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轍鮒之急 (철부지급)

    ▶ 한자풀이轍: 바퀴자국 철  鮒: 붕어 부  之: 갈 지  急: 급할 급수레바퀴 자국에 괸 물에 있는 붕어위급에 처하거나 상황이 매우 곤궁함  - <장자(莊子)>장자(莊子)는 자연적인 삶을 추구했지만 집안은 늘 가난했고 밥을 굶는 날도 많았다. 장자가 친분이 있던 지방장관 감하후(監河侯)에게 양식을 꾸러 갔다. “형편이 나아지는 대로 갚을 테니 얼마만 융통해주십시오.”감하후가 답했다. “좋소이다. 고을에서 세금이 들어오는 대로 삼백 금을 빌려드리겠소. 그리하면 되겠지요?”감하후의 속내를 알아챈 장자가 퉁명스럽게 쏘았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그러고는 비유를 들어 감하후를 꾸짖었다. “어제 이리로 오는 길에 누가 저를 부르더군요. 그래 돌아보았더니 수레바퀴 지나간 자리에 붕어가 있지 않겠소.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나는 동해의 파신(波臣: 물고기)인데 어떻게 한두 바가지 물로 나를 살려줄 수 없겠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았네. 내가 곧 오나라 월나라 임금을 만나게 될 테니 그때 서강(西江)의 물을 끌어다가 그대를 맞이하겠네. 괜찮겠지’ 하고 대답했더니 붕어가 화를 내며, ‘나는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을 잃고 당장 곤란에 빠져 있소. 한두 바가지 물만 있으면 나는 살 수 있소. 그런데 당신은 그런 태평스러운 소리만 하고 있으니 차라리 일찌감치 건어물 가게로 가서 나를 찾으시오’라고 했습니다.”철부지급(轍之急)은 <장자> 외물편 이야기에서 유래하며, 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에 생긴 물웅덩이에 있는 붕어의 위급함이라는 뜻이다.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窮鼠齧猫 (궁서설묘)

    ▶ 한자풀이窮: 다할 궁鼠: 쥐 서齧: 물 설猫: 고양이 묘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다위급하면 약자도 강자에게 저항한다- <염철론(鹽鐵論)><염철론(鹽鐵論>은 전한(前漢) 선제(宣帝) 때 환관(桓寬)이 편찬한 책이다. 12권 60장으로 된 이 책은 BC 81년 전한의 조정에서 열렸던 회의의 토론 내용을 재현하는 형태로 정리한 독특한 형식을 취했다. 전국에서 추천을 받아 참석한 자들이 무제(武帝) 때부터 비롯된 소금·철·술 등의 전매(專賣) 및 균수(均輸)·평준(平準) 등 일련의 재정정책을 무제가 죽은 뒤에도 존속시킬 것인가를 주제로 논의한 내용이 수록됐다.전매는 국가가 행정상 목적으로 특정물의 생산 또는 판매를 독점하는 일이고, 균수는 지방 몫이었던 조세와 운송비 부담에 경중의 차이가 있던 것을 균등히 한다는 뜻이다. 평준은 물가 안정책을 이른다.참석자 중 현량(賢良) 문학(文學) 등 약 60명은 유가사상을 근거로 이 제도의 폐지를 주장한 반면 고급 관리인 승상 차천추(車千秋), 어사대부 상홍양(桑弘羊)과 그의 부하 관리들은 법가사상을 내세워 제도의 존속을 주장해 이들 사이에 격론이 벌어졌다.엄한 법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상홍양 측에 대항한 학자들은 진시황의 엄격한 법 집행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으며 법을 이기지 못한 백성들이 도처에서 궐기해 진승·오광의 난으로 진나라가 멸망했다고 주장했다.“궁지에 몰린 쥐가 살쾡이(고양이)를 물고, 평범한 사람도 만승의 군대를 칠 수 있으며, 신하도 활을 꺾을 수 있다(窮鼠齧狸 匹夫奔萬乘 舍人折弓).”궁서설묘(窮鼠齧猫)는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뜻으로, 퇴로가 없는 절박한 상황에 몰리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萬事休矣 (만사휴의)

    ▶한자풀이萬: 일만 만    事: 일 사    休: 쉴 휴    矣: 어조사 의모든 일이 끝장났다는 뜻으로어찌해볼 도리가 없음을 이름   -<송사(宋史)>당나라가 멸망하고 960년 송나라가 등장할 때까지 50여 년 동안 중국에는 많은 국가가 등장하고 사라졌다. 중원에만 후량(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 후한(後漢) 후주(後周) 등 다섯 봉건 왕조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반짝 빛을 발하다가 꺼지곤 했다. 중원을 벗어난 변방의 사정은 더 혼란스러웠다. 오(吳) 형남(荊南) 전촉(前蜀) 초(楚) 오월(吳越) 민() 후촉(後蜀) 북한(北漢) 남한(南漢) 남당(南唐) 등 열 나라가 난립해 다툼을 벌였다. 이 시기를 중원 다섯 나라와 통틀어 ‘오대 십국 시대’라고 부른다. 그중 형남은 당나라 말기 절도사로 파견됐던 고계흥(高季興)이 세운 나라다.고계흥은 야망이 컸다. “천하가 지금 주인이 없이 사분오열인데, 군대가 막강한 내가 욕심을 낸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우선 이곳에다 나라의 깃발을 꽂은 다음 힘을 키워 더 멀리 보자.”출발의 야망은 거창했지만 그는 그 꿈을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채 죽었고, 아들 고종회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고종회는 아버지보다 함량이 훨씬 모자라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사람노릇을 하는지조차 몰랐다. 그는 아들 보욱이 원하면 원하는 대로, 거부하면 거부하는 대로 키웠다. 그러다 보니 보욱은 안하무인(眼下無人)인 망나니로 자랐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없다고 믿고, 누가 자기에게 눈을 흘겨도 그것이 나쁜 감정의 표시라는 것조차 분별하지 못했다.이런 소문이 널리 퍼지자 형남의 백성들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며 “모든 게 끝났다(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季布一諾 (계포일락)

    ▶ 한자풀이季: 계절 계  布: 베 포  一: 한 일  諾: 승낙할 락계포가 한 번 한 약속이란 뜻으로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킴을 이름- <사기(史記)>계포(季布)는 초나라 출신의 한나라 장수다. 항우 밑에서 무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싸움에서 유방을 괴롭혔다. 그러나 항우가 유방에게 패해 죽자 졸지에 쫓기는 몸이 됐다. 숨어 지내던 계포는 다시 한나라에 등용돼 낭중(郞中) 벼슬을 지내다 하동태수가 됐다. 그는 비록 두 군주를 섬겼지만 의협심이 강하고 약속을 중히 여겨 한 번 한 말은 반드시 지켰기에 모든 사람이 그를 신뢰했다.계포가 조고생이란 자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그가 계포를 찾아와 물었다. “우리 고향 속담에 황금 백 근보다 ‘계포의 한 번 승낙(季布一諾)’이 더욱 값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명성을 얻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당신과 같은 초나라 출신입니다. 내가 천하를 다니며 당신의 명성을 널리 알리면 그대 이름은 천하에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나를 그리 거절하십니까.”이를 <사기(史記)> 등에는 ‘황금 백 근을 얻음은 계포의 일낙(一諾)을 얻음만 못하다’고 기록하고 있다.계포일락(季布一諾)은 ‘계포가 한 번 한 약속’이란 뜻으로,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키는 것을 이른다.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은 ‘남자의 한마디 말은 천금같이 값지고 무거워야 한다’는 뜻으로 계포일락과 함의가 서로 맞닿는다.금석맹약(金石盟約)은 ‘쇠와 돌같이 굳게 맺은 약속’을 일컫는다. 이목지신(移木之信)은 ‘위정자가 나무 옮기기로 백성들의 믿음을 얻었다’는 뜻으로, 남을 속이지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良藥苦口 (양약고구)

    ▶한자풀이良: 좋을 양  藥: 약 약  苦: 쓸 고  口: 입 구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뜻으로바른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의미 - <사기(史記)>천하를 통일한 시황제가 죽자 진(秦)나라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서슬 퍼런 철권통치에 시달린 백성들이 각지에서 진나라 타도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고, 그런 민심에 편승한 군웅들이 국토를 분할해 세력 경쟁을 벌였다.그중 대표적 인물이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다. 2세 황제 원년인 기원전 209년에 군사를 일으킨 유방(훗날 한고조)은 3년 만에 경쟁자 항우보다 한 걸음 먼저 진나라 서울인 함양(咸陽)에 입성했다. 3세 황제 자영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유방이 대궐에 들어가 보니 방마다 호화찬란한 재물이 가득하고 꽃 같은 궁녀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유방은 원래 술과 여자를 좋아했으므로 대궐에 머물려고 했다. 그러자 부하인 번쾌(樊)가 쓴소리를 했다.“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고 천하가 진정한 영웅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주저앉아 한때의 쾌락을 즐기려 하십니까? 모든 것을 봉인(封印)하고 교외의 군진으로 돌아가야 합니다.”유방의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지혜로운 참모 장량(張良)은 번쾌를 거들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진나라 폭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한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진나라 임금이 누리던 것을 일시적이나마 탐했다는 소문이 세상에 알려지면 백성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원래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동에는 이롭고, 양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이롭다’고 했습니다. 번쾌의 충언을 받아들이십시오.”비로소 자기 생각이 부족했음을 깨달은 유방은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天衣無縫 (천의무봉)

    ▶한자풀이天: 하늘 천  衣: 옷 의  無: 없을 무  縫: 꿰멜 봉선녀의 옷에는 바느질한 흔적이 없다인위적 기교가 없이 자연스러움을 이름   - <태평광기(太平廣記)>천상(天上)의 직녀(織女)가 인간계의 청년 곽한(郭翰)을 사랑하여 천제(天帝)의 허락을 얻어 밤마다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직녀가 칠석(七夕)이 되자 견우를 만나느라 오지 않다가 5일쯤 후에야 다시 내려왔다. 곽한이 물었다. “직녀님, 견우님과의 상봉은 어떠셨는지요.”곽한의 질문에 직녀는 웃으며 말했다. “천상은 여기와 다릅니다. 천상에서는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는 것이 정교(情交)여서 이 세상의 정교와는 다릅니다. 행여 질투하는 마음이 있으면 버리십시오.”곽한이 멋쩍어 다시 물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발길을 끊지 않았습니까?”직녀가 다시 웃으며 답했다. “천상의 하룻밤은 이 세상 5일에 해당합니다.”그날 밤 직녀는 곽한을 위해 천상의 요리를 가져왔는데, 모두 이 세상에는 없는 것뿐이었다. 또 그녀의 옷을 보니 어디에도 솔기(천의 끝과 끝을 봉합했을 때 생기는 선)라곤 눈에 띄지 않았다. 신기하게 생각하며 물어보니 직녀가 말했다. “저희가 입는 천의(天衣)라는 것은 원래 실이나 바늘을 사용하지 않습니다.”곽한은 직녀의 옷에 반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10세기 북송 태종 때 편찬된 설화집 <태평광기(太平廣記)>에 나오는 얘기다.천의무봉(天衣無縫)은 하늘나라 사람의 옷은 솔기나 바느질한 흔적이 없다는 뜻으로, 시가(詩歌)나 문장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흠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성격이나 언행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금도 꾸민 데가 없음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楊布之狗 (양포지구)

    ▶ 한자풀이楊: 버들 양布: 베 포之: 갈 지狗: 개 구'양포라는 사람의 집 개'라는 뜻으로 겉이 달라졌다고 속도 바뀐 것으로 여김   -<한비자(韓非子)>전국 시대 중엽의 사상가 양주(楊朱)와 묵자(墨子)는 생각이 극으로 달랐다. 양주는 남을 위하는 부질없는 짓을 버리고 각자가 자신만을 위해 살면 천하가 태평성대를 누린다고 주장한 반면 묵자는 모든 사람을 친부모 친형제처럼 사랑하라는 겸애설을 주창했다. 맹자는 “양자는 나만을 위하니 아비가 없고 묵자는 모두를 똑같이 사랑하니 임금이 없다”며 양자와 묵자 두 사람을 동시에 비판했다. 맹자는 또 “아비가 없고 임금이 없으면 이는 곧 날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했다.법가 사상을 주창한 한비(韓非)는 양주의 생각을 꼬집고 자신의 논리를 펴기 위해 이야기 하나를 지어냈다.양주의 아우 양포(楊布)가 아침에는 흰옷을 입고 나갔는데, 돌아올 때는 비가 오는 바람에 검정 옷으로 갈아입고 왔다. 낯선 사람으로 여긴 집안의 개가 마구 짖어대자 양포가 화가 나 지팡이로 개를 때리려 했다. 양주가 아우를 타일렀다. “개를 탓하지 마라. 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일 너의 개가 조금 전에 희게 하고 나갔다가 까맣게 해 가지고 들어오면 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겠느냐?”양포지구(楊布之狗)는 ‘양포라는 사람의 개’라는 뜻으로 겉이 달라진 것을 보고 속까지 바뀐 것으로 여기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한비자는 교언영색 너머에 있는 신하의 진짜 속내를 꿰뚫어보는 게 군주의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이 이야기를 지어내지 않았나 싶다. 한비자는 군주가 속내를 숨겨야 신하의 마음을 알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烏合之衆 (오합지중)

    ▶한자풀이烏: 까마귀 오    合: 합할 합    之: 갈 지    衆: 무리 중까마귀 떼처럼 어지러이 모인 무리조직이나 구심점 없는 무리를 이름   -<후한서(後漢書)>전한(前漢) 말 대사마(국방부 장관 격) 왕망(王莽)은 평제를 죽이고 나이가 어린 영을 새 황제로 삼았다. 3년 후에는 영을 폐한 뒤 국호를 신(新)으로 바꾸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하지만 민심 이반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유수(劉秀: 후한의 시조)가 군사를 일으켜 왕망 일당을 물리치고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워 한나라를 다시 회복했다. 이듬해 왕랑(王郞)이란 자가 성제의 아들 유자여(劉子與)를 자처하며 황제를 참칭(분수에 넘치게 스스로를 황제라 이름)하자 대사마가 된 유수가 반란군 토벌에 나섰다.장수 경감(耿龕)이 평소 덕망을 흠모한 유수에게로 가는 도중 부하 장수 손창과 위포가 왕랑에게로 가려 했다. “유자여는 한 왕조의 정통인 성제의 아들이라 하는데, 그를 도와야 하지 않겠소.”두 장수의 말에 격노한 경감은 칼을 뽑아 들고 말했다. “왕랑이란 자는 본래 도적인데, 스스로 유자여라 하면서 황제를 사칭(詐稱)하고 난을 일으켰다. 내가 장안에 가서 정예군으로 공격하면 왕랑 군사와 같은 오합지중(烏合之衆)을 짓밟기란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아서 왕랑을 반드시 사로잡을 것이다. 너희가 도리를 모르고 적과 한패가 된다면 얼마 가지 않아 일족(一族)이 몰살을 당할 것이다.”두 장수는 끝내 그날 밤에 왕랑에게로 갔지만 경감은 뒤쫓지 않고 토벌군에 합류해 큰 공을 세워 건위대장군에 임명됐다.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 송의 범엽이 편찬한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