나라 경제를 비판하고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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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입도선매'는 살 때와 팔 때를 가려 써야죠
‘입도선매(立稻先賣)’는 지난 시절의 용어로, 궁핍한 농촌생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던 말이었다. 글자 그대로 ‘서 있는 벼를 먼저 파는 일’을 뜻한다. 예전에 돈에 쪼들린 소작농들이 벼가 여물기도 전에 헐값에 미리 판 데서 생겼다.우리 사회의 청년실업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오포세대’니 ‘고용절벽’ 같은 말은 이미 개방형 국어사전인 ‘우리말샘’(국립국어원 운영)에 올라, 여차하면 단어로 자리 잡을 태세다. 하지만 취업난 속에서도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 4차 산업혁명 분야 전공자들의 몸값은 날로 치솟고 있다고 한다.‘궁핍한 농촌’ 상징하던 말“미국 정보기술(IT) 대기업들이 한국 이공계 인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우수한 인재라고 판단하면 경력이 없어도 일단 입도선매하고 보는 식이다.”기업에서 미래산업을 이끌 고급 두뇌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때 쓰인 ‘입도선매’는 좀 묘한 단어다. 국어사전에서는 이 말을 ‘아직 논에서 자라고 있는 벼를 미리 돈을 받고 팖’으로 설명한다. 이 풀이는 입도선매하는 주체가 ‘파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 준다. 한자로는 ‘팔 매(賣)’자가 들어간 ‘立稻先賣’다.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의 한 대목이 그 용법을 잘 보여준다. “잘 여물었으면 제값을 받고 팔아야지 그렇게 ‘입도선매’ 모양으로 넘길 것이면, 무얼 바라고 공을 들입니까?”(표준국어대사전 용례)입도선매는 1960년대 박정희 정부에서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기 전까지 농촌경제에 극심한 폐해를 끼쳤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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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수재를 당했을 때는 '초토화'가 아니죠
초토화는 본래 화재를 당하거나 폭격 따위로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현장을 나타낼 때 적합한 말이다. 수재(水災)를 당했을 때는 ‘초토화’ 대신 문맥에 따라 ‘쑥대밭’이나 ‘아수라장’ 따위를 쓰는 게 좋다.한여름을 달구던 불볕더위도 한풀 꺾여 이제 아침저녁으론 제법 선선한 느낌이다. 처서(處暑·8월23일)를 앞두고 있으니 절기상으로는 이미 가을에 접어들었다. 올여름은 늦게까지 이어진 장맛비로 지역에 따라 폭우가 쏟아져 곳곳에서 물난리를 겪기도 했다. 그럴 때 무심코 잘못 쓰기 쉬운 말 중에 ‘초토화’를 놓칠 수 없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충북지역 초토화.” “호우 피해로 초토화된 농경지.” “최악의 폭우로 기록된 충북 청주지역은 하루에만 300㎜에 가까운 집중호우가 내리면서 초토화됐다.”‘초토’는 불에 타 그을린 땅태풍으로 폭우가 휩쓸고 지나가거나 집중호우로 홍수가 져 큰 피해를 입었을 때 흔히 ‘수마(水魔)가 할퀴고 지나가다’란 말을 쓴다. 그리고 거기에 습관적으로 따라붙곤 하는 말이 ‘초토화(焦土化)’다. 하지만 이 말은 물난리로 피폐해진 곳에 쓰기엔 적절치 않은 점이 있다. ‘초토(焦土)’란 글자 그대로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을 말하기 때문이다. 한자 焦가 ‘(불에)그을리다, 불타다’를 뜻한다. 흔히 하는 말 중에 ‘초미(焦眉)의 관심사’란 게 있는데, ‘아주 다급하고 중요한 관심사’라는 뜻으로 쓰인다. 눈썹(眉)에 불이 붙었으니(焦) 얼마나 소스라치게 놀랍고 애가 타는 상황일지 짐작이 간다.마찬가지로 초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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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 길잡이 기타
복더위 찌는 날은 무더위일까요, 강더위일까요
무더위는 ‘물’과 ‘더위’가 어울린 말이다. 물기를 머금은 더위, 즉 습도와 온도가 높아 끈끈하게 더운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오랫동안 비도 없이 불볕더위만 계속되면 ‘강더위’다. 이때의 ‘강-’은 한자말 강(强)이 아니라 순우리말이다.초복이 지나면서 한낮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이어지고 있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폭염특보가 내리고 불볕더위로 인한 피해도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복더위 찌는 날에 맑은 계곡 찾아가/ 옷 벗어 나무에 걸고 풍입송 노래하며/ 옥 같은 물에 이 한 몸 먼지 씻어냄이 어떠리.” ‘해동가요’를 펴낸 조선 영조 때 가객 김수장의 시조다. 여기에는 선조들이 즐기던 지혜로운 피서법이 담겨 있다. 이른바 ‘탁족(濯足)’이다. 맑은 계곡을 찾아 옥 같은 물에 발을 담그며 무더위를 잊는 탁족은 우리 민족에게 고래부터 내려온 ‘자연친화적’ 여름나기였다.무더위는 ‘물+더위’가 어울린 말‘탁족만리류(濯足萬里流)’란 중국 서진(西晉)의 시인 좌사가 쓴 시에 나오는 말이다. 만 리를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다는 뜻이다. 이 말에는 단순히 피서뿐만 아니라 대자연의 품에서 세속에 찌든 마음의 때까지 씻는다는 뜻이 담겼다. 김수장의 시조는 이 ‘탁족만리류’를 멋들어지게 읊어낸 작품이다. 시문에 자주 인용되는 이 말은 부채와도 ‘궁합’이 잘 맞는다. 고상한 선비들은 ‘탁족만리류’란 시구가 적힌 합죽선으로 시원한 계곡 바람을 일으켜 무더위를 쫓으면서 풍진세상을 함께 경계했다. 피서를 즐기면서 교훈도 담은 셈이다.푹푹 찌는 더위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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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얌통머리'는 '얌체'로 변신 중?
“에이~, 얌치머리 같으니….” “이 얌통머리야!” “이런 얌체를 봤나.” 이런 표현도 많이 쓰지만, 이 가운데 정상적인 표현은 ‘얌체’뿐이다. 나머지 둘은 불완전한 표현이다. 이들은 모두 한자어 ‘염치(廉恥)’에서 온 말이다.지난 호에서 ‘싸가지’가 쓰이는 용법에 관해 살펴봤다. 요약하면, “그 사람 싸가지야”라는 말은 어법적으로 허용된, 바른 어법이 아니다. 불완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싸가지 없다”라고 해야 하는데 뒤의 부정어를 생략한 채 ‘싸가지’를 의인화해 쓰는, 의미 변화 중에 있는 말에 불과하다. 이 ‘싸가지 없음’이 아주 심해지면 ‘밥맛없음’이 된다. 이때의 ‘밥맛’도 ‘싸가지’와 비슷한 쓰임새를 보인다.‘얌체’는 ‘얌통머리 없는 사람’‘밥맛’은 글자 그대로 ‘밥에서 나는 맛’ 또는 ‘음식이 입에 당기어 먹고 싶은 상태’를 나타낸다. ‘밥맛(이) 좋다’거나 ‘밥맛(이) 있다/없다’라고 한다. 그 가운데 ‘밥맛 없다’를 붙여서 ‘밥맛없다’라고 한 단어로 쓰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아니꼽고 언짢아 상대하기가 싫다’란 뜻이 된다. ‘밥맛’의 본래 의미를 잃고 새로운 말로 바뀌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는 입말에서 “걔 정말 밥맛이야”라는 말도 쓴다. 이때의 ‘밥맛이다’는 ‘밥맛없다’와 같은 뜻으로 쓰는 것인데, 이런 말은 아직 사전에 오르지 않았다. 원래 “밥맛없어”라고 할 것을 뒤의 부정어를 버린 채 변형된 형태로 쓰는 것이지만 아직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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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왕싸가지 밥맛'은 어디서 왔을까요?
‘싸가지’는 사전적으로 ‘싹수’의 사투리로 풀이된다. 싹수는 ‘어떤 일이나 사람이 앞으로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를 뜻한다. ‘싹수가 있다/없다/보인다/틀렸다’처럼 쓰인다.2003년 4월 어느날, 국회 본회의장에 한 국회의원이 흰색 면바지 차림으로 등장했다. 상의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남색 재킷에 라운드 티를 받쳐 입었다. 이날은 며칠 전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그가 의원선서를 하기 위해 처음으로 등원한 자리였다. 본회의장이 한순간 술렁였다. 곧바로 의원들 사이에서 “국민과 국회를 무시하는 행동”이라는 비난 소리가 터져나오면서 의원 수십 명이 퇴장했다. 국회의원 선서도 다음날로 미뤄졌다. 이른바 ‘빽바지 소동’으로 알려진 이 사건의 주인공은 지금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이다.‘싹수’의 방언이지만 의미 달라명쾌한 분석력에 달변까지 갖춘 그는 정계에서 은퇴한 뒤 요즘은 방송활동 등을 통해 유머와 여유를 함께 보여주면서 두터운 팬층을 자랑하고 있다. 그에게 과거 따라다니던 별명이 ‘싸가지’다. 2005년 한 동료 의원이 그에게 ‘저렇게 옳은 얘기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하는 재주를 어디서 배웠을까’라고 공개편지를 보내면서 ‘싸가지 논쟁’에 휩싸이기도 했다.‘싸가지’는 우리말에서 특이한 위치에 있는 말이다. 그것은 그동안 살펴본 의미 변화의 한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버릇이 없거나 예의범절을 차리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일상에서 그냥 ‘싸가지’라고도 하는데 이는 온당한 말일까? “걔 싸가지야” “이런 싸가지를 봤나”처럼 쓰곤 한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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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칠칠맞은 사람'은 칭찬하는 말이에요
‘칠칠맞다’는 ‘칠칠맞지 못하다’와 의미가 반대이므로 반드시 구별해서 써야 한다. ‘칠칠맞지 못하다/칠칠치 못하다’를 쓸 자리에 이를 쓰면 의미상 틀린 말이다.지난 몇 회에 걸쳐 부정어와 어울려 쓰이는 말과 함께 우리말의 의미변화 사례들에 관해 살펴봤다. 그중에서도 부정어가 생략되는 현상은 특이한 용법이라 할 만하다. ‘주책없다/주책이다’ ‘엉터리없다/엉터리다’ ‘안절부절못하다/안절부절이다’ ‘우연하다/우연찮다’ 같은 게 그런 범주에 드는 말들이다. 일상에서 흔히 쓰는 다음 같은 표현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주로 ‘칠칠맞지 못하다’로 쓰여“에이, 칠칠맞은 사람 같으니….” “너 왜 그리 칠칠맞냐?” “그는 행실이 좀 칠칠맞아.” 이게 무슨 말일까? 문맥으로 봐서는 누군가를 탓하는 상황인 것 같다. 그런데 상대방이 만약 ‘칠칠맞다’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매우 흡족해할 만한 말이다.‘칠칠맞다’를 이해하려면 우선 ‘칠칠하다’를 알아야 한다. ‘칠칠하다’는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단정하다’ ‘성질이나 일 처리가 반듯하고 야무지다’란 뜻이다. 애초 나무나 풀, 머리털 따위가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검고 칠칠한 머리’ 같은 표현에 이 ‘칠칠하다’의 본래 뜻이 남아 있다. 물론 지금도 그리 쓰이는 말이다.이 말이 의미가 확대돼 ‘단정하고 야무지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는 주로 ‘못하다, 않다’ 따위의 부정어와 함께 쓰인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ls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