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에서는 2010년 7월 1일부로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을 시행하면서 '재래시장'을 버리고 '전통시장'을 쓴다고 밝혔다. 재래시장이라는 용어가 낙후된 느낌이 든다는 상인들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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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을 하루 앞두고 재래시장이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입니다. 판매대에는 신선한 채소와 과일은 물론 여러 종류의 수산물이 풍성합니다.” “설 연휴를 맞아 전통시장은 활기를 띠고 있습니다. 저렴한 비용으로 명절을 준비하기 위해 시민들이 전통시장을 찾았습니다.” 지속적인 내수경기 침체에 계엄과 탄핵 정국까지 겹치면서 자영업자들은 ‘생계절벽’으로 내몰리고 있다. 민족 최대 명절로 불리는 지난 설엔 그래도 차례상을 준비하는 이들이 전통시장을 찾아 북적이는 모습을 보였다. 시대 변천 따라 ‘단어 인식’ 달라져두 방송사에서 전한 내용은 비슷했지만, 용어 사용에서 중요한 차이가 눈에 띈다. ‘재래시장’과 ‘전통시장’이 그것이다. 각각 제목으로 쓴 말도 마찬가지다. ‘설 대목 맞은 재래시장, 활기 가득’과 ‘설 연휴 전통시장 북적’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재래시장을 “예전부터 있어 오던 시장을 백화점 따위의 물건 판매 장소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정의한다. ‘전통시장’은 어찌 된 일인지 아직 올라 있지 않다.

예전에 재래시장이라 부르던 말이 전통시장으로 바뀐 것은 이미 15년 전 일이다. 정부에서는 2010년 7월 1일부로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을 시행하면서 ‘재래시장’을 버리고 ‘전통시장’을 쓴다고 밝혔다. 재래시장이라는 용어가 낙후된 느낌이 든다는 상인들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재래’라는 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뜻한다. 물론 ‘전통시장’이 법정 용어이자 공인된 말이지만 현실 언어에선 아직 ‘재래시장’이 통용된다. 이는 말이란 게 여간해선 인위적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 고유의 옷인 한복의 진화 과정에서도 그런 사례를 엿볼 수 있다. ‘개량한복’과 ‘생활한복’의 관계가 그렇다. 전통한복은 남자는 통이 허리까지 오는 저고리에 넓은 바지를 입고 아래쪽을 대님으로 묶는다. 여자는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형태의 여러 가지 치마를 입는다. 남녀 모두 버선을 싣고, 외출할 때나 예복으로 두루마기를 덧입는다. 그러다 보니 일상에서는 활동하기에 불편하다는 점이 지적돼왔다. 요즘은 평상시보다 명절이나 큰 행사 등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 주로 입는다.

그래서 나온 게 ‘개량한복’이다. 일상생활에서도 활동하기 편하게 현대식으로 고친 한복을 말한다. 그런데 이번엔 ‘개량’이란 말이 걸렸다. “뭐가 ‘나빠서’ 개량한 것”이라는 의미로 들렸다. ‘개량(改良)’이란 말이 ‘나쁜 점을 보완하여 더 좋게 고침’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개량한복이라고 하면 전통한복은 좋지 않은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이번엔 ‘생활한복’이 등장했다. 생활 속에서 편히 입도록 한 한복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순수하게 언어적 측면에서도 중립적이다. 그러다 1996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한복 입기’를 추진하면서 ‘생활한복’을 공식 용어로 지정했다. 그런 까닭인지 <표준국어대사전>엔 ‘생활한복’이 표제어로 올라 있는 데 비해 ‘개량한복’은 보이지 않는다. 사회적 안배에 따른 용어 변화 많아용어의 변천을 들여다보면 언어의 변화무쌍함과 복잡다기함을 느낄 수 있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 생겨나는 말은 ‘사회적 규정’에 의해 단어 형태가 정해지기 마련이다. 특히 복수의 말 중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 말을 ‘누가 결정하는가’가 논란이 된다. ‘말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뭇 이데올로기적이기도 하다.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누군가에 의해 판단되고 선택되는 일은 늘 논쟁과 저항을 부른다. 그것이 ‘자유로운 언어의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수렴되지 않고 인위적·의도적 접근을 통해 이뤄질 때 더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서 차별어 인식의 시초로 꼽히는 ‘장애자-장애인’ 논란이나 ‘당선자-당선인’의 변천 과정은 언어적 의미보다 사회적 규정과 안배가 더 크게 작용했다. 다음 호에서 이들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