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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디지털 이코노미

    재화나 서비스보다 중요한 건 경험의 공유

    결국 폭망(We Crushed)했다. 공유 오피스 위워크 이야기다. 에어비앤비, 우버와 함께 공유경제를 대표하던 비즈니스인 위워크는 지난 11월 6일 미국 뉴저지법원에 파산보호 신청했다. 한때 기업가치 62조원을 인정받았던 위워크는 고금리와 재택근무로 상업 부동산에 불어닥친 어려움으로 인해 만기가 돌아온 대출을 갚지 못하게 된 것이다. 어려움을 겪는 공유 비즈니스는 위워크만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시절 급격히 상승했던 배달 수요로 공유주방 비즈니스도 성행했지만, 현재는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서울 강남권에서 운영 중인 한 공유주방 기업의 경우 44개 점포 가운데 31곳이 현재 입점 식당 없이 비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유 모빌리티도 다르지 않다. 차량 공유 업체는 서비스 관리 문제로 30%가 감소했고, 공유 킥보드의 경우 미국의 라임과 버드, 독일의 윈드, 싱가포르의 뉴런모빌리티 등 글로벌 기업들이 사업성 악화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했다. 반면에 공유숙박 분야의 에어비앤비는 날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사회활동과 여행이 다시 시작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성과를 누리고 있다.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8%, 영업이익은 33% 증가했다. 문제는 규제다. 집주인이 자신의 주택을 임대시장에 내놓기보다 에어비앤비를 활용하면서 임대시장의 주택 수가 급감했다. 이는 임대료와 주택가격 상승으로 이어졌고, 각국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에어비앤비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집주인이 기존 세입자와 계약 해지 후 1년간은 공유숙박에 활용할 수 없도록 강제하고, 뉴욕에서는 반드시 호스트가 같이 거주할 것을 전제로 하며 모든 공유숙박 호스트에게 개인 정보

  • 커버스토리

    우리는 왜 '타다'에 선뜻 타지 못했을까?

    ‘타다’는 승합차를 유료로 타려는 이용자와 운전자를 연결해주는 차량공유 앱 서비스입니다. 승합차는 일반 택시보다 크고 마을버스보다 작은 차종을 말합니다. 대개 11~15인승입니다. 2018년 10월 ‘타다’라는 글자를 새긴 차가 처음 시장에 등장했습니다. 미국에서 차량공유 서비스인 ‘우버’가 주목받은 터여서 타다는 한국식 우버로 불리기도 했습니다.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택시업계가 반발한 겁니다. “택시 면허가 없는 사람들이 택시 영업을 한다”고 주장했고 수사당국인 검찰이 1년 뒤인 2019년 10월 타다 운영업체 VCNC의 박재욱 대표와 모기업 쏘카의 이재웅 대표를 재판에 넘겼습니다. 1심과 2심 법원은 모두 ‘타다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모바일 앱과 승합차를 잇는 혁신 서비스’인지, ‘무면허 택시 영업행위’인지를 놓고 양측이 3년간 치열하게 싸웠습니다.누가 재판에 이겼느냐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타다 재판의 이면에 웅크리고 있는 생각들에 주목해야 합니다. 혁신과 기득권의 대립, 새로운 것과 기존에 있던 것 사이의 충돌, 현재와 미래, 진화와 도태 같은 이슈들이죠.논술 측면에서 공부 할 내용이 참 많은 ‘타다’입니다. 법정 공방을 벌이는 사이 타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차량공유 타다, 택시 아닌 렌트 서비스"…두 번 무죄 받았지만 사업은 금지됐어요2018년 10월 다음커뮤니케이션(카카오에 합병됨) 창업자 이재웅 씨는 새로운 차량공유 서비스를 내놨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타다’입니다. 이 서비스는 금세 주목받았습니다. 한국의 ‘우버(Uber) 서비스’로 불릴 정도였죠. ○타다

  • 과학과 놀자

    신약개발 과정에서 독성·안전성을 검증하기 위한 동물 대상 실험, 빅데이터 구축해 동물실험 최소화…인공장기로 대체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이 아프면 병원이나 약국에 가서 증상에 맞는 약을 처방받는다. 이렇게 쉽게 접할 수 있는 약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많은 시간적 노력과 천문학적 금액의 비용이 투입된다. 신약의 파이프라인(개발 후보물질) 단계에서 비임상시험을 거쳐 임상시험을 통해 세상에 나오기까지 평균 10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며, 대략 하나의 신약이 성공하기까지 1조원 정도의 돈이 투자된다.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자되는 만큼 신약 개발의 주요 단계에서 후보물질의 고-스톱(진행-중단) 여부를 결정짓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시험을 수행하게 된다. 특히 파이프라인 단계에서 효능을 입증받은 후보물질의 안전성이나 효능을 검증받기 위해 수행하는 비임상 단계는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투여하기 전에 설치류, 비설치류 및 영장류를 이용해 일반독성, 발암성, 생식발생독성, 유전독성, 면역독성, 안전성 약리 등 다양한 시험을 필수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사람에게서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행하는 반복적이고 다양한 비임상시험으로 인해 많은 실험동물의 희생이 따르는 부분은 그동안 필수불가결한 부분으로 여겨져 왔다. 실험동물 사용을 금지하는 세계적 추세그러나 2010년대 초반에 들어오면서 유럽에서는 실험동물의 윤리적 문제로 인해 동물실험 화장품 원료 등에 대한 동물실험을 금지했고, 동물실험을 수행한 화장품 원료 및 제품은 판매를 금지하도록 결정했다. 한국도 2017년부터 동물실험을 거쳐 만든 화장품을 유통하거나 판매할 수 없게 됐다. 2013년 미국에서 열린 FDA(Food and Drug Administration: 미국 식품의약국) 주최 워크숍의 주제는 ‘실험동물을 사용하지 않는 독

  • 디지털 이코노미

    디지털시대 공유경제는 새로운 사회적 부를 창출

    공유경제는 경제를 공유하지 않는다. '공유경제'의 정확한 의미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공유경제가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였다. 중국 경제학자인 리빙옌 교수와 미국의 마틴 와이츠먼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각각 '사회주의 원가 범위 기초 연구(1981)'와 '공유경제(1984)'에서 공유경제이론을 언급했다. 이들이 생각한 공유경제는 이익의 분배와 관련한 공유였다. 노동자와 자본가가 기업의 이익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를 통해 경제성장의 동력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늘날의 공유경제와는 사뭇 다른 개념이었다. 공유경제의 개념공유경제가 다시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이자 ‘인터넷과 사회를 위한 버크먼 클라인 센터’ 공동 이사인 요차이 벤클러는 그의 책 《네트워크와 부》를 통해 ‘사회적 생산’이라는 개념을 공유경제로 설명했다. 인터넷을 통한 정보화 시대의 시작이 개인 간 협업을 가속화해 특정 기업의 독점적 생산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생산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위키피디아,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등으로 구현됐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공유’에 불과했다.이후 공유는 ‘협력’의 개념과 연결되어 공유경제는 ‘협력소비’로 확장된다. 문자 그대로 개인이 아닌 그룹소비라는 의미다. 다수의 소비자가 그룹을 형성하면 개인일 때보다 가격협상에 우위를 가질 수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많은 소비자는 공동구매를 바탕으로 자동차나 부동산, 비행기와 같은 고가 자산을 공유했고, ‘트립 어드바이저’와 같은 사이트를 통해 숙박 경험을 공유했다. 옥스퍼드 경

  • 생글기자

    공유경제, 성숙한 시민의식이 뒷받침되어야

    ‘내 것이지만 같이 쓰자’란 생각에서 출발한 공유경제는 에어비앤비, 우버, 위워크 같은 공유경제 기업들을 탄생시켰다. 이제 우리는 온·오프라인을 통해 곳곳에서 공유경제 플랫폼을 찾아볼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공간이나 물건을 공유하는 서비스들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방역과 안전에 대한 기준이 높아졌지만, 잉여 경제의 시대에 남아도는 것을 나눠쓰는 흐름은 국내에서도 비앤비히어로와 코자자, 쏘카와 그린카, 나눔 옷장 키플, 책을 보관해주고 공유하는 국민도서관 책꽂이, 그 밖에 공유창고, 공유주방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기술이나 자산을 다른 사람과 공유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협력적 소비의 의미를 지니는 공유경제란 단어는 2008년 미국 하버드 법대의 로렌스 레식 교수에 의해 처음 사용됐다. 장소나 운송 수단을 공유하는 것에서 시작됐지만 근래에 와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각종 서비스나 교육, 소프트웨어, 정보통신기술 등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있다. 공공 와이파이, 퍼블릭 클라우드 서비스, 오픈소스 기술공개 등이 그 예다.장점이 많아 보이는 공유경제에도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전한다. 공유경제 플랫폼이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만큼 서비스 공급자의 수익에 대한 세금부과 방법이나 이용자의 서비스 불만족을 해결해줄 법과 제도가 좀 더 보완돼야 하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직접 거래를 하는 공유경제의 특성상 범죄 발생의 위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버 택시나 타다의 경우처럼 공유경제 서비스가 기존의 사업질서를 위협한다는 갈등을 낳을 수도 있고, 퍼블릭 클라우드 서

  • 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영국에서 시작된 자동차 산업이 미국과 독일에서 발전한 까닭은?

    1834년 영국 귀족 존 스콧 러셀이 만든 증기자동차가 승객 21명을 태우고 글래스고를 출발했다. 그런데 언덕을 오르기 위해 증기기관의 압력을 높이다 차가 전복되면서 엔진 보일러가 폭발했다. 기관의 불을 조절하던 화부와 승객 2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주행 중 일어난 사고는 아니지만 세계 최초로 기록된 자동차 사망 사고다.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증기자동차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들끓는 것은 당연했다. 증기자동차는 괴물로 간주돼 규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19세기에 세계는 이미 증기기관 시대로 접어들었다. 증기기관으로 움직이는 철도와 자동차가 등장하며 가축을 이용하던 시대에서 기계의 시대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한 증기자동차는 사람들에게 낯설고 흉물스럽게 여겨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굉음과 매연을 내뿜는 데다 그을음으로 빨래를 시커멓게 만들기 일쑤였다.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아 ‘달리는 괴물’에 대한 시민 거부감은 점점 커졌다.가장 강하게 반발한 집단은 당시 대중교통을 담당했던 마차업계였다. 증기자동차는 마차 속도의 두 배인 시속 30~40㎞에 달했다. 최대 탑승 인원도 28명으로 마차의 두 배였지만, 요금은 마차의 반값이었다. 말과 달리 ‘지치지 않는 기계’에 승객을 빼앗긴 마부들은 일자리를 걱정했다. 마차 업주들과 마부조합은 증기자동차를 규제하라며 영국 의회에 끊임없이 청원을 넣었다. 말과 사람이 놀라 위험하다는 게 명분이었다. 증기자동차의 경쟁자인 철도업계도 손님을 잃게 되자 청원에 동참했다. “제발, 저 괴물을 멈춰 달라!” 사람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되는 증기자동차정치인은 예나 지금이

  • 경제 기타

    경제활력 넘치는 호찌민…베트남 실용주의의 상징

    호찌민은 20세기 베트남전쟁을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초대 국가 주석인 국부(國父)의 이름이다. 이 지도자의 이름을 딴 베트남 남단에 위치한 호찌민시(Ho Chi Minh City)는 인구 약 900만 명이 거주하는 베트남 남부의 최대 도시이다. 수도인 하노이에서 약 1700㎞ 떨어져 있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가 325㎞이니, 서울~부산 거리의 약 5배이고 비행기로만 약 2시간10분이 걸린다. 베트남은 매우 긴 나라다.(3) 베트남 경제중심지 호찌민베트남 국부의 이름을 딴 도시호찌민시의 과거 이름은 사이공이고, 여전히 사이공이라는 명칭이 곳곳에 남아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컬 ‘미스 사이공’에서나, 한국의 쌀국수 음식점에도 사이공이란 명칭을 종종 쓰기 때문에 우리는 사이공이라는 명칭에 더 친숙할 수도 있다. 호찌민시 안에서도 사이공이란 이름을 현재에도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다. 호찌민시의 기차역 명칭도 사이공역이고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맥주의 브랜드 네임도 ‘사이공맥주’다. 그리고 호찌민시의 유명 호텔 중의 하나가 된 한국계 호텔의 명칭도 ‘롯데 레전드 호텔 사이공’이다.호찌민시는 16세기까지는 캄보디아 영토였다가 이후 베트남이 이 도시를 포함한 주변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베트남 영토가 된다. 한참 시간이 흐른 1858년 베트남과 프랑스 간 전쟁 때 이 도시는 프랑스에 의해 점령되기도 하다가, 1862년 베트남·프랑스 전쟁의 종전 후부터 1945년까지 오랜 기간 프랑스에 의해 지배를 받게 된다. 현재에도 호찌민시에 프랑스식 건축물과 유명 바케트집이 많은 이유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가 물러간 이후에는 남베트남의 수도가 된다.1인당 GDP 베트

  • 테샛 공부합시다

    스스로 고립되는 경제는 국제 경쟁력에 뒤처져요

    과거 한국은 통일신라, 후삼국, 고려를 거치며 외국과 교역이 활발한 나라였다. 하지만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은 폐쇄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다. 국가에서 지정한 지역 외에서의 교역을 금하였고, 민간보다는 관(官) 중심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조선 사회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사회에서 상업을 가장 천시하였고, 영국에서 시작된 서양의 산업혁명과 개혁·개방의 시대에도 조선은 세도정치와 국내 정치의 혼란으로 우물 안 개구리였다.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조선 말기인 1871년,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물리치며 자신감을 가진 흥선대원군이 척화비에 새긴 글귀다. 당시는 프랑스 미국 등이 조선과의 통상 요구를 위해 강화도 등에서 무력시위를 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은 집권 후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각종 개혁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들이 시대적 변화에 맞는 정책이었는지는 의문이 들 수 있다. 서원철폐, 토지제도·통치 법률 정비 등은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다. 반면 서양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신기술이 발전하면서 경제성장이 활발했다. 왕권이라는 절대적 권력보다는 국민의 기본적 권리에 관한 법들이 발달하면서 대외교역이 발달했다. 하지만 조선은 시대적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고, 서양 열강의 침략에 더욱 폐쇄적인 정책을 펼쳤다. 대내적으로 왕권 강화를 통해 정치를 안정시켰을지라도, 대외적으로 강화된 쇄국정책은 해외의 발전된 문물을 들여올 수 없어 주변국인 청나라, 일본보다 발전이 더디게 된 원인이 되었다.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