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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격교육, 효율성 높지만 창의성·정서 함양 어려워
1997년 발간된 만화 에서는 모든 것이 원격으로 이뤄지는 학교가 등장한다. ‘서기 2021년 고등학교의 베티’ 편이다. 제트팩을 메고 날아다니는 베티에게 빨리 학교에 접속하라고 엄마가 소리친다. 베티는 아직 수업이 30초나 남았다고 대답하면서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는다. 1997년 예상하는 2021년의 학교는 이런 모습이었다. 불편한 진실2020년부터 거의 모든 나라에서 아치가 예상했던 원격수업이 구현됐다. 감염병에 대한 우려가 학생들을 집에 머물게 했다. 기술 덕분에 교육이 중단되지 않을 수 있었지만, 수업의 질과 모니터로 교사를 만나는 학생들의 주의력이 학교에서와는 달랐다. 교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물리적인 학교 공간에서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대학원생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학습에 대한 동기 부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고, 우울감을 느꼈으며 스트레스가 상승했다. 팬데믹 이전만 하더라도 디지털 기술이 비효율적인 교육제도에 대한 해결책으로 간주됐지만, 현실에서 원격수업은 다양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원격수업의 문제원격수업으로 나타난 직접적인 문제는 접근성이다. 디지털 학습이 가능하려면 컴퓨터와 인터넷 접근성이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미국 뉴욕시 공립학교의 3분의 1은 수업에 필요한 기술에 접근할 수 없었다. 원격 디지털 학습은 부유한 학생 및 학교와 그렇지 못한 집단의 격차를 고르게 해줄 것이라 약속했지만 현실에서는 정반대 상황이 펼쳐졌다. 게다가 아이들이 온라인으로 학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끊임없이 옆에서 봐줘야 했다. 아이를 맡길 형편이 되는 부모는 외부의 도움을 받았지만, 대다수 가정은 불가능했다. 공간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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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발전·환경변화 불구 대면활동 여전히 계속될 것
여러모로 앨빈 토플러의 미래 예측은 탁월했다. 1970년 출간한 는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책에서 토플러는 미래 충격을 ‘덜 성숙한 미래가 다가오면서 생기는 어지러운 방향감각’이라고 정의하면서 미래의 가장 중요한 질병이 될지 모른다고 예상했다. 동시에 그는 미래 충격의 유일한 치료법은 미래에 나타날 것들에 대한 명확한 개념이라고 의견을 밝히며 미래학자로서의 자신을 정당화했다.정보화 시대와 도시하지만 모든 예측이 맞아떨어진 것은 아니다. 그중 하나는 정보화 시대의 도래로 인해 도시화 추세가 약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1980)에서 상품의 손쉬운 선적이 도시의 제조업을 교외로 밀어냈듯이, 지식 전달이 한층 쉬워지면 정보 집약적 도시의 여러 산업도 비슷한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그 과정에서 컴퓨터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는 탁월한 예측도 곁들였다. 토플러는 정보화가 인구를 분산시킴으로써 사람들의 공간 경험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예측으로 규모가 작은 도시 및 시골 생활의 새로운 매력을 강조했다. 현실은 달랐다. 1970년대에도 미국의 도시 인구는 시골보다 증가 속도가 빨랐다. 게다가 출간 이후 20년간 뉴욕, 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을 포함한 많은 도시는 경제 부흥에 힘입어 도시화율이 74%에서 79%로 올랐다. 영국처럼 인구 증가율이 둔한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팬데믹과 도시토플러의 예측이 다시 거론된 계기는 팬데믹이었다.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강제했고, 많은 일이 사무실이 아닌 집에서 이뤄졌다. 코로나 이전 재택근무 비율은 알려진 바 없다. 그나마 존재하는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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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버 차 거리낌 없이 타는건 '넛지의 힘' 덕분
‘넛지(nudge)’란 ‘팔꿈치로 쿡쿡 찌르다’라는 의미의 동사다. 넛지가 ‘사람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이라는 의미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와 법률가 캐스 선스타인의 2008년 저서 가 인기를 얻으면서부터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행동과학은 실험실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우리 주변의 넛지는 많지만 정교하게 가려져 있는 탓에 알아보기 어렵다. 대표적인 넛지는 남자 화장실 소변기에 그려진 파리 그림이다. 시작은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이었다. 이 공항 청소 관리자였던 요스 반 베다프에게 남자 화장실에 소변이 튀는 건 익숙하면서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교육도, 잦은 청소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가장 적게 튀는 위치에 파리를 그려주자 사람들은 표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결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다. 영국에서는 폭동을 잠재우는 데 넛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영국에서는 여름만 되면 폭동이 늘어났다. 공공 기물이 파손되고, 상점들은 약탈당했다. 게다가 한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사회 폭동으로 이어졌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뇌는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한 아이들 사진을 보면 보호 본능이 작동해 반사회적 행동이 감소한다는 가설을 수립했다. ‘도시의 아기들’ 아이디어는 이렇게 탄생했다. 유독 폭동 피해가 심각했던 런던 그리니치 지역 상점의 셔터에 아기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 주인공은 동네 아이들이었다. 사람들은 모호하거나 일반적인 것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사회 규범에 더 강하게 영향받기 때문이다. 캠페인이 시작되고 이듬해 반사회적 행동이 24% 감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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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버의 장기 성장에 기술보다 중요했던 것은?
많은 사람이 특정 택시 플랫폼을 사용한다. 택시 중개 시장의 대부분을 한 기업이 독식하고 있다는 뉴스도 나오고, 이 힘을 이용해 심지어 불공정한 행위로 정부의 제재를 받았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런데 해당 기업의 비즈니스는 비교적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다. 사람들이 그 플랫폼을 비판하면서도 버리지 못하는 탓이다. 사람들이 해당 플랫폼을 미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장 능력 있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떻든 필요할 때 택시를 탈 수 있게 해준다. 우버는 보다 극적이다. 우버는 어떤 상황에서도 탄력요금제를 포기하지 않았다. 2013년 눈보라가 날리던 미국 뉴욕시에서 우버의 요금은 7배나 높아졌다. 이는 호주 시드니 인질극 현장을 탈출하려는 시민들에게도 여지없이 적용됐다. 2017년 뉴욕 택시 파업 때 역시 다르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슬람 7개국의 입국을 전면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표했을 때 택시노동자연합은 JFK공항에서 1시간 동안 운행을 중단을 선언했다. 같은 날 우버는 탄력요금제를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시민들은 택시 파업을 이용한 꼼수 전략을 비판했고, 이는 #DeleteUber 운동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앱을 삭제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우버로 돌아왔다. 우버 없는 불편한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 2017년 수많은 부정적인 언론 보도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우버는 월평균 약 7500명의 운전자가 40만 건의 운행을 달성했다. 역량과 신뢰학자들은 어떻게 미움과 사랑을 동시에 받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연구를 통해 신뢰가 형성된 덕분이며, 이는 여러 요소에 영향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중 한 가지가 ‘역량’이다. 이는 신뢰가 한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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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많아지면 팬데믹 위험 줄어들까
역사의 모든 팬데믹이 가난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이 농업으로 자급자족하던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축복이었다.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하자 살아남은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농지는 1.5배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농경사회에서 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이 늘어났음을 의미한다.산업혁명과 팬데믹흑사병은 끔찍했지만, 살아남은 농노들에게는 여러모로 유리했다. 농경지를 경작한 농민의 절대 수가 줄어들자 귀족들은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당시 탈곡 작업이나 쭉정이를 걸러내는 작업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가격은 1340년대 초에서 1370년대 초 사이 35%나 올랐다.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은 수백 년 동안 비정상적으로 높은 1인당 소득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고임금, 저출산의 선순환을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시기에 접어들자 근로자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 산업혁명은 본질적으로 기계적인 혁신이다. 이는 노동집약적에서 자본집약적 생산으로, 가내수공업에서 공장제 생산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초기 산업혁명가들은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가 병에 걸릴 위험을 줄여야 할 재무적 이유가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건강하지 못한 환경에서도 기꺼이 일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발전한 것은 기술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윤리의식도 같이 높아졌다. 비위생적인 공장 환경에 대한 학계의 지적과 여론의 공감이 이어졌다. 결국 1802년 최초의 노동법으로 알려진 ‘견습공에 대한 건강과 윤리에 관한 법’이 제정된다.인플루엔자 팬데믹과 코로나19‘견습공에 대한 건강과 윤리에 관한 법’으로 인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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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과 알고리즘은 어떻게 세상을 바꿔놓았나
아이폰은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2007년 1월 9일 스티브 잡스는 맥월드 엑스포 기조연설 행사에서 애플이 휴대전화를 만든다고 선언했다. 당시에도, 오늘날에도 아이폰은 많은 것을 바꿔놓을 혁명적 제품이 틀림없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있다. 문제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는지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스마트폰 세상미국의 Z세대는 하루에 약 80번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한다. 밀레니엄 세대는 약 63번, X세대와 베이비붐 세대는 각각 49번과 30번 잠금 해제를 한다고 알려져 있다. Z세대 미국인 96%가 스마트폰 없이 화장실을 가지 않을 정도다. 스마트폰 세상이 열리자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모바일과 소셜 네트워크라는 두 가지 힘이 결합하자 그 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사람들은 기업의 평가 기준을 수익이 아니라 사용자 수로 바꾸기 시작했고, 과거에는 불가능해 보였던 디지털 광고가 산업을 지배한다. 오늘날 구글은 37조 기가바이트의 데이터를 수집해 0.2초 안에 개인 맞춤형 결과를 제시한다. 구글의 아이디어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모두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기하급수적으로 확대되면서 디지털 광고는 미국 전체 광고 수입의 63%를 차지한다. 구글의 모회사인 알파벳은 광고 수익이 전체의 80% 이상이며, 메타의 경우 거의 98%다. 이는 소셜 네트워크가 무료이고, 그 흔적들이 디지털 광고의 재료가 되기에 가능했다. 알고리즘 세상스마트폰과 함께 변화를 견인한 요인은 알고리즘이다. 알고리즘 분석 결과 우리를 화나게 만드는 콘텐츠가 가장 많은 관심을 끈다는 점을 알아냈다. 급속도로 유포되는 뉴스가 감정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와튼 경영대학원은 사회적 전달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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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창업자 소멸과 넘치는 자본이 낳은 시장은?
돈이 땀보다 귀해졌다. 자본소득이 경제성장률보다 높았다는 피케티의 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누구나 현금보다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부를 증식하는 쉬운 방법이라는 점을 안다. 미국 시장을 기준으로 할 때 좋은 소식은 미국 주식의 절반을 일반 가계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며, 나쁜 소식은 미국 주식의 89%는 가장 부유한 10%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업자의 권력 회복이유야 어떻든, 이런 현상 덕분에 투자할 곳을 찾는 자본이 많아졌다. 그 혜택을 많이 받은 대상 중 하는 스타트업일 것이다. 요즘 기술 스타트업은 자본화가 잘 돼 있어 충분한 자본을 이용할 수 있다. 게다가 시장의 수용성이 높아져 수개월 안에 해당 분야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과거라면 몇 년 혹은 몇십 년 걸릴 일이었다. 이 같은 변화는 창업자의 권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됐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창업자와 자본을 대는 경영진 사이의 긴장감은 대체로 높았다. 원대한 비전을 품은 괴팍한 백인 청년 창업자는 회사 확장을 위해 데려온 나이 들고 노련한 경영자를 이기기 어려웠다. 1985년 스티브 잡스가 괴팍하고 고집스럽고 변덕이 심하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 권력은 창업자들에게 돌아왔다. 과거에는 세상을 바꿀 아이디어를 가진 천재는 가득하고 자본을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10년 뒤에는 반대였다. 진정한 천재는 많이 양성되지 못했지만, 이용 가능한 자본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빌 게이츠는 처음으로 창업자가 자기 회사 가치를 1000억달러까지 늘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스티브 잡스는 회사에서 쫓겨났지만, 그를 대신했던 스컬리, 스핀들러, 에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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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세상에서 스타트업이 중요한 이유
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의 경제상황은 처참했다. 1950년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은 미국의 20%에 불과했다. 이는 멕시코나 콜롬비아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식량은 배급제였고, 수많은 사람이 굶주렸다.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를 구하는 일도 어려웠다. 실제 많은 가정에 문손잡이가 없었다. 쇠붙이는 몽땅 전쟁 물자로 징발됐기 때문이다. 소니의 성공경제상황도 어려웠지만, 재건도 쉽지 않았다. 연합군은 1945년부터 1952년까지 평화 유지 목적으로 일본에 머물면서 생산과 산업정책을 통제했다. 신속하게 회복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당시에 ‘메이드 인 재팬’은 질 낮은 상품을 일컫는 표시와 다르지 않았다.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가 만든 제품도 대부분 저품질이었다. 딱히 물건을 사줄 소비자도 없었다. 그러나 이 회사는 끊임없이 기회를 엿봤다. 이들은 대기업이 포기한 시장에 초점을 맞췄다. 그중 하나가 1949년 개발한 휴대용 녹음기였다. 당시에 녹음은 특수하고 복잡한 기술이었다. 사람들은 휴대용 녹음기에 매료됐지만 구매하진 않았다. 이들은 여기서 기다리지 않았다. 1951년 도쿄레코딩이라는 자회사를 설립하고 판매, 유통, 광고, 훈련, 고객 서비스를 담당했다. 전국 학교를 돌면서 제품을 홍보하고, 고객 경험 개선을 목적으로 애프터서비스를 시행했다. 이후 생산이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주문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포켓용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만들어 진공관 라디오 시장을 파고들었다. 이렇게 1950년부터 1982년까지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낸 제품만 12개가 넘었다. ‘시장은 누군가가 창조했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로널드 코스의 지적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도쿄통신공업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