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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세계 첫 자동차 사고로 촉발된 갈등
과잉 규제라는 논란에도 31년간 지속된 ‘적기조례’는 영국의 자동차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 사진은 런던에서 열린 클래식카 대회.  한경DB
과잉 규제라는 논란에도 31년간 지속된 ‘적기조례’는 영국의 자동차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다. 사진은 런던에서 열린 클래식카 대회. 한경DB
1834년 영국 귀족 존 스콧 러셀이 만든 증기자동차가 승객 21명을 태우고 글래스고를 출발했다. 그런데 언덕을 오르기 위해 증기기관의 압력을 높이다 차가 전복되면서 엔진 보일러가 폭발했다. 기관의 불을 조절하던 화부와 승객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주행 중 일어난 사고는 아니지만 세계 최초로 기록된 자동차 사망 사고다.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증기자동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들끓는 것은 당연했다. 증기자동차는 괴물로 간주돼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19세기에 세계는 이미 증기기관 시대로 접어들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도와 자동차가 등장하며 가축을 이용하던 시대에서 기계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증기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흉물스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굉음과 매연을 내뿜는 데다 그을음으로 빨래를 시커멓게 만들기 일쑤였다.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아 ‘달리는 괴물’에 대한 시민 거부감은 점점 커졌다.

가장 강하게 반발한 집단은 당시 대중교통을 담당했던 마차업계였다. 증기자동차는 마차 속도의 두 배인 시속 30~40㎞에 달했다. 최대 탑승 인원도 28명으로 마차의 두 배였지만, 요금은 마차의 반값이었다. 말과 달리 ‘지치지 않는 기계’에 승객을 빼앗긴 마부들은 일자리를 걱정했다. 마차 업주들과 마부조합은 증기자동차를 규제하라며 영국 의회에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말과 사람이 놀라 위험하다는 게 명분이었다. 증기자동차의 경쟁자인 철도업계도 손님을 잃게 되자 청원에 동참했다. “제발, 저 괴물을 멈춰 달라!” 사람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되는 증기자동차정치인은 예나 지금이나 여론에 민감하다. 마차·철도업계와 시민 반발을 의식한 영국 의회는 먼저 증기자동차에 마차보다 10~12배나 비싼 도로 통행세를 물렸다. 이어 의회는 1861년 증기자동차의 최고 속도를 시내에서 시속 8㎞, 교외는 16㎞로 제한하는 ‘기관차량조례’를 제정했다. 이것도 모자라 1865년에는 기존 조례를 대폭 강화한 ‘적기조례’를 만들어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으로 공표했다. 적기조례란 명칭은 위험을 알리는 붉은 깃발에서 유래했다. 세계 최초의 도로교통법인 적기조례의 내용을 보면 첫째, 증기자동차의 최고 속도를 시내에서 시속 3.2㎞, 교외에서 시속 6.4㎞로 제한했다. 이런 속도는 사람이 걷거나 가볍게 뛰는 정도다. 둘째, 증기자동차는 운전수, 기관원, 붉은 깃발을 든 신호수 등 3명으로 운행해야 했다. 신호수는 차량의 55m 앞에서 걸어가며 마차나 말이 접근할 때 운전수에게 신호를 보내는 역할이었다.

적기조례로 인해 번창하던 증기버스업계에 급제동이 걸렸다. 사업자들은 지나친 규제라며 반발했다. 마차보다 느린 증기버스는 무용지물이었다. 증기버스는 도시에서 자취를 감췄고, 시골에서 농업용이나 작업용 트랙터로 이용됐다. 과잉 규제라는 논란에도 적기조례는 1896년 폐지되기까지 31년간 존속했다. 그동안 영국의 자동차산업은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일거리가 없어진 자동차 기술자와 사업가들이 미국 독일 프랑스 등 해외로 빠져나갔다. 세계 최고 산업국 영국이 ‘2류 국가’가 된 이유영국에서는 적기조례가 폐지되자 한때 증기자동차 붐이 다시 일어나 192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가 바뀌고, 기술 수준은 한층 높아졌다. 휘발유 디젤 등 석유로 움직이는 내연기관 자동차가 등장하자 요란하고 성능이 떨어지는 증기자동차는 구세대 유물로 전락했다.

지금 보면 적기조례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법이다. 어떻게 달리는 자동차를 사람의 보행 속도로 다니라고 법으로 강제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산업혁명의 선발 주자인 영국에서 먼저 그런 규제를 입법화했다. 19세기에 세계 1위 산업국이던 영국은 1900년에 이르러 그 지위를 미국과 독일에 내주고 말았다. 산업혁명을 선도했던 영국이 거꾸로 추격자 신세가 된 것이다.

영국이 주춤하는 동안 경쟁국들은 기술 격차를 만회할 호기를 맞았다. 그들은 영국과 달리 적기조례 같은 규제를 도입하지 않고, 영국에서 이탈하는 자본과 기술자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 결과 독일에서는 카를 프리드리히 벤츠가 1885년 세계 최초의 휘발유 자동차를 발명했다. 프랑스도 1899년 벤츠의 특허 사용권을 사들여 자동차 생산에 나섰다. 미국에서는 듀리에 형제가 자동차 제조 회사인 듀리에모터왜건을 설립했고 올즈모빌, 포드 등이 등장하며 대량생산에 나섰다. 과거에 갇힌 규제 vs 미래를 보는 규제오늘날 적기조례는 어리석은 규제로 산업을 죽인 대표적인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마차를 보호하기 위한 규제가 마차와 자동차를 모두 잃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황당한 법이 아니었다. 적기조례는 오히려 여론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었다. 특히 수많은 마차업자, 마부, 마차 제조업자, 말 농장주, 마구업자, 건초업자 등이 증기버스 규제를 환영했다.

규제는 그렇게 생겨난다. 기존 경제질서에서 이익을 보는 집단이 정치인을 움직여 새로운 경쟁자의 진입을 막는 게 보통이다. 기득권 집단에는 혁신이나 발명이 심각한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적기조례는 과거에 갇혀 미래를 보지 못하는 규제의 폐해를 보여주었다. 발전을 거부하고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제도는 국가 운명까지도 가로막을 수 있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논설실장 NIE 포인트① 증기기관이 1차, 전기가 2차, 컴퓨터와 인터넷이 3차, 인공지능(AI)·빅데이터·사물인터넷(IOT)이 4차 산업혁명을 촉발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② 영국에서 적기조례로 보호하려던 마차 관련 산업 종사자들은 자동차의 발달로 결국 대부분 일자리를 잃었는데 그들을 위한 다른 지원 방안은 어떤 것이 있었을까.

③ 공유차량인 우버, 공유숙박인 에어비앤비 등 새로운 사업이 택시업계와 숙박업계 반발로 국내에서 허가받지 못하는 것(내국인 기준)도 적기조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