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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혼돈의 시대…제대로 아는 것이 힘이다”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정치가,과학자,변호사,저술가이다.그는 후대에도 회자되는 많은 명언 · 명구들을 남겼다.철학자와 과학자로서 베이컨이 남긴 으뜸가는 명언은 '아는 것이 힘이다'일 것이다.이것은 사물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그렇다면 사물에 관한 지식을 가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자연을 움직이는 법칙을 발견하면 자연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고,자연법칙을 발견하는 방법을 발견한다면 그 방법론에 따라서 자연법칙을 계속 발견해 나갈 수 있다.사물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다.사물에 관한 지식을 발견하는 방법론을 발견하면 이에 따라 사물에 대한 지식을 계속 얻을 수 있게 되고 가장 힘있는 자가 될 수 있다.베이컨은 인간에게 힘을 부여하는 지식은 '과학적 지식'을 뜻하며 우리가 과학적 지식을 추구해 나가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우상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베이컨이 지적한 첫 번째 우상은 '종족의 우상'이다.'종족의 우상'은 인간성 자체에 내재해 있는 뿌리 깊은 한계를 뜻한다.인간적 관점에서 세상의 사물을 파악하려고 하는 것 자체에서 드러나는 한계다.인간 자신이 우주의 한 부분에 불과한데도 그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한 가지 예다.인간은 자신이 결국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종종 망각한다.자연의 법칙에 지배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도 한다.인간이 만물의 척도가 될 수는 없다.두 번째 '동굴의 우상'은 각 개인이 갖고 있는 한계를 말한다.개인이 성장과정에 겪은 특수경험,특정한 형태의 교육,부모나 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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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지유신 성공 뒤엔 ‘타협의 정신’ 있었다

    이태진 <서울대 한국사 명예교수> 우리나라는 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한국사 전공자로서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이와 관련해 으레 들려 오는 물음은 군주(고종)가 무능하고 관료들이 부패하지 않았던가,유교의 죄가 크지 않은가 등이다.이러한 화두는 반성의 의미를 담은 듯하지만 정답으로 삼기에는 너무 직설적일 뿐더러 일본 명치유신의 화려한 성공담이 옆에서 기다리고 있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런 설명은 일제가 우리로 하여금 저들의 통치를 달게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던 이른바 식민주의 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근래 학계 일각에서 조선왕조 체력 소진설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론이 제시돼 젊은 학생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어 더욱 경계심이 앞선다.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서양의 기계 문명,자본주의 경제,근대국가 체제 등을 수용하는 데 먼저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중국과 러시아 등 대국들을 차례로 무너뜨림으로써 서구 열강을 놀라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성공의 신화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의 '실패'에 대한 답도 어쩌면 여기서 얻어질 수 있을지 모른다.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이 출현한 후 일본도 처음에는 우리 대원군처럼 강한 외세 배격에 나섰다. 초기에는 양이(攘夷) 운동이 판을 쳤다. 막부 내에 강 · 온 양론이 대립했고,지방의 번(藩) 가운데는 서양 외교관을 살해하고 외국 선박을 공격해 말썽을 일으킨 곳도 있었다. 또 외세에 대한 투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황과 막부 양측이 합력하는 공무(公武) 합체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서양 군대와 두어 차례 힘을 겨뤄 본 뒤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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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라우마' 환자들이 바흐를 듣는 까닭은?

    김진엽 <서울대 미학과 교수> "어렸을 때 나는 고통받는 마음을 제 연주로 치유해 주고 싶었죠. 그게 제 임무 같았어요. 음악의 아름다움을 삶의 조화에 연결시키려 했죠.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어요. 바흐의 '샤콘느'를 시스틴 성당에서 연주할 수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이 사라질 거라고요."20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 한 명이었던 예후디 메뉴인이 남긴 말이다. 메뉴인 같은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사상가들 중에도 예술이 우리의 상처 받은 마음을 치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곧잘 있다. 먼저 고대 그리스의 저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자.아리스토텔레스는 '오이디푸스 대왕' 같은 비극을 보면 카타르시스를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주장에 더하여 별반의 부연 설명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카타르시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분분하다. 그 분분한 의견들 중에서 수장 격은 카타르시스를 치유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이다. 이 해석은 카타르시스가 의학 용어에서 유래했다는 점에 착안한다. 카타르시스는 의학적 용어로는 '소화기관에 이상이 생겨 막혔을 때 관장시켜 노폐물을 배설시켜 주는 치료'를 의미한다. 물리적 음식물만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심리적 감정도 가슴 속에 응어리지면 한이 되어 병을 불러일으킨다. 응어리진 한은 풀어 주어야 한다. 어떤 방법이 있을까. 슬픔과 고통에 빠진 비극의 주인공을 바라보며 펑펑 울다 보면,관람객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도 씻겨 내려가지 않을까. 그리하여 마음속이 정화되지 않을까. 실제로 비극을 보고 흘리는 눈물을 과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스트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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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에게 正義란 ‘공정한 성과분배·자율보장’

    김형철 <연세대 철학과 교수> “It’s not fair(이건 공평하지 않아요)!” 미국 시카고 유학시절 유치원에 다녀온 딸은 동생이 사탕을 먹고 있는 것을 보더니 울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소리쳤다. 평소 자기한테는 단것을 엄격히 금지했는데 동생한테만 허용되는 것을 보고 무척이나 속상했던 모양이다. 철학자들 가운데는 공평한 것이 ‘정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딸에게 비친 나는 정의롭지 못한 아빠였다. 그런데 공평하면 다 정의로운 것일까. 정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철학자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정의로움에 대한 논의를 많이 해 왔다. 플라톤은 정의를 ‘각자에 합당한 몫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지도자는 지혜,전사 계급은 용기,근로자 계급은 근면의 덕을 행사하면,종합적인 화합의 결과로 정의가 국가에 깃든다고 보았다. 각 계급은 각자의 몫이 불평등한 것에 대하여 불평해서는 안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특히 분배 정의를 ‘평등한 자를 평등하게 대우해 주고,불평등한 자를 불평등하게 대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등한 자와 불평등한 자를 구분하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에,이 정의는 ‘형식적 정의’라고 불린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무조건적인 평등이 정의는 아니라고 봤다는 것이다. 하버드대학 철학 교수였던 존 롤스(John Rawls·1921~2002)는 평등과 자유 사이의 갈등 관계에서 빚어지는 모순을 해결하려고 평생 ‘정의’의 문제 하나만을 탐구했다. 평등에는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결과의 평등이다. 즉 모두가 동일한 몫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기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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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예프스키 “인간은 이익만 좇는 존재가 아니다”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인간은 누구나 다 불완전하지만 존엄하다. 그 존엄성 안에서만 평등하며 모든 사람은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결국 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다."위대한 시인,소설가,극작가는 하나같이 인간의 속내를 읽는 데 도가 튼 사람들이다. 문학이란 것이 원래 사람에 관한,사람을 위한,사람에 의한 이야기이니 그런가 보다. 좋은 문학 작품은 마치 내시경처럼 인간의 생각과 마음을 속속들이 파헤쳐 보여 준다. 시공을 초월하는 인간의 본질을 콕 짚어 읽어 낸다.문학이 제공하는 '사람 읽기'는 단순한 독서의 즐거움을 뛰어넘어 매우 '실용적인' 체험이 될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직업도 인간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지 않으며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인간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작게는 생존 차원에서부터 크게는 리더십 단계에 이르기까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수많은 대문호들 중에서도 특히 19세기 러시아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을 읽고 사회를 읽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작가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인간 심연을 꿰뚫어 보는 사람' 혹은 '영혼의 선견자'라는 별명까지 붙여졌다. 이 영혼의 선견자가 바라본 인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인간의 마음 저 어두운 심연에서 무엇을 발견했을까. 그의 사람 읽기는 대충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생활자의 수기》라는 소설에서 인간은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며 불합리한 존재라고 못박는다. 인간은 조화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조화를 파괴하고,사랑하는 동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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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더라” 소문이 만들어 낸 광기의 역사

    루머와 진실 김회은 <텍사스A&M대 교수> 묀치제 호수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옷깃을 단단히 여미게 했던 1900년 3월13일. 살얼음이 낀 호숫가에서 발견된 꾸러미 하나가 베를린에서 북동쪽으로 약 370㎞ 떨어진 인구 1만명의 소도시 코니츠 주민들의 마음까지 차갑게 얼어붙도록 만들었다. 꾸러미 안에서 발견된 것은 빳빳한 포장지 안에 단단한 노끈으로 꽁꽁 동여매진,팔 다리와 머리가 잘려 나간 사체(死體). 이틀 전인 3월11일 일요일 오후에 사라졌던 18세 고등학생 에른스트 빈터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끔찍하지만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이 날의 발견은 그러나 몇 가지 정황이 우연히 겹치면서 인간의 유쾌하지 못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피를 고의적으로 빼낸 것처럼 사체에 피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목이 잘려서 살해된 것 같다는 부검 소견,살해된 시점이 부활절에 가까웠다는 점,거기다 가장 결정적으로 시신을 분해한 칼놀림이 마치 외과 의사나 푸줏간 주인이 한 것처럼 예사롭지 않았다는 사실이 모두 결합되면서 코니츠 주민들 사이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유대인이자 푸줏간 주인이었던 57세의 아돌프 레비가 유대교 제사 의식을 행하면서 소년을 제물로 삼아 살해했다는 것이었다.'유대인 제례살해(ritual murder)'라는 전설은 부활절 즈음 유대인들이 기독교도 소년을 납치해 거꾸로 매달아 고문한 후 목을 따서 피를 받고 그 피로 누룩 없는 빵을 만들어 먹는다는 상상 속의 이야기로 12세기 중반 유럽에서 처음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코니츠 사건의 중요성은 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20세기 초반 독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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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자크 브로스 <나무의 신화> <끝>

    인간의 불행은 나무와 숲을 파괴하면서 시작됐다 살아가면서 가장 솔직한 경외심을 품게 되는 순간은 바람에 춤추는 나무들을 보고 있을 때이다. 그 순간의 느낌을 표현하려면,아니 무엇인가가 넘실넘실하게 가득한 그 충만한 느낌의 언저리라도 언어로 접근해 보려면 '경외심'이라는 단어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느낌은 삶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고용한 응시로 만나게 되는 위무이기도 하고,세상이 나무와 함께 춤추면서 나에게 다가올 때 그 다가오는 걸음 한 발자국마다 커지는 서늘한 엄숙함이기도 하다. 나뭇가지들은 그 손아귀로 하늘을 움켜쥐었다가 풀어놓으면서 거대한 세상을 잊고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타한다. 혹여,경외심 외에 다른 단어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햇빛에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그 군무 속에서 일렁이는 빛의 향연을 펼치면 날카로운 무엇인가가 관통하고 지나간다. 바라보는 이를 꿰뚫는 그 순간을 드러내기 위한 적절한 말이 생명의 찬란함인지 기쁨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단 나처럼 몇 시간이고 매혹되어 나무를 구경하는 사람만 그러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모든 이들이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만은 다채로운 감동의 발원과 마주한다. 릴케도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을 이렇게 남겼다. "마치 나무의 내면으로부터,거의 감지할 수 없는 떨림들이 그의 가슴속을 지나간 것 같다. 그는 한 번도 이보다 더 부드러운 움직임을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이를 테면 하나의 영혼처럼 다루어졌으며,물리적인 명료함으로는 도저히 파악될 수 없는 사소한 움직임마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한 느낌에 덧붙여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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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 토르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

    부자들의 과시적 욕망을 자유로운 언어로 질타1899년 출간된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정치한 경제 분석서라기보다는 부자들에 대한 조롱과 야유에 가까운 이단적 일갈이었다. 이 책에서 그가 거머쥔 유일한 이론적 수단은 고전에 대한 학자적 겸양도 죽어 버린 책들의 고답적 축적도 아닌,천박하고 세속적인 일상적 사례와 언어들이었다. 그것은 베블런의 학문적 소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오히려 그러한 학문적 소양들이 지니는 유한계급적 낭비성을 경멸했던 그가 의도적으로 생활세계 내부의 직접적 사례들을 통해 부(富)의 경제사를 재구성해 보려는 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사회 경제학의 이론적 맥락으로부터 자유로운 그의 언어들은 부자들의 사치와 낭비에 대하여 전혀 새로운 무기를 들고 마음껏 직격탄을 날린다. 결코 마르크스적이지 않은 그 무기의 가장 중요한 제원은 바로 '과시'다. 유한계급(有閑階級·leisure class)의 구성원들은 그 이름 그대로 한가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의무적으로 한가해야 한다. 생산 활동과 육체적 노동 행위를 천박하고 불경스러운 것으로 여겨야만 하는 그들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활동은 여가와 사치와 낭비와 소비다. 물론 그들에게 한가해야만 한다는 사회적 책무가 강요된 것은 아니다. 그들의 의무는 그들이 속한 계급 집단 내부의 과시적 아비투스(habitus)에 따른 다분히 자발적인 의지와 실천의 결과다. 이러한 실천 행위를 통해 그들은 하위 계급과 자신들이 속한 집단을 구별짓고, 그들의 집단 내부에서도 여러 국면들을 통해 좀 더 과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자 욕망한다. 이 같은 과시적 욕망은 오늘날의 부자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