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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오노레 드 발자크 '나귀 가죽'
욕망, 인간 이해의 첫걸음 어떤 작가들은 한번 만나면 혈육보다도 더 깊고 오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나의 경우, 보들레르와 플로베르, 발자크 등이 그들이다. 발자크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소설 쓰기에 매달려 괴물처럼 살다 간 작가인 만큼, 독자로서 그의 전작(全作)을 읽어내기란 한평생으로 모자란다. 근래에 한국어로 초역된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은 인류사의 전무후무한 소설 프로젝트인 ‘인간극’의 서막을 차지한 의미심장한 작품들이다.여기 한 소년이 있다. 루이 랑베르라는 이 소년은 다섯 살 때 우연히 구약성경을 접한 뒤 오직 책만을 끼고 살아온 유별난 존재. 발자크의 대표작 《외제니 그랑데》나 《고리오 영감》처럼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표제(表題)로 삼은 이 소설이 한층 흥미로운 것은 이 예사롭지 않은 소년의 신비로운 예지력과 광기가 발자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곧 《루이 랑베르》(1832)는 발자크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셈. 로댕이 조각으로 재현한 괴팍하고 완고해 보이는 발자크의 모습을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작가 자신이 그린 소년의 초상은 매우 신비롭고 비장하다. 지금까지 한국 독자들에게 발자크와 그의 소설에 대한 인상은 실체보다 훨씬 편협하고 고리타분한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자크 소설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의 등장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발자크는 백 편에 이르는 총체소설 ‘인간극’을 집필하면서, 마치 과학자처럼 획기적인 작법을 창안해 적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인물재등장 수법’이다. 루이 랑베르가 18세에 방돔기숙학교를 나와 만난 여인 폴린은 《나귀 가죽》의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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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외젠 이오네스코 '외로운 남자'
부조리한 삶에 갇힌 자의 고독글만 써서 먹고 사는 전업작가 생활 25년에 딱 한 번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길지도 않은 6개월에 불과한 그 직장생활 덕분에 나는 어쩌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위험하고 고독한’ 전업작가의 길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고 3년쯤 지난, 결혼을 앞둔 때였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현듯 ‘가장’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가격했다. 느닷없는 습격에 나는 계란 프라이가 바짝 타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자취집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체증과도 같은 무거운 압박감에 1주일을 내리 시달렸다. 취직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첫 직장이자 ‘내 생애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직장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두어 달쯤 지났을 때 결혼을 했고, 미어터지는 출근버스를 피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 데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났을 때, 뭔지 모르게 이상했다. 가장이라는 압박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체증이 가슴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탁받은 원고의 마감 기한은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고, 속절없이 지나갔다. 몇 번 기한을 연장했지만 끝내 원고를 넘기지 못한 채 펑크를 내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나는 6개월 동안 단 한 줄의 ‘내 글’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사직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다시 전업작가로 돌아온 봄날 오후, 서가로 무심히 뻗친 내 손에 얇은 책 한 권이 잡혔다. 한 해 전, 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던 친구가 신간을 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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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빌헬름 게나치노‘이날을 위한 우산’
두 종류의 우산 몇 년 전에 큰 사고를 당했다. 길고긴 입원 생활이 끝난 후, 어느 날부턴가 나는 거짓말처럼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나를 덮치는 꿈이었다. 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벌떡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새벽, 여느 날처럼 악몽에서 깬 나는 한동안 미친 듯이 낄낄거렸다. 헛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 순간에 하필 시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야말로 기가 차다가 콱 막힐 노릇이었다. 그날 이후, 악몽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떤 진실은 거짓말보다 더 감쪽같다는 걸 알았다. 빛은 꺼졌고 헛웃음은 그쳤다. 나는 예전처럼 밝아졌다. 아주 가끔, 내가 빛이 되는 희미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을 읽는 내내, 지난 몇 년간의 특정 장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애인을 잃고 사례금을 삭감당한 주인공의 모습이 자신감과 용기를 상실했던 당시의 내 모습과 자꾸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누군가나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불편하거나 마음 아프고, 종종 참을 수 없이 끔찍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이때껏 하던 대로, 그것을 감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새로 나온 구두를 신고 하염없이 걸을 뿐이다. 여기서 저기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뗄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한 산책이 아니다. 그는 다분히 직업적으로 걸을 뿐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 마주했을 때, 하던 일을 평소와 다름없이 행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어렵다. 울분을 삭이는 데 써야 할 힘까지, 일상에 통째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힘내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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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앤절라 카터 ‘피로 물든 방’
엄마는 아무나 하나 내 나이 서른여섯에 엄마는 뭘 했나, 떠올려본 적이 있다. 지난 추석 때였고, 대낮부터 전 부치는 엄마 옆에서 그걸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다가 살짝 취기가 돌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어쩌다 저 여자는 나를 갖고 나를 낳아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 내 어미가 되었나. 세상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 우리가 모녀라는 이름으로 묶였나. 엄마가 손으로 찢어 입에 넣어준 묵은 김치를 씹으며 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와 가장 먼저 한 것이 울면서 엄마의 김치를 냉동실에 얼리는 일이었다고 고백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히 그는 천재다, 이런 고마운 힌트라니.엄마 나이 서른여섯에 난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 엄마는 그야말로 진짜배기 엄마였던 셈. 회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때부터 회칼을 썩썩 갈아 생선살을 뜨기 시작하는 게 엄마였고, 마당을 부리나케 쏘다니던 쥐새끼를 장독대 뒤로 몰아서는 연탄집게로 찍, 여보란 듯 눌러 죽이는 것도 엄마였으며, 키우던 진돗개가 동네 개천에 빠졌을 때 동시에 첨벙, 그 더러운 시궁창에 뛰어들어 원더우먼처럼 한 팔에 개를 안고 나온 것도 엄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도둑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이 나돌자 엄마가 꺼내 보인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가스총이었다.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총을 처음 만졌을 때의 그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라니, 엄마는 가스총을 장롱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여기 총을 가진 또 한 명의 엄마가 있다. “역경을 겪느라 아주 괴짜가 된 엄마는 이 권총을 언제나 가방에 넣고 다녔다”지. 우와, 장롱도 아니고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라면 이 엄마, 엄청 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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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레스코프 '왼손잡이'
당신 왼손에 새겨진 글자 하나세상엔 두 가지 종류의 소설이 있다. 종이에 메모를 하면서 따라 읽어야 무슨 이야기인가 대충 감 잡을 수 있는 소설이 있는가 하면 그냥 까닥까닥 엄지발가락을 흔들면서 읽어도 아무 지장 없는 소설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러시아 1급 소설들은 전자인데, 딱히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이 주로 ‘스키’나 ‘레프’ ‘세프’로 끝나기 때문이다. 분명 이 ‘스키’가 그 ‘스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딴 ‘스키’일 때 느껴지는 허망함(그러면서 등장인물들은 또 왜 그다지도 많단 말인가. ‘스키’들이 떼로 등장할 때의 어리둥절함이란, 말을 말자). 그러니 어쩌나. 백지 위에 남의 집 가계도를 열심히 그려가면서 소설을 읽어나갈 수밖에. 우리에게 러시아 소설들이 시베리아 잣나무처럼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좋을 존재로 남은 것은 어쩌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제정 러시아의 작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소설 《왼손잡이》는 따로 메모가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이름이 그냥 ‘왼손잡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우리에게 도통 메모할 틈을 주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서둘러 넘어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즉, 플롯의 비밀을 알고 있는 작가의 소설이란 뜻이다.사실 ‘왼손잡이’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영국에서 현미경을 통해서야 볼 수 있을 만큼 작은 인공 벼룩(이 벼룩은 열쇠를 넣어 돌리면 펄쩍펄쩍 뛰어오르기까지 한다)을 선물받은 러시아 황제는 자국의 기술이 그보다 더 뛰어나다고 믿었고, 그래서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장인들에게 이 인조 미생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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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우리는 모두 더블린 사람들 어떤 도시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낳기도 하지만 어떤 문학작품은 도시의 운명을 바꾸기도 한다. 더블린이라는 도시가 없었다면 제임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이라는 소설을 쓸 수 없었겠지만 더블린에 사는 인간 군상을 그린 ‘더블린 사람들’이 세상에 나온 뒤로 더블린은 더 이상 그 이전의 더블린일 수 없게 되었다. ‘더블린 사람들’ 이전 더블린은 아일랜드의 한 도시였지만 ‘더블린 사람들’ 이후 더블린은 ‘더블린 사람들’이 사는 도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더블린이라는 도시에 살아서 더블린 사람들인 것이 아니라 더블린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서 더블린인 것이다. 뉴욕이라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뉴요커가 되는 것이 아니라 뉴요커들이 사는 곳이 뉴욕인 것처럼, 파리에 사는 사람들이 파리지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파리지앵이 사는 곳이 파리인 것처럼. 대개는 도시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규정하지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의 특징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가 뉴요커라고 부를 때, 파리지앵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이미지들이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의 물리적 특성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처럼. 그러니 우리가 뉴요커라고 부를 때, 파리지앵이라고 부를 때 떠올리는 것들은 특정한 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특성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욕망에 더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더블린 사람들’이야말로 더블린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구심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머지 더블린이라는 도시와 거의 무관해 보일 정도다. 그러니까 ‘더블린 사람들’이란 더블린이라는 특정한 공간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고유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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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지지워지 않는 얼룩 초등학교 6년 내내 교복을 입어야 하는 학교에 다닌 나는 유독 교복에 얽힌 에피소드가 많다. 그때는 하복도 동복도 달랑 한 벌뿐이었고 동복 상의에 부착하는 흰 깃만 두 개였다. 5학년 여름,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몸이 아파 학교에 나오지 못한 K의 집에 병문안을 갔다. 그런데 그날 내가 점심을 먹으며 흘린 반찬 국물이 교복 상의의 왼쪽 가슴께에 묻어 있어 계속 신경이 쓰였다. K는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소파에 누워 있었고 K의 엄마가 과일을 가지고 나와 앉아 찬찬히 나를 뜯어보기 시작했다. 같은 동네라 부모가 뭘 하고 사는지 정도는 다 아는 사이였고 친구의 엄마는 칭찬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키가 크구나. 그런데 교복에 뭘 묻히고 다니니 여자애가.” K와 나는 그 후로 더 친해지지 못했고 남녀 학교로 갈라져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날 수돗가에 가 얼룩을 지워보려고 그토록 애썼지만 얼룩은 남아 있었고 K와 친해지지 못한 이유가 그 얼룩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었다.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인생의 얼룩에 관한 소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에게나 지워지지 않는 인생의 얼룩 하나쯤은 있을 수 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이 소설의 제목처럼 ‘오점’(stain)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필립 로스는 80세에 가까운 할아버지이고 영미권의 평론가들이 ‘현대 미국을 충실히 기록한 거장’이라고 평가하는 작가다. 처음 읽은 그의 작품은 미국 남성 잡지 ‘플레이보이’에 연재되었던 작품들을 모은 앤솔러지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익사체’에 실린 ‘이웃집 남자’라는 단편소설이었다. 자신의 아내가 이웃집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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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이반 투르게네프 ‘아버지와 아들’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들들 세상에는 수많은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최근 제가 접한 것만 해도 몇 가지는 떠올릴 수 있겠군요. 코맥 매카시의 ‘로드’는 아버지와 아들의 과묵한 종말론적 여행기입니다. ‘한낮의 시선’을 포함한 이승우의 소설은 아버지=신에 대한 기나긴 애증서사라고 해도 좋을 듯합니다. 김애란의 근작 ‘두근두근 내 인생’은 먼저 늙어가는 자식과 어린 부모에 대한 속 깊은 청춘소설입니다. 황정은의 ‘모자’는 아버지가 조용하고 침울한 모자가 되어버리는 매력적인 이야기였죠.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의 원제는 ‘아버지들과 아들들’입니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어떤 아버지와 어떤 아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구세대로서의 ‘아버지들’과 신세대로서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인 거죠. 소설 속의 아버지들은 귀족의 정신과 로맨틱한 몽상, 그리고 예술에 대한 숭배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유럽과 러시아에서 19세기 초중반 수십년을 풍미한 게 이른바 낭만주의였으니 그럴 법도 합니다. 그런 낭만적 ‘아버지들’에 대한 ‘아들들’의 반항이 시작됩니다. 예술적 ‘교양’이 넘쳤던 ‘아버지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들들은 거칠고 완강한 유물론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과 영혼의 단련보다 개구리 해부를 선호했습니다. 그들을 매료시킨 것은 고상한 미적 취향이 아니라 유물론적인 사고였습니다. 물론 아직 성숙한 ‘이념’에는 이르지 못해서 ‘속류적’ 유물론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사람들은 이 신세대들을 ‘허무주의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니힐리즘이라는 말 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