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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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14세기 유럽 떨게한 '죽음의 공포' 페스트…전대미문 전염병은 하층민 황금시대 열었다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페스트(흑사병)는 그야말로 당대인들에게 충격과 공포였다. 유럽 거의 전역이 추풍낙엽처럼, 유럽 민화에 나오는 죽음의 신이 휘두르는 낫에 쓸리듯 전염병의 희생양이 됐다. 네덜란드 일부와 벨기에, 피레네산맥 인근 프랑스 일부, 폴란드 등만이 간신히 페스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지역에 따라선 흑사병 탓에 인구의 3분의 1에서 절반 가까이가 사망한 곳도 있었다. 영국에선 1340년대 페스트가 처음 닥쳤을 때 인구의 20%가, 1360~1375년 창궐기엔 인구의 40%가 줄었다. 프랑스는 흑사병 이전의 인구수를 18세기 초에야 간신히 회복했다. 스웨덴, 덴마크는 인구의 최대 절반이 감소했다. 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도 인구의 절반 정도가 사라진 것으로 추산된다.하지만 이 전대미문의 대공포가 지나간 뒤 살아남은 사람에겐 흑사병이 일종의 축복이었다. 사람이 귀해지면서 몸값이 높아졌고, 일자리와 재산이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족해졌기 때문이다. 흑사병으로 인구의 3분의 1 줄어부동산의 소유권 이전도 활발해졌다. 폴란드에서 잉글랜드까지, 노르웨이에서 시칠리아까지 전 유럽에서 대규모로 부동산 주인이 바뀌었다. 19세기 영국의 중세학자 서롤드 로저스가 “페스트의 의미는 토지에 완전한 혁명을 도입한 데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다.11세기 이후 임금 지급이 없던 과거의 농노제는 효율성을 급격히 상실해갔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반감은 오늘날 거대 기업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이는 것처럼 흔한 일이기도 했다. 지주들은 토지를 소작 주고자 했으며 과거 현물로 지급되던 지대는 점차 금납으로 대체됐다. 농노보다 신분적 예속이 적은 노동자가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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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기 佛프로방스선 법으로 귀족의 노동 금지, 천민과 구분하기 위해…중세엔 일을 벌로 생각
13세기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영주인 레이몽 베랑제 5세는 천생 ‘귀족’이었다. 당시 귀족들은 육체적 노동을 할 필요가 없었다. 한마디로 일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레이몽은 이 같은 관습법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경멸해 마지않던 천한 농민과 건달들을 귀족과 구분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나갔다. 자신의 영지에 사는 일반인과 고귀한 사람들을 제도적으로 시시콜콜 구분하는 각종 법을 만든 것이다.이에 따라 프로방스의 기사들은 농사일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됐다. 기사들은 쟁기질하거나 땅을 파는 것은 물론 장작을 나르거나 각종 손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었다. 고귀한 귀족 여인은 ‘음식을 만들지 않고, 설거지도 하지 않으며, 방앗간에 들를 일도 없는 사람’으로 법적으로 정의됐다.중세에는 일을 원죄의 결과인 벌로 생각했다. 성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계율 속에 일을 집어넣어 철저하게 실천하도록 한 것도 모두 ‘에덴동산에서 추방됐을 때 인간에게 강제된 속죄’의 일환이었다고 한다.그리고 이 같은 풍습은 때마침 자리 잡아가던 3위계를 견고히 하는 데 한몫했다. 속죄의 의미로 스스로 쟁기질을 하던 11~12세기의 수도사와 달리 이 당시 수도원과 성당의 수장들은 자신의 부를 이용하는 최상의 방법으로 기도 장소를 충실히 꾸미고, 재건축하고, 제단과 성유물 주변을 휘황찬란하게 하는 데 큰 관심을 뒀다. ‘경제적 부는 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돼야 한다’는 레토릭은 엄청난 힘을 발휘했다.기사들도 게을리 살면서 노동을 자신들의 고귀한 자유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부를 마구 소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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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북독일 상인연합체로 출발…유럽으로 확산, 소금·옷감 등 동유럽 상품, 서유럽에 유통 역할 수행
독일 항공사 루프트한자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는 ‘한자동맹(Hanseatic League)’은 12세기 중엽 시작돼 17세기 중엽에 소멸했다. 시작은 1159년께 북독일 지역 도시인 뤼베크가 서유럽의 동방 진출 관문 역할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뤼베크는 이후 지정학적 입지를 최대한 활용해 한자동맹의 중심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니더작센과 베스트팔렌, 라인란트 상인들이 거래를 위해 뤼베크로 유입됐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도 상인들이 몰려왔다.이전에는 상대적으로 위험했던 발트해는 교역로로서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노브고로드와 스몰렌스크 같은 러시아의 교역 중심지와는 강을 통해 물자가 오갔고, 백해를 건너서 비잔티움과 이슬람 지역의 사치품이 발트해 연안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한자동맹이 결성되면서 상인들이 발트해를 적극적으로 오가기 시작했고, 곧이어 노르웨이와 네덜란드, 잉글랜드 등이 접해 있는 북해 연안으로 교역활동 범위를 넓혔다.13세기 중엽 한자동맹은 발트해와 북해에서 사실상 무역 독점권을 행사하게 된다. 뤼베크와 함부르크, 로스토크, 슈트랄준트, 그라이프스발트, 비스비, 스톡홀름, 브룬스비크, 브레멘, 마그데부르크, 고슬라르, 그단스크, 엘빙, 크라쿠프, 브레슬라우, 쾨니히스베르크, 리가, 브뤼주, 노브고로드 등이 주요 회원이었다. 전성기 한자동맹은 노브고로드~라발~뤼베크~함부르크~브뤼주~런던을 잇는 긴 교역축을 완성하게 된다. 14세기가 되면 남독일과 이탈리아, 대서양 연안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내륙 해양 지역들과 연결망도 강화하게 된다. 한자동맹은 서유럽에서 필요로 하는 동유럽 산품을 유통시켜주는 역사적 사명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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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에 무관심한 군사집단이 장기간 중동지역 지배…교역 주도권이 유럽에 넘어가며 '대항해 시대' 불러
전반적으로 전근대 시기 이슬람권의 산업기술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지만 교역 측면에선 여건이 좋았다. 산업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것은 주변 환경의 영향이 컸다. 인력과 축력이 주로 이용됐다. 풍력과 수력을 이용한 풍차와 수차는 사용되긴 했지만 유럽보단 널리 퍼지지 못했다. 자동화기기는 간혹 만들어지긴 했지만 장난감 정도에 응용됐다. 에너지 관련 기술에서 중동이 뒤처진 것은 서유럽과 같은 목재, 석탄, 목탄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계 탓이 컸다. 유럽에 비해 강의 수도 적었고 낙차가 크지 않아 수력을 활용하기도 쉽지 않았다. 석유가 물론 많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에너지원으로 적극 파낼 기술도 없었고, 석유를 채굴해도 바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동서양 장거리 교역에 최적이었던 중동지역목재와 금속 산출이 적다 보니 바퀴가 달린 탈것의 숫자도 적었다. 이는 도로망 같은 교통시스템 개선을 더디게 했다. 14세기에 모로코 출신이었던 이븐 바투타가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를 가는 도중 투르크인들이 바퀴 달린 수레를 이용하는 것을 보고선 “신기하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여행가 볼니는 “시리아 전체에서 마차를 볼 수 없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고 했다. 교통은 대부분 낙타 같은 동물을 통해 이뤄지거나 수운을 통해 이뤄졌다. 기원전 2000년께부터 운송에 활용된 낙타는 하루에 1200파운드의 짐을 싣고 200마일을 갈 수 있었다. 17일간 물을 마시지 않고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전근대 시기 기술로는 낙타보다 더 유용한 교통수단을 마련하는 게 불가능했고, 그 이유로 대체품을 만들고자 하는 노력도 나타나지 않았다.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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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한 이슬람율법…이교도 잡아 노예로 만들며 인신매매 시장 확대
중세 중동 지역경제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농업이었다. 하지만 교역에서의 위상은 달랐다. 농산물은 대부분 자가소비용이었다. 농산물은 상하기 쉬웠고 부피는 컸으며, 이윤은 적어 장거리 교역에 적합하지 않았다. 교역품목에서 중동지역을 대표한 것은 직물(textile)이었다. 당시 중동산 직물이 유럽에 대량 수출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주요 직물제품 명칭은 중동 지방의 주요 도시명에서 나왔다. 모술에서 모슬린(muslin)이, 다마스쿠스에서 다마스크(damask)가 유래했다. 직물 관련 용어들에도 이슬람 세계의 흔적은 남아 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거즈(gauze)는 아랍어 ‘qazz’에서 나왔다. 앙고라 산양에서 채취한 모섬유 모헤어(mohair)는 ‘mukhayyar’라는 아랍어 단어에서 출발했다. 치밀한 조직의 평직물을 가리키는 ‘태피터(taffieta)’ 같은 전문용어도 페르시아어 ‘taftah’가 근원이다. 직물·비단·후추는 주요 중동 교역품중동지역 정착 농민들은 직물업자들에게 아마와 목면을 제공했고, 유목민은 양모와 가죽 공급원이 됐다. 다만 직물산업의 주요 원료였던 목재만은 언제나 부족해서 비싼 값에 외부에서 수입해야 했다. 직물생산은 대부분 가내수공업 형태로 생산자 자신의 필요와 지역 내 수요를 맞추는 수준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직물 제조업자들은 태피스트리와 쿠션, 의복, 각종 복식품을 함께 만들었고 그중 일부는 수출됐다. 이집트 지역에 들어섰던 수많은 왕조는 설탕 제조 노동자와 함께 아마 채취 노동자에게도 국가가 일당을 지급하는 등 적극적으로 직물산업에 개입하기도 했다.알레포나 알렉산드리아 같은 이슬람권 주요 교역항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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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약탈하고 쓸모있는 사람을 강제이주시켰던 몽골, 역참 설치해 교류…'진정한 세계화의 첫발' 평가
칭기즈칸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데 있어서 서아시아의 패자였던 호레즘과의 일전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218년 몽골이 보낸 상단이 오트라르에서 살해되면서 불거진 호레즘과 몽골의 대결은 칭기즈칸 군대의 ‘잔인함’과 군사적 ‘천재성’이 드러난 계기이기도 했다. 특히 호레즘의 심장이었던 부하라 공략은 칭기즈칸의 번뜩이는 기지가 빛난 순간이었다. 칭기즈칸은 사마르칸트를 경유하는 통상의 루트 대신에 현지인 투항자들을 길잡이로 활용해 키질쿰(붉은 모래) 사막을 횡단하는 강수를 뒀다. 1220년 전방전선 650㎞ 뒤에 있던 부하라 성문 앞에 몽골의 대군이 나타나자 부하라시는 공황상태에 빠졌다. 저항하면 학살 … 전문가는 몽골로 보내몽골군이 출현하자 방위병들은 400명의 투르크 병사만 성채 안에 남겨둔 채 줄행랑을 쳤다. 부하라 시민들은 다음날 무슬림 종교 지도자들의 지도하에 항복했다. 일부 병사는 부하라시 요새를 점거한 채 12일간 저항했지만 압도적인 몽골군의 공격에 결국 제압됐다. 이후 몽골군이 부하라에 대해 처한 행동은 이후 트랜스옥사니아 지역에서 칭기즈칸 군대에겐 일종의 행동규범이 됐다. 특히 인력, 고상한 표현으로 인적 자원 처리에 있어서 그러했다. 우선 장인들(특히 무기 제조장인과 방적공)처럼 쓸모 있는 사람들은 엄선돼 동쪽의 몽골지역으로 보내졌다. 젊은이들은 몽골군의 다음 전투에서 활용될 ‘화살받이(arrow fodder)’로 잡혀갔다. ‘화살 폭풍(arrow storm)’이라고 불리는 집단 사격으로 적군의 혼을 빼놨던 몽골군은 적군의 공격에 대한 ‘싸고도 유용한’ 그러면서 ‘살아 있는’ 방어수단도 확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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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거래 등 법·제도까지 만들게 한 튤립 투자…계속 오를 것이란 믿음이 사라지자 공황에 빠져
당나라에서 모란꽃에 대한 투기 광풍이 불었는데 17세기 네덜란드의 모습은 당나라의 재판이었다. 16세기 중반 유럽에 들어온 튤립은 1634년 네덜란드에서 ‘튤립 광풍(tulipomania)’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반까지 확산된다. 부자는 물론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까지 튤립 거래에 뛰어들었고, 사람들이 튤립에 열광할수록 튤립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5년에는 튤립구근 40뿌리에 10만플로린이 투자됐다. 튤립이 너무 고가다 보니 미세한 무게 단위인 ‘그레인(0.064799g)’보다도 작은 ‘페리트’ 단위로 팔렸다. “완벽한 구근은 세상에 두 개만 존재”튤립이 귀한 존재가 되면서 사람들은 튤립을 ‘장군’ ‘제독’ ‘총독’ 등으로 불렀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스키피오 같은 역사상 위인의 이름이 붙기도 했고, ‘장군 중의 장군’ ‘제독 중의 제독’이라는 이름도 등장했다. 19세기 영국 작가 찰스 매케이에 따르면 17세기 튤립 광풍 기간에 ‘리프켄 제독’이라고 이름 붙은 400페리트짜리 튤립은 4400플로린 가치를 평가받았다. ‘반 데르 에이크 제독’ 튤립은 446페리트에 1260플로린으로 가격이 매겨졌다. ‘총독’으로 불린 튤립은 400페리트짜리가 3000플로린이었다. 가장 비싼 튤립은 ‘셈페르 아우구스투스’라는 것으로 200페리트짜리가 5000플로린에 달했다. 이 종자는 상태가 좋지 않은 것조차도 보통 2000플로린은 갔고, ‘완벽한’ 구근은 암스테르담과 할렘에 1개씩 단 두 개만 존재한다고 발표됐다. 할렘에 있는 완벽한 구근을 얻기 위해 12에이커 건축물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제안까지 나왔다. 암스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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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한 채 값을 훌쩍 뛰어넘던 당나라 시대 모란꽃…'네덜란드 튤립'보다 900년이나 앞섰던 투기 광풍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꽃을 사다(買花)’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장안의 봄이 저물려 하니(帝城春欲暮)시끌벅적 마차들이 다닌다(喧喧車馬度)모두들 모란의 계절이 왔다며(共道牡丹時)줄지어 꽃을 사러 간다(相隨買花去)귀천 따라 일정한 값이 없으니(貴賤無常價)낸 돈만큼 꽃송이를 보게 될 터(酬値看花數)(…)집집마다 따라들 하니 풍속이 되어(家家習爲俗)사람마다 정신없이 열중해 깨닫지 못한다(人人迷不悟)어느 늙은 시골 농부가(有一田舍翁)우연히 꽃 파는 곳에 왔다가(偶來買花處)고개 떨구고 홀로 길게 탄식한다(低頭獨長嘆)그 한숨을 알아채는 이 아무도 없다(此嘆無人諭)한 포기 짙은색 모란꽃이(一叢深色花)중농 열 집의 세금이라도(十戶中人賦)시가 묘사하는 것처럼 전성기 당나라 장안에선 오늘날 닷컴 열풍, 부동산 광풍, 펀드 열풍에 버금가는 모란 광풍이 불었다. 모란은 꽃으로 정원과 사원, 각종 연못과 공공기관을 장식하길 좋아하던 당나라 사람들이 최고로 친 꽃이다. 당대 시인 유우석(劉禹錫)은 “연못의 연꽃은 수수하긴 하지만 모란에 비해선 아취가 적다”며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인 모란이 만개할 때 장안 전체가 들뜰 수밖에 없다”고 흥얼거렸다. 부의 상징인 모란꽃모란꽃(사진)에 대한 애착은 수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수와 당 왕실에서 시작돼 민간으로 빠르게 번졌다. 화려함을 좋아하는 장안의 귀족들은 모란을 앞다퉈 사들였다. 연꽃이 불교와 관련된 정신적 고귀함의 상징이었다면 빨간색과 자주색 모란은 부의 상징이었다. 자연스럽게 “여러 꽃을 보았지만, 모란보다 아름다운 건 없다”거나 “오만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