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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철수 쌤의 국어 지문 읽기

    수필의 묘미? 뜻만 생각지 말고 어감도 고려해 봐야

     지나간 성인들의 가르침은 하나같이 간단하고 명료했다. 들으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학자(이 안에는 물론 신학자도 포함되어야 한다)라는 사람들이 튀어나와 불필요한 접속사와 수식어로써 말의 갈래를 쪼개고 나누어 명료한 진리를 어렵게 만들어 놓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 자신의 문제는 묻어 둔 채, 이미 뱉어 버린 말의 찌꺼기를 가지고 시시콜콜하게 뒤적거리며 이러쿵저러쿵 따지려 든다. 생동하던 언행은 이렇게 해서 지식의 울안에 갇히고 만다.이와 같은 학문이나 지식을 나는 신용하고 싶지 않다. 현대인들은 자기 행동은 없이 남의 흉내만을 내면서 살려는 데에 맹점이 있다. 사색이 따르지 않는 지식을, 행동이 없는 지식인을 어디에다 쓸 것인가. 아무리 바닥이 드러난 세상이기로, 진리를 사랑하고 실현해야 할 지식인들까지 곡학아세(曲學阿世)와 비겁한 침묵으로써 처신하려 드니, 그것은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배반이다.얼마만큼 많이 알고 있느냐는 것은 대단한 일이 못 된다. 아는 것을 어떻게 살리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탈을 쓴 인형은 많아도 인간다운 인간이 적은 현실 앞에서 지식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 먼저 무기력하고 나약하기만 한 그 인형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서는 어떠한 사명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무학(無學)이란 말이 있다. 전혀 배움이 없거나 배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학문에 대한 무용론도 아니다. 많이 배웠으면서도 배운 자취가 없는 것을 가리킴이다. 학문이나 지식을 코에 걸지 않고 지식 과잉에서 오는 관념성을 경계한 뜻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지식이나 정보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롭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권리'는 '면제'할 수 없어요

    지난 5월 5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기자들 앞에 섰다. 이 자리에서 그는 “코로나19 백신의 ‘지식재산권 면제’를 지지하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즉각 전 세계 언론에 알려져 큰 반향을 몰고 왔다. 백신의 특허 보호를 풀어 세계 각국에서 복제 백신을 쉽게 만들게 하면 백신 보급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할 수 있으리란 기대 때문이었다. 면제란 책임·의무를 지지 않게 하는 것한국시간 5월 6일 새벽 4시14분. 연합뉴스가 로이터통신을 인용해 관련 소식을 속보로 띄웠다. 핵심어는 ‘지재권 면제’였다. 그런데 국내 언론은 후속 보도를 하면서 ‘백신특허 면제/포기/유예/해제/중단’ 등 용어상의 혼란을 보였다. ‘특허 면제’와 ‘포기’ 또는 ‘유예’ 등의 표현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상식적으로 어법상의 타당성만 살펴보기로 하자.우선 ‘권리를 면제하다’라는 표현은 이상하다. 직관적으로 볼 때 그렇다. ‘권리’와 ‘면제’를 결합시키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면제’라는 말은 책임이나 의무 같은 것을 지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세금 면제, 지하철 요금 면제 같은 데에 이 말을 쓴다. 그런데 권리란 통상 책임이나 의무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이해된다. 책임 또는 의무는 면제할 수 있어도 권리는 면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니 ‘특허(지재권) 면제’ 같은 말은 우리 어법상 이치에 맞지 않는, 성립하기 어려운 표현인 셈이다.외신을 통해 들어온 원어는 ‘waiver(웨이버: 권리 등의 포기)’다. 웨이버는 ‘권리와 의무’

  • 영어 이야기

    do a choice (X)…make a choice (O)

     Anthropologists travel to every corner of the globe to conduct their research. The first generation of them in the late nineteenth century relied on the reports of travelers and explorers for their information. Consequently, anthropology can be seen as an outgrowth of the vast travel literature that accumulated in European languages following the great voyages of discovery of the fifteenth century. In the twentieth century, anthropologists decided that such reports were not enough, and that they needed to go and see for themselves. The modes of research that they initiated, designed to avoid as far as possible the pitfalls of prejudice, provide the basis of the modern discipline.Peter Metcalf의 《Anthropology》 중에서인류학자들은 조사를 하기 위해서 전세계 곳곳을 돌아다닌다. 19세기 1세대 인류학자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여행자들과 탐험가들의 기록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인류학은 15세기의 대항해 이후 늘어난 유럽 언어로 쓰여진 방대한 여행 문헌으로부터 나온 결과물로 여겨질 수 있다. 20세기에, 인류학자들은 그러한 기록은 충분치 않으며, 그들이 직접 가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들이 시작한 연구의 방법들은 선입견의 위험을 가능한 피하기 위해서 설계되었는데, 그것들은 현대 원칙의 기초가 되고 있다. < 해설 >필자에게는 한국어가 서툰 미국인 사촌형이 있습니다. 이 형이 어느 날 저에게 “농구 놀자!”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왜 “농구 하자!”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축구하다, 야구하다와 같이 한국어에서 스포츠 종목은 동사 ‘하다’와 함께 사용되지만, 영어의 경우에는 play soccer, play baseball 등과 같이 스포츠 종목이 동사 ‘play’와 함께 쓰입니다. 한국어가 서툴렀던 사촌형은 play basketball이란 각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 한자풀이盡 : 다할 진人 : 사람 인事 : 일 사待 : 기다릴 대天 : 하늘 천命 : 목숨 명자신의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하늘의 명(命)을 기다린다는 뜻 《삼국지연의》《삼국지연의》는 명나라 때 나관중이 지은 장편 소설이다. 중국의 4대 기서 중 하나로 위·촉·오의 3국 정립을 거쳐 진(晉)나라 성립까지의 역사를 소설화했다. 진나라 진수가 편찬한 정사인 《삼국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위의 정통 왕조설을 일축하고, 촉나라를 후한의 정통을 잇는 나라로 내세우고 있다. 내용도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로 시작해 촉나라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으며, 여러 영웅 호걸의 활약상과 극적 장면의 연속으로 중국 역사 소설의 백미로 평가받는다.위나라와 초나라·오나라 연합군이 맞붙은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은 관우에게 화용도에서 기다리다 도주해 오는 조조를 죽이라고 했다. 하지만 관우는 옛정을 생각해 조조를 놓아주었고, 제갈량은 군령을 어긴 죄로 관우를 참하려 했다. 유비가 죄는 중해도 피로 결의한 형제를 죽일 수 없으니 살려 달라 간청했다. 이에 제갈량이 “제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쓴다 해도 목숨은 하늘의 뜻에 달려 있으니 하늘의 명을 기다릴 뿐입니다(盡人事待天命)”라고 했다.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은 큰일을 앞두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후에(盡人事) 하늘에 결과를 맡기고 기다린다(待天命)는 말로 좌우명으로도 많이 쓰인다.청나라 소설가 이여진이 쓴 《경화록》에는 진인사청천명(盡人事聽天命)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 또한 의미가 같다.《삼국지》 《삼국지연의》는 고사성어의 보고다. 측근을 벌해 규율을 세운다는 읍참마속(泣

  •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추상적 개념의 틀에 갇힌 '두텁다'

    코로나 사태가 길어지면서 정부 재난지원금도 이미 네 차례에 걸쳐 나왔다. 그 과정에서 나온 정부·여당의 “더 넓게, 더 두텁게” 발언은 주목할 만하다. 단어 사용의 적절성을 두고 논란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발언 맥락은 이랬다. “받는 액수도 더 높여서 ‘더 넓게 더 두텁게’가 동시에 이뤄질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일부 언론 보도는 달랐다. ‘더 두텁게’를 ‘더 두껍게’로 바꿔 전달했다. 왜 그랬을까? 신의·우애 등 추상적 의미로만 쓰게 제한‘두텁다/두껍다’는 일상에서 늘 쓰는 말이라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하지만 막상 따져보면 쓰임새가 꽤 까다롭다. 우선 ‘더 두텁게’란 표현은 지원금을 어떻게 준다는 것인지, 뜻이 금세 와닿지 않는다. 아마도 지원하는 액수를 넉넉하게, 많이 준다는 의미로 말한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두껍게’를 대체할 수 있을까? ‘두텁게’ 지원하는 것도 모호한데, ‘두껍게’ 지원한다는 것은 아예 어색하기까지 하다.‘두텁다’의 전형적 용법은 신의, 믿음, 관계, 인정 따위가 굳고 깊다는 뜻으로 쓰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직원과 고객, 지역사회와 두터운 신뢰를 형성하는 기업일수록 위기 회복력이 빠르고, 생산성은 더욱 높아졌다’고 말했다.” 얼마 전 ‘상공의 날’ 기념식 발언인데, 이때의 ‘두터운 신뢰’ 같은 게 대표적 사례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두텁다’는 이런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 한정돼 쓰인다. 매우 제한적인 쓰임새다.그러다 보니 언어 현실과 자주 충돌한다. ‘더 두텁게&rsq

  • 영어 이야기

    앞 문장 전체나 선행사 일부 지칭할 때 which 사용하죠

     As soon as the Shire-hobbits entered, there was a chorus of welcome from the Bree-landers. The strangers, especially those that had come up the Greenway, stared at them curiously. The landlord introduced the newcomers to the Bree-folk, so quickly that, though they caught many names, they were seldom sure who the names belonged to. The Men of Bree seemed all to have rather botanical (and to the Shire-folk rather odd) names, like Rushlight, Goatleaf, Heathertoes, Appledore, Thistlewool and Ferny (not to mention Butterbur). Some of the hobbits had similar names. The Mugworts, for instance, seemed numerous. But most of them had natural names, such as […], many of which were used in the Shire.J.R.R Tolkien 《The Lord of the Rings: The Fellowship of the Ring》 중에서샤이어 호빗들이 들어서자마자 브리 사람들은 환영의 환성을 질렀다. 낯선 사람들, 특히 초록길을 올라왔다는 사람들은 호기심에 가득 차 그들을 바라봤다. 주인이 새로 온 손님들을 브리 사람들에게 인사시켰다. 그런데 말이 너무 빨라서 호빗들은 그들의 이름을 듣기는 했지만 누가 누구인지 거의 알 수 없었다. 브리 사람들은 모두 다소 식물과 관련된 (샤이어 호빗들이 보기엔 특이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가령 골풀양초, 염소풀, 헤더발가락, 사과나무, 엉겅퀴털, 양치식물 등이 그랬다. 머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호빗들도 일부는 비슷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쑥부쟁이란 이름이 꽤 많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연스러운 이름을 갖고 있었는데, 그 이름들의 다수는 샤이어에서 사용되고 있었다. <해설>앞에서 언급된 명사의 일부 개체를 지칭할 때에는 [X of 대명사]의 형태를 사용합니다. 본문의 most of them had natural names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여기서 them은 앞에 언급된 the hobbits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無爲而化(무위이화)

    ▶ 한자풀이無 : 없을 무爲 : 할 위而 : 어조사 이化 : 될 화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교화함꾸밈이 없어야 백성들이 따른다는 의미 -《노자》무위(無爲)는 도가(道家) 사상의 핵심이다. 무위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을 인위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도가를 설명하면서 자주 언급되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바로 이를 뜻한다. 도가는 인위적으로 선을 긋지 말라 한다. 선을 그으면 피아가 구별되고 선과 악, 높고 낮음, 밝고 어둠이 갈라지면서 세상을 이분법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으로 노자 사상에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어 이르던 말이다.《노자(老子)》 제57장 순풍(淳風)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나라는 바른 도리로 다스리고, 용병은 기발한 전술로 해야 하지만,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는 무위로 해야 한다.(중략) 그러므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감화되고(我無爲 而民自化), 내가 고요하니 백성들이 스스로 바르게 되며(我好靜 而民自正), 내가 일을 만들지 않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부유해지고(我無事 而民自富),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으니 백성들이 스스로 소박해진다(我無欲 而民自樸).’”노자는 문화를 인류의 욕심이 낳은 산물로 본다. 문화가 인류의 생활을 편하게는 하였지만 인간의 본심 또한 잃게 만들었으니 학문과 지식을 버리라고까지 한다. 현대인의 시각과는 어긋나지만 함의는 깊다. 무위이화는 무위이민자화(無爲而民自化)를 줄인

  • 신철수 쌤의 국어 지문 읽기

    대중들이 영웅에게서 원하는 것은? 사랑과 업적, 그리고 능력

     승상 나업은 딸 하나가 있었다. 재예(才藝)가 당대에 빼어났다. 아이는 이 말을 듣고 헌 옷으로 갈아입고 거울 고치는 장사라 속여 승상 집 앞에 가서 “거울 고치시오!”라 외쳤다. 나 소저는 이 말을 듣고 거울을 꺼내 유모에게 주어 보냈다. 나 소저는 유모 뒤를 따라 바깥문 안쪽까지 나가 문틈으로 엿보았다. 장사가 소저의 얼굴을 언뜻 보고 반해, 손에 쥐었던 거울을 일부러 떨어뜨려 깨뜨렸다. (중략)“거울이 이미 깨졌거늘 때려 무엇 하세요? 저를 노비로 삼아 거울값을 갚게 해 주세요.”유모가 들어가 이를 승상께 아뢰니 허락하였다. 승상은 그의 이름을 거울을 깨뜨린 노비라는 뜻으로 파경노(破鏡奴)라 짓고 말 먹이는 일을 시켰다. 말들은 저절로 살쪄 여윈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루는 천상의 선관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말 먹일 꼴을 다투어 그에게 주었다. 이에 파경노는 말들을 풀어놓고 누워만 있었다. 날이 저물어 말들이 파경노가 누워 있는 곳에 와 그를 향해 머리를 숙이며 늘어서자 보는 자마다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중략)이전에 승상은 동산에 꽃과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파경노에게 이를 기르게 했다. 이때부터 동산의 화초가 무성하며 조금도 시들지 않아, 봉황이 쌍쌍이 날아들어 꽃가지에 깃들었다.[중략 부분 줄거리] 중국 황제는 신라 공격의 빌미를 얻고자, 신라 왕에게 석함을 보내 그 안에 있는 물건을 알아내 시를 지어 올리라 명한다. 왕이 승상에게 과업을 넘기자 승상은 근심하고, 이를 안 나 소저는 아버지에게 파경노가 신인(神人)의 기운이 있다며 그를 추천한다.승상이 말했다. “너는 어찌 쉽게 말하느냐? 만약 파경노가 할 수 있다면 나라의 이름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