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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양 기타

    (50) 존 치버 '팔코너'

    억압과 소외, 고통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고통을 묘사하는 어떤 수사(修辭)도 현실의 무수한 개별적 고통들 앞에서는 무력하다. 나는 고통에 대해 다만 멀리서 응시하는 소설이 좋다. 점점 더 그렇게 되어 간다. 멀리서, 라는 표현은 물론 몹시 주관적인 것이다. 그럴 때 내 거리감각의 기준이 되는 작가는 언제나 존 치버다. 치버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기억한다. 막 첫 책이 나왔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계속 소설을 쓰며 살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방송국에서 단막극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고 나에게 새 드라마의 작가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는 각자가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 얘기를 하게 되었다. 혹시 존 치버를 읽어보았느냐고 그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이름은 들었지만 아직 읽어본 적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고백했다. 언젠가는 꼭 「다리의 천사」 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요. 절판되지 않은 치버의 한국어 번역본은 정우사에서 나온 『주홍빛 이삿짐 트럭』뿐이었다. 간신히 한 권을 구했다. 맨 앞에 실린 단편을 읽은 후 나는 어떤 소설은 한 인간의 내부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거기 실린 단편들을 차례로 다 읽은 후에는 책을 덮고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그에게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고 했다. 시간이 없어요. 아마도 나는 더듬더듬 말했을 것이다. 드라마를 쓸 시간이 아니라 다른 것과 나눌 시간이 없는 거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소설이 쓰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고도, 내가 「다리의 천사」의 세계에 발끝이라도 닿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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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쓰시마 유코 '웃는 늑대'

    순수한 어린 짐승들의 모험쓰시마 유코의 『웃는 늑대』는 늑대에 대한 여러 문헌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도도하고 날렵한 짐승의 카리스마를 한껏 서술한 후 본격적인 이야기의 무대는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살고 있는 묘지로 옮겨간다. 글의 배경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한 직후, 일본이다. 묘지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은 배가 고프면 새를 잡아 구워 먹고 밤이 되면 낡은 모포 속에서 잠을 청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이는 무덤 앞에서 동반자살을 시도한 세 남녀를 발견한다. 불륜 관계인 여자와 화가, 그리고 여자의 남편이다. 아이의 아버지가 경찰에 신고를 한 덕에 죽기 직전의 여자는 가까스로 구출된다. 이 일로 인해 더이상 묘지에서 살 수 없게 된 두 부자는 다른 곳을 떠돌게 되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객사하고 만다. 세월이 흐른 후 소년이 된 아이는 무덤가에서 죽은 화가의 아내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녀의 어린 딸과 마주친다. 그렇게 만난 열일곱 살의 소년과 열두 살의 소녀는 무작정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서로를 『정글북』에 나오는 ‘아켈라’와 ‘모글리’라 부르기로 약속한다.이 무렵 떠오르는 기억이 하나 있었다. 내가 여섯 살쯤 되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한 남자아이와 함께 눈이 펑펑 내리는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이름이나 얼굴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지만 살이 까무잡잡하고 콧등에 작은 흉터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어스름해진 저녁 하늘 아래를 종종걸음 치며 걸었다. 그애는 집에 늦게 들어가서 할머니께 혼날 게 분명하다며 걱정스러워했다. 나는 그애에게 어른들이 살지 않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자고 말했다. 그애는 솔깃해했다.“버스를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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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하인리히 뵐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

    수화기 너머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광대의 독백…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하인리히 뵐과 나의 첫 만남에 대해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대학에 다니며 시를 쓰던 문학청년 시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나는 자주 헌책방을 드나들었다. 하인리히 뵐의 책을 처음 만난 것도 헌책방에서였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하는 희귀한 책들의 설렘이란 어떤 다른 종류의 감응으로도 바꾸고 싶지 않을 정도로 경이에 가득 찬 경험이었고, 누렇고 빛바랜 페이지의 갈피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누군가의 기록이나 낙서들, 메모들, 때로는 어떤 편지 비슷한 쪽지들이나 영수증 따위의 목록은 헌책방에서만 발견되어지는 진귀한 보물들이다. 하인리히 뵐의 『언어는 자유의 마지막 보루다』라는 책을 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하던 순간의 경이에 대해 나는 자주 후배들이나 대학의 강단에서 이야기하곤 한다. 사실 지금은 절판이 되어버린 이 책을 틈날 때마다 소개하는 이유는 책 속에 담긴 한 문장 때문이다. “작가는 대충 임신할 수 없습니다.” 하인리히 뵐은 제자들에게 말한다. 너희의 상상력은 이미 너희 안에서 완전히 임신되어 있다고. 그것을 꺼내는 일이 문학이 아니라, 그것을 먼저 응시하는 일이 인간의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시간이 흘러 하인리히 뵐의 『어느 어릿광대의 견해』를 읽고 나서 조금 더 농밀하게 작가의 뜻에 교감하게 되었다. 전후 독일의 폐허문학 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가에게 상상력이란 포로수용소에서 종전을 맞이한 자가 바라보는 새로운 과제였고, 그에게 문학이란 그 폐허 위에서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품는 일이었다. 노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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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이즈미 교카 '고야산 스님'

    아련한 통증 같은 불가해함쓰레기를 태우다가 비닐농이 손가락 끝에 떨어져 물집이 잡혔다. 팥알보다도 작은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잡아 뜯었는데 의외로 피부 깊이 뜯겨 나왔다. 금방 피가 쏟아지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팥알처럼 붉은 화상이 된 것이었다. 마침 그것이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이어서 여러 날 동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서랍 속의 이런저런 연고를 바르며 며칠이 지나자 점차 아픔은 간지러움 비슷한 느낌으로 변하고 이어서 뻐근한 느낌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그것을 만질 때만이 그랬다.그 작은 흉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이 소설 「고야산 스님」의 감상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처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만지면 뻐근하게 전해오는 무엇이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나 그 초점에서는 아련히 타는 감정이 고인다.이렇게 시작한다. “참모본부가 편찬한 지도를 또다시 펼쳐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워낙 길이 험난하다보니 손대기만 해도 후텁지근한 여행용 법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표지 달린 접책을 끄집어냈다네. 히다(飛)에서 신슈(信州)로 넘어오는 깊은 산속에 뚫린 샛길은 잠시 쉬어갈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지.”‘저쪽’에 참모본부가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여기는 원시림 속이며 주인공은 ‘법의’를 입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길 위에 있다. 길 가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도인(道人) 혹은 스님이다. 길을 내는 자라 해도 되겠고 길을 닦는 자라 해도 되겠다. 이 소설은 그 길 위에서 만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암시적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당시 일본 전통 사회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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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존 업다이크 '달려라, 토끼'

    그때 달려간 토끼는 어디에 있나지금 나이의 절반쯤 되었을 때 내게는 ‘미국 3부작’처럼 여겨졌던 세 편의 소설이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호밀밭의 파수꾼』『달려라, 토끼』였다. 어째서 내가 이런 3부작을 구성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그때까지 이름이라도 들어본 미국 작가들이 많지 않아서였으리라 짐작된다. 어쨌거나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쉽게 구해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좀처럼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절판 상태였다. 나는 대전의 헌책방들을 뒤졌고, PC통신의 중고책 장터를 눈여겨보았다. 아마 몇 군데의 도서관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나 『달려라, 토끼』는 어디에도 없었다. 토끼는 이미 항상 어디론가 달려가고 없었던 것이리라.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났을 때, 카투사로 복무하던 대학선배의 미군 주소지로 이 책의 원서를 배달받았다. 총 4부작인 토끼 시리즈가 한 권으로 묶여 있는 책이었다. 한데 그 책은 단 두 쪽만을 읽었을 뿐이다(그 책은 아직도 책장 한 구석에 꽂혀 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드릴 의향이 있으니 알려 달라. 목침으로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우니 이 점 염두에 두시고). 『달려라, 토끼』를 읽게 된 것은 지금 나이의 절반이었을 때보다 꼭 그만큼 더 나이를 먹고 난 뒤였다. 한마디로 최근이라는 말이다. 그사이 나는 많은 미국 소설들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개츠비』에서 데이지 부캐넌이 저택의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나,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홀든 콜필드가 레코드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만이 내가 생각했던 전형적인 미국의 장면들을 구성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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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에밀 졸라 '목로주점'

    자연주의의 부자연스러움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굳이 목로주점의 의미를 찾아본 이유는 목로주점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의미를 읽어봐도 잘 와 닿지가 않는다. 포장마차라거나 막걸리집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하면 이 한문으로 된 고풍스러운 네 글자 이름이 실제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저 술집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실은 파리의 한 세탁부 여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또 절망적인 이야기였다.주인공인 제르베즈는 건달 같은 남자 랑티에와 함께 파리에 왔다. 하지만 랑티에는 곧 바람이 나 도망쳐버리고, 혼자서 세탁부 일을 해 힘들지만 열심히 랑티에의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쿠포라는 함석공이 다가온다. 그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쿠포와 결혼하여 한동안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쿠포는 사고 후 게으름에 빠져 술고래가 되고, 다시 제르베즈에게도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그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가 딸린 집을 마련하여 꿈꾸던 자기 세탁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천천히 다가왔다. 랑티에가 돌아오고, 쿠포는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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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그녀, 슬픔의 식민지 이 소설의 원제목은 ‘아니말 트리스테(animal triste)’다. 독일 작가의 독일어 소설이지만 이 단어들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나는 라틴어를 모르지만 이 두 단어가 들어있는 오래된 관용구 하나를 알고 있다.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포스트 코이툼(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즉,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풋내기 수도사 아드소는 야생적인 소녀와의 첫 경험 이후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을 최초로 실감하면서 저 관용구를 상기한다.) 혹은 더 리듬감을 살려 ‘post coitum, animal triste’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짐승의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짐승만의 특수한 진실이라는 듯이 ‘섹스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모니카 마론이 저 관용구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이, 중년의 나이에 짧은 기간 동안 섬광 같은 사랑을 나눈 이후(post coitum), 수십 년의 세월을 그 사랑만을 추억하며 살다 육체와 정신의 모든 부분이 슬픔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돼 버린 한 여자(animal triste)의 이야기라는 것은 안다. 그녀는 제 나이를 모른다. 아마 백 살쯤 된 것 같다고 스스로 짐작할 따름이다. 4~50년을 죽은 듯이 살아왔고 모든 기억들이 희미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결혼을 했고 남편과 20년을 살았으며 딸 하나를 키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모를 발작 증세를 경험했고 그날 이후로 질서정연하던 삶에 균열들이 생겨났다. 그때 그녀는 자문했다. 만일 그날의 발작으로 내가 죽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놓쳤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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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로베르트 발저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별놈의 학교가 다 있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나는 이 질문의 답은 알 수 없지만 나만의 행동 양식 하나는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 번만 읽어도 그만인 소설은 습기 찬 방구석에 멀찍이 놔두고, 한 번 더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은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인, 노트북 뒤에 탑처럼 쌓아두는 것이다. ‘한 번 더 읽어야만 하는’ 소설책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다. 밑줄이 쫙쫙 그어져 있거나, 그걸로도 모자라면 큼지막한 별이 밑줄 옆에 꼬리처럼 달려 있거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제법 중요한 페이지의 귀퉁이가 야무지게 접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그런 책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 있고, 연필심이 번져 엉망진창이다. ‘엉망진창’은 내가 그 책을 흠모하는 방식이자 좋아한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나는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히거나 막연히 뭔가가 읽고 싶어질 때면 몰래 그중 한 권을 빼들고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염탐하듯 문장과 이야기를 읽고 또 만져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찾아든다.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것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음에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이고,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낸다 해도 풀지 못할 것만 같은 탄생의 비밀이다. 내겐 불길한 예감이다. 이 책은 내 노트북 뒤에 놓여 있는 몇 권 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다.『벤야멘타 하인학교』,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제목의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