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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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적절한 대우에 3개월마다 교대근무…피라미드는 임금 노동자들이 만들었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바라보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저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를 수 있지만 ‘강제노동’을 연상하는 것이 일반적일 듯싶다. 100년 남짓한 기간 2500만t에 이르는 엄청난 돌을 사람의 힘으로 옮겨 만든 피라미드야말로 노예의 고통을 표현하는 데 있어 최상의 상징물일 것이다. 칼 A 비트포겔도 피라미드를 “최소의 아이디어로 최대의 자재를 허비한 전제주의적 기념물”이라고 표현했다. 빵·맥주 등 구체적 임금 지급 기록하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처벌이 수반된 노예 노동으로 피라미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피라미드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는 일종의 ‘임금 노동자’가 만든 것이라는 게 역사학자의 일반적인 해석이다. 피라미드 건설과 관련해선 대규모 협동노동과 분업이 이뤄져야만 했고, 수십만의 사람이 같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돼야 했다. 이 과정에서 ‘채찍’만으로 대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실제로 피라미드를 만들던 고대 노동자의 야영지에서 발견된 흔적이나 테베 근방 데이르 엘 메디네에서 발견된 노동자 생활지 유적을 보면 모든 인부가 적절한(?) 대가를 받았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 숙련공뿐 아니라 채석장에서 석재를 옮겨 공사현장에 쌓아놓는 단순 비숙련 노동자까지도 빠짐없이 일정한 대가를 받았다. 측량가, 제도공, 공학자, 목수, 채석공은 물론 화가와 조각가 등 숙련·비숙련 가릴 것 없이 모두 숙식을 제공받고 노동의 대가를 챙겼다.2010년 이집트 고유물최고위원회는 제4왕조(기원전 2575~2467년)시대로 추정되는 대피라미드를 건설한 노동자의 묘지군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파라오 무덤 옆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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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이 자라지 못하게 된 메소포타미아…흙을 잘못 다스리면 문명이 사라졌다
흙은 동양뿐 아니라 서구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모두 농경이 경제생활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성서에 등장하는 첫 인간인 ‘아담’은 히브리어로 땅 또는 흙을 뜻하는 ‘아다마(adama)’에서 나왔다. ‘이브(하와·하바)’는 히브리어로 생활을 뜻하는 ‘하바(hava)’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적 사고에서 최초 남자와 여자의 이름은 ‘흙’과 ‘삶’의 결합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라틴어에서 사람을 뜻하는 ‘호모(homo)’ 역시 ‘살아있는 흙’을 뜻하는 단어 ‘후무스(humus)’에서 나왔다. 농경지 유지하려면 소금 유입 차단해야하지만 그처럼 중요한 흙이었지만 관리가 쉽지는 않았다. 흙의 관리에 실패했을 때 문명권의 경제가 위축되는 것은 물론, 문명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출발부터 인류는 흙 관리에서 삐걱거렸다. 인류는 최초로 농경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에서부터 지력 관리에 실패했다. 반건조 지대 지하수에 소금이 많이 녹아 있는 것을 몰랐던 탓이다. 메소포타미아 같은 반건조 지대에서 흙에 소금이 축적되는 것을 막으려면 적당한 수준에서 농경지에 물을 계속 대주거나 주기적으로 농경지를 묵혀야 했다. 하지만 강변의 경작 가능한 토지를 중심으로 생산량이 급증하고, 그에 따라 인구밀도가 갑작스럽게 높아지면서 이 같은 처방이 불가능해졌다. 배수시설이 없는 상황에서 비옥한 농경지는 짧은 시간에 불모지가 돼버렸다.지역의 젖줄인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연안 토지는 평평한 데다 돌도 적고, 정기적인 범람으로 신규 토사 유입도 원활해 비옥하긴 했다. 하지만 불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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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는 눈, 이에는 이…원초적 법 권력의 근원…함무라비 법전, 공적 응징과 계약의 기초 세웠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바빌로니아의 6대 왕이었던 함무라비(기원전 1792~기원전 1750)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재통일한 군주였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an eye for an eye, a tooth for a tooth·lex talionis)’란 문구로 널리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의 주인공이기도 하다.기원전 1772년께까지 작성 연대가 올라가는 이 법전은 당시의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282개 법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거짓 증언과 절도, 은닉에 대한 처벌 규정이 있고 노동, 재산, 상거래, 결혼, 이혼, 상속, 입양, 농업, 급여, 임대료에 관한 사법적인 문제도 다루고 있다. 바빌로니아와 외국에서 노예를 사고파는 것도 주요한 주제다. 그중 32개 조항에서 사형을 규정하고 있고 귀나 팔, 다리 등 신체를 자르는 것을 언급한 곳도 수두룩하다. 역사학자들은 이 법전에서 형벌 조항이 두드러지게 많고, 이전까지 단순한 배상의 대상이던 경범죄에 대해 사형으로 벌한다는 데서 “치안 문제를 가장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아직 안정되지 않은 사회였다”는 사회상을 추론하고 있다.법전에는 또 국내 상업과 국제 교역을 장려하기 위한 ‘카룸(karum)’이라는 곳을 두고 ‘상인들의 감독’인 와킬 탐카리(wakil tamkari)가 조직을 대표하도록 했다. 당시 상업 발달 수준이 만만치 않았다는 증좌다. 법전의 특징은 보복주의 형벌이 법전에 기록된 형벌의 특징은 보복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눈을 상하게 하면, 그의 눈을 상하게 한다. 한 귀족이 다른 귀족의 뼈를 부러뜨리면 그의 뼈를 부러뜨린다”라는 구절이 압권이다. “동등한 신분인 사람의 이를 부러뜨릴 경우 부러뜨린 사람의 이를 부러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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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인간은 그가 먹는 것들의 총합 뼈 속에는 그들의 역사가 담겨 있다
“인간은 그가 먹는 것들이다.”먹고 마시는 내용은 허다한 역사서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분야지만 사실 ‘먹는다’는 것은 인간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식품이 단순한 일화에 불과한 것도 아니었다. 페르낭 브로델의 주장처럼 설탕과 커피, 차, 알코올 같은 먹거리는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인이었다.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역사시대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먹고 마셔왔는지는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 그리고 과거 인간의 식문화를 파악해볼 수 있는 단서가 바로 뼈다. 인간의 뼈 속에는 삶의 이력이 담겨 있다. 자연스럽게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삶의 모습을 유추하는 데 있어 고대인의 인골은 중요한 정보원이자 단서가 된다.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 공급 상태가 남아인골의 평균 신장을 통해 당시의 영양 섭취 수준을 추정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여러 방법을 통해 고대인의 생활상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치아로 판독한 나이에 비해 다른 뼈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짧거나 두께가 얇을 경우, 인골의 주인공은 살아서 단백질 성분을 제대로 섭취하지 못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또 두개골의 두개관 부분의 밀도를 측정하거나 눈을 감싸는 부분의 다공성 여부를 통해 빈혈 여부를 알 수 있다. 비타민D 결핍은 구루병의 흔적으로 남게 되고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골막하 출혈 흔적이나 손실된 이빨 개수를 통해 괴혈병(비타민C 부족) 여부도 추론해 볼 수 있다.치아나 뼈에 남은 흔적을 통해 생애주기 중 언제 잘 먹었고 언제 고생했는지를 유추할 수도 있다. 치아나 뼈에 나이테처럼 영양 공급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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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인류 최초의 교역품은 비너스와 칼이었다
2008년 9월 독일 슈바벤 지역 펠스 동굴에서 3만5000년 전의 매머드 이빨에 조각된 비너스 상이 발견됐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조각품에 세간의 이목이 쏠렸다. 사실 비너스 상이라고 불리는 여인의 나체상은 문자가 없던 석기시대의 문명 교류와 인류의 장거리 이동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구대륙 각지에서 발견되면서 선사시대의 글로벌화한 문화교류의 흔적으로 꼽힌다. 19세기 말엽부터 서유럽과 동유럽, 시베리아의 여러 곳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속하는 여러 형태의 여인 나체상이 발굴됐다. 학자들은 이 여인상을 여성의 원형으로 간주해 ‘비너스’라고 이름 붙였다. 동서 문명 교류를 증명하는 비너스 상동서 문명 교류사 연구자인 정수일 박사에 따르면 1882년 프랑스 브라상푸이에서 처음 유물이 출토된 뒤 펠스의 비너스가 나오기 전까지 7개 지역 19개 장소에서 다양한 형태의 비너스 상이 다수 발견됐다. 구체적으로 레스퓌그와 브라상푸이 등 프랑스 다섯 곳에서 비너스 상이 나왔다. 이탈리아 세 곳, 독일 남부 한 곳도 출토지다. 유명한 발렌도르프 비너스 상이 나온 오스트리아 발렌도르프를 비롯해 옛 유고연방 지역 두 곳과 우크라이나 다섯 곳, 동시베리아의 코스텐키와 아브데보 등에서도 비너스 상이 발견됐다. 프랑스에서 바이칼호 연안까지 북방 유라시아 광활한 영역에 출토지가 산재해 있고 제작 연대는 보통 2만5000년에서 2만년 전의 후기 구석기시대로 추정된다. 대부분 크기가 왜소해 가장 작은 이탈리아 트라시메노 출토 비너스 상은 높이가 3.5㎝ 정도이고 가장 큰 이탈리아 사비냐노 출토품도 22㎝에 불과하다. 펠스 비너스도 높이가 겨우 6㎝다.1979년 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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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사벽' 인공지능이 사람처럼 할 수 없는 것은
옛 소련의 프로 체스선수 가리 키모비치 카스파로프는 1985년 세계 챔피언에 올라 2000년까지 최강자로 군림했다. 그런 카스파로프에게 1989년 도전자가 나타났다. 도전자는 인간이 아니라 미국 IBM이 만든 슈퍼컴퓨터 ‘딥소트’였다. 그러나 카스파로프가 두 판을 모두 이겼다. 기계가 인간 영역인 체스에서 인간을 이기기 어렵다는 게 세상의 반응이었다. IBM은 7년이 흐른 1996년 ‘딥블루’로 다시 도전해왔다. 여섯 판을 겨뤄 3승2무1패로 카스파로프가 또 이겼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재대결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빚어졌다. 카스파로프가 1승3무2패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이후 몇 차례 대결에서 기계가 계속 이기자 ‘인간 대 기계’의 체스 대결은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한동안 잊혔던 ‘생각하는 기계’가 2011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슈퍼컴퓨터 ‘왓슨’이 미국 퀴즈쇼 ‘제퍼디’에서 인간 챔피언 두 명과 겨룬 것이다. 왓슨은 사람이 말하는 자연어의 소리와 의미를 이해했고, 단어의 뉘앙스까지 정확히 파악해 여유 있게 우승했다.2016년 3월 또 한 번 세기의 대결이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에는 바둑이었다. 결과는 인공지능(AI)의 승리였다. 구글이 6억달러에 사들인 영국 벤처기업 딥마인드가 개발한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승1패로 압도했다. 이제 기계가 넘보지 못할 인간의 영역은 없고, 인간의 일자리를 기계가 대체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기계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일자리가 사라진 미래의 삶은 어떨까? 온갖 비관적인 질문과 잿빛 전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의사가 된 왓슨, 암 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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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과학에도 경제원리가 작용할까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출신 천문학자 겸 가톨릭 사제였는데 평생 지동설을 연구했다. 코페르니쿠스가 살던 시대에는 망원경이 변변찮아서 육안으로 천체를 관찰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그의 지동설은 과학적으로 입증된 게 아니라 직관적인 철학에 가까웠고 허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가 지동설에 도달한 과정은 칸트가 훗날 ‘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이라고 명명했듯이 근대과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 의심을 품은 것은 지구를 우주 중심에 두면 금성 화성 등의 궤도가 찌그러지고 오락가락하는 모순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는 행성이 원을 그리며 회전한다는 원리에 위배되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기본 전제를 180도 뒤집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즉 우주의 중심에 지구 대신 태양을 둔 것이었다. 태양이 고정되어 있고 행성들이 그 주위를 도는 것으로 계산해본 결과 천동설의 모순이 명쾌하게 해소되었다.‘코페르니쿠스의 전환’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아니다. 14세기부터 서서히 형성된 합리적 의심과 논리적 사고의 연장선이다. 그 단초가 된 추론법이 ‘오컴의 면도날’이다. 오컴의 면도날은 14세기 영국 논리학자인 윌리엄 오컴이 신학 논쟁에서 펼친 논리 전개 방식에서 유래했다. 어떤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이 최선에 가깝다는 의미다. 오컴의 면도날은 ‘단순한 것이 최선’이라는 점에서 ‘사고 절약의 원칙’ ‘경제성의 원칙’이라고도 부른다. 길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것보다 직선으로 가는 게 빠른 것처럼, 인류가 오랜 기간 축적한 경험 법칙을 논리 철학에 적용한 것이다.오컴의 면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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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욱 기자의 세계사 속 경제사
자원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역청은 요즘 말로 아스팔트나 타르를 가리키지만, 고대에는 석유를 통칭하던 말이다. 고대인들은 역청을 죽은 고래의 피나 유황이 농축된 이슬로 보았다. 시커멓고 먹을 수도 없는 데다 냄새가 심해 기피 대상이었다. 고대 전쟁에서 역청은 화공을 펼치는 전략 무기이기도 했다. 특히 동로마제국의 ‘그리스의 불’은 역청으로 만든 최종 병기로 유명했다. ‘그리스의 불’ 제조법은 제국의 일급기밀이어서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BC 850년께 아시리아에서 유황, 기름, 역청을 혼합한 나프타에 불을 붙여 화공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다.석유가 널리 알려진 것은 근대에 등불 연료로 쓰이면서다. 그러나 석유를 그대로 태우면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났고, 별로 밝지도 않았다. 석유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증류하면 연료용으로 적합하다는 생각은 17세기에도 있었지만 현실화된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1858년 에드윈 드레이크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조명용 연료를 구하기 위해 땅을 굴착하다 석유를 발견했다. 드레이크는 최초의 유정 굴착자로 이름을 남겼다. 지표면에 고여 있는 역청을 이용하던 수준에서 땅속 채굴을 통해 대량 공급이 가능해진 것이다. 20세기 자동차 시대를 연 오일러시드레이크의 채굴 목적은 등불용 연료를 찾는 것이었다. 석유를 정제해 나온 등유는 등불용으로 적합해 19세기 후반 세계에 널리 보급되었다. 캘리포니아, 텍사스 등 유전이 발견되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가는 ‘오일러시’가 일어났다. 이후에 석유를 골드러시 시대의 황금에 빗대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초기 석유산업은 등유를 추출하고 남은 검고 끈적끈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