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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兎死狗烹(토사구팽)

    ▶ 한자풀이兎:  토끼 토死:  죽을 사狗:  개 구烹:  삶을 팽토끼가 잡히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쓸모가 다하면 냉정히 버려진다는 의미-<사기(史記)>범려는 춘추시대 월나라 왕 구천이 오나라를 멸하고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보좌한 명신(名臣)이다. 월나라가 패권을 차지한 뒤 구천은 가장 큰 공을 세운 범려와 문종을 각각 상장군과 승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범려는 구천이 고난은 함께해도 영화를 함께 누릴 수는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해 월나라를 탈출했다.제나라에 은거한 범려는 문종에게 “새 사냥이 끝나면 좋은 활도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蜚鳥盡, 良弓藏, 狡死, 走狗烹)”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피신하도록 충고했으나, 문종은 월나라 떠나기를 주저하다가 구천에게 반역의 의심을 받아 자결하고 말았다. 쓸모가 다하면 냉정하게 버려진다는 의미의 토사구팽(兎死狗烹)은 <사기(史記)>에 전해진다.토사구팽은 한신의 이야기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을 통일한 유방은 일등공신 한신을 초왕으로 봉했으나, 자신에게 도전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러던 중 유방과 패권을 다퉜던 항우의 부하 종리매가 옛 친구인 한신에게 몸을 의탁했다. 유방은 그를 체포하라고 명했으나, 한신은 옛친구를 배반할 수 없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안 유방은 초나라를 방문한다는 구실로 제후들을 초나라 서쪽 경계인 진나라에 모이게 하였다.한신의 부하들이 종리매의 목을 베어 가지고 가면 황제가 기뻐할 것이라고 진언했다. 한신이 이런 상황을 전하자 종리매는 “유방이 초(楚)를 침범하지 못하는 것은 자네 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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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전벽해(桑田碧海)

    ▶ 한자풀이桑: 뽕나무 상田: 밭 전碧: 푸를 벽海: 바다 해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었다는 뜻으로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크게 변했음을 비유-<신선전(神仙傳)>어느 날 선녀 마고가 신선 왕방평에게 말했다. “제가 신선님을 모신 후 어느새 뽕나무 밭이 세 번이나 푸른 바다로 변하였습니다(桑田碧海). 이번에 봉래에 갔더니 바다가 다시 얕아져 이전의 반 정도로 줄어 있었습니다. 또 육지가 되려는 것일까요.”<신선전> ‘마고선녀이야기’에 나오는 구절로,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변함을 이르는 상전벽해(桑田碧海)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진(晋)나라 갈홍이 편찬한 의서<신선전>에는 84명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모두 오랜 수명을 누린 사람들이다. 기괴하고 황당한 내용이 많지만 일부는 고대 장생술을 연구하는 데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명나라 관리 유정지의 시 ‘대비백두옹(代悲白頭翁)’에도 같은 구절이 나온다.‘낙양성 동쪽 복숭아꽃 오얏꽃날아오고 날아가며 누구의 집에 지는고낙양의 어린 소녀는 제 얼굴이 아까운지가다가 어린 소녀가길게 한숨짓는 모습을 보니올해에 꽃이 지면 얼굴은 더욱 늙으리라내년에 피는 꽃은 또 누가 보려는가뽕나무밭도 푸른 바다가 된다는 것은정말 옳은 말이다’(實聞桑田變成海)상전벽해는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는 의미에서 자신도 모르게 세상이 달라진 모습을 보고 비유한 말이다. 또한 뽕나무밭이 바다가 될 수 있을지라도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도 쓰인다. 상전변성해(桑田變成海)라고도 한다.창해상전(滄海桑田) 창상지변(滄桑之變) 상창지변(桑滄之變) 모두 같은 의미다. 능곡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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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氷炭不容(빙탄불용)

    ▶ 한자풀이氷: 얼음 빙炭: 숯 탄不: 아니 불容: 용납할 용얼음과 숯이 서로 받아들이지 못하듯두 사물이 서로 화합할 수 없음을 이름-<초사(楚辭)>한나라 무제 때의 동방삭은 재치와 해학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변설에도 뛰어나 입을 열면 막힘이 없었다. 넓고 깊은 지식과 청산유수 같은 언변은 당대 누구도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하지만 언행이 기이해 반미치광이로 여겨지기도 하고, 신선으로 불리기도 했다.무제는 그를 자주 불러 나랏일을 청해 듣곤 했다. 그는 황제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조정에서 교활한 자를 비웃었으며 그런 자들과는 일절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죽기 직전에도 무제에게 “교활하고 아첨하는 무리를 멀리하고 참소하는 말을 물리치시라”고 간언했다.그는 초나라의 우국시인 굴원(屈原)을 추모하여 <칠간(七諫)>이라는 7수의 시를 지었다. 그 가운데 <자비(自悲)>라는 시에서 “얼음과 숯은 서로 함께할 수 없으니(氷炭不容), 내 본디 목숨이 길지 못함을 알겠구나”라고 노래했다. 충성스러운 굴원과 아첨배를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얼음과 숯에 비유하여, 아첨을 일삼는 간신들과는 공존할 수 없다는 굴원의 심경을 노래한 구절이다. 얼음과 숯처럼 서로 화합할 수 없음을 뜻하는 빙탄불용(氷炭不容)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에서 생겼다.수화불용(水火不容) 또는 유여수화(有如水火)도 같은 의미다.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장군 위연은 성격이 오만하여 모두가 그를 피했다. 하지만 장사(長史)인 양의만은 위연을 아랑곳하지 않아서 항상 그와 맞섰다. 위연은 양의의 태도에 매우 화를 냈는데, 두 사람은 마치 물과 불의 관계와 같았다(延以爲至忿, 有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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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捲土重來 (권토중래)

    ▶ 한자풀이捲: 말 권土: 흙 토重: 거듭 중來: 올 래흙먼지를 일으켜 다시 쳐들어온다는 뜻한번 실패한 자가 다시 도전함을 이름-두목(杜牧)의 시중국 오강(烏江)은 초패왕 항우가 한나라 유방과 최후의 결투를 벌인 곳이다. 이 싸움에서 진 항우는 자결했고, 유방은 오랜 패권 전쟁을 끝내고 통일 한나라의 황제에 올랐다.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온다는 뜻으로 고립무원의 상황을 이르는 사면초가(四面楚歌)도 이 전투에서 비롯된 고사성어다. ‘힘은 산을 뽑을 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 만하다’고 한탄한 항우의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도 이 전투가 배경이다.항우의 부하들은 “강동으로 돌아가 다시 힘을 모아 재기하자”고 권유했지만, 항우는 “8년 전 8000여 자제와 함께 떠난 내가 무슨 면목으로 혼자 강을 건너 강동으로 돌아가겠느냐”며 31년의 짧은 생을 스스로 마쳤다. 항우의 애첩 우미인(虞美人)이 항우의 시에 화답하고 자결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훗날 당나라 말기의 대표적 시인 두목(杜牧)은 항우의 기백을 기리며 “승패란 병가에서 기약할 수 없는 일이니, 부끄러움을 안고 참을 줄 아는 것이 사나이라네. 강동의 젊은이 중에는 준재가 많으니, 흙먼지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왔다면 어찌 되었을까(捲土重來未可知)”라고 시를 지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여기서 유래한 권토중래(捲土重來)는 어떤 일에 실패하였으나 힘을 축적하여 다시 그 일에 착수하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두목은 당대의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노두(老杜)로 불리는 것에 견줘 소두(少杜)로 일컬어질 정도로 뛰어난 시인이다. 1000년이 지난 어느 날, 오강의 여사(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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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목구어(緣木求魚)

    ▶ 한자풀이緣:인연 연木:나무 목求:구할 구魚:물고기 어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얻으려 한다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음을 비유-<맹자>전국시대 주나라 신정왕 3년(BC 318)에 맹자는 양나라 혜왕과 작별하고 제나라로 갔다. 동쪽에 있는 제나라는 서쪽의 진(秦), 남쪽의 초(楚)와 더불어 전국시대 제후국 가운데에서도 대국이었다. 당시 50이 넘은 맹자는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인의(仁義)를 치세의 근본으로 삼는 왕도정치론을 설파했다.제나라 선왕(宣王)은 역량이 뛰어난 명군이었고, 맹자는 그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맹자는 그의 왕도정치론이 통할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맹자가 말하는 왕도정치가 아니라 부국강병론이었다. 선왕 또한 최대 관심사는 중국의 통일이었다. 맹자와 선왕은 문답을 나눴다. “임금께서는 전쟁을 일으켜 신하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이웃 나라 제후들과 원수를 맺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내게 대망(大望)이 있기 때문이오.” “전하의 대망이란 것에 대해서 말씀해 보시지요.” 선왕이 주춤하자 맹자가 슬쩍 낚시를 던졌다. “전쟁의 목적은 의식(衣食)이오니까, 인생의 오락이오니까?” “아니오, 나의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오.” 이에 맹자가 다그치듯 말했다.“그러시다면 영토를 확장해 진과 초와 같은 대국으로 하여금 허리를 굽히게 하고, 중국 전토를 지배하여 사방의 오랑캐를 따르게 하려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일방적인 무력으로 그것을 얻으려 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 같은 것으로 목적과 수단이 맞지 않아 불가능한 일이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오니까.”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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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牛一毛 (구우일모)

    ▶ 한자풀이九: 아홉 구, 모을 규牛: 소 우一: 한 일毛: 터럭 모아홉 마리 소에 털 한 가닥이 빠진 정도라는 뜻대단히 많은 것 중 아주 적은 것의 비유-<한서>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 때 장군 이릉(李陵)은 흉노를 정벌하러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했다. 열 배가 넘는 적의 군사를 맞아 10여 일간 치열하게 싸웠으나 패하고 말았다.이듬해 뜻밖의 사실이 밝혀졌다. 전쟁 중 죽은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 투항해 후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분노한 무제는 이릉 일족을 참형하라고 명했으나 중신들은 무제의 얼굴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옹호하는 자가 없었다. 사마천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소수의 보병으로 수만의 오랑캐와 싸우다 흉노에 투항한 것은 훗날 황제의 은혜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마천은 흉노들이 가장 무서워한 이광 장군의 손자 이릉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라를 구할 용장으로 믿었기 때문이다.이에 진노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두고 궁형(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형벌)을 내렸다. 남자로서 너무나 수치스러운 형벌이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때의 일을 ‘이릉의 화(李陵之禍)’라고 부른다. 사마천은 옥중에서 친구 임안에게 자신의 참담한 심경을 밝힌 편지를 썼다. “내가 법에 의해 사형을 받아도 아홉 마리의 소 중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뿐이니, 나와 같은 자가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내가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졸장부라고 여길걸세.”아홉 마리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털을 뜻하는 구우일모(九牛一毛)는 아주 많은 것 중에서 가장 적은 것을 비유하며,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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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死一生 (구사일생)

    ▶ 한자풀이九: 아홉 구死: 죽을 사一: 한 일生: 날 생아홉 번 죽을 뻔하다 한 번 살아나다수차례 고비를 겪고 간신히 목숨을 건짐-초사(楚辭)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이자 이름난 시인 굴원은 학식이 깊고 글재주가 뛰어나 삼려대부라는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를 시기하는 간신들에게 모함받아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 뒤 굴원은 좌절과 방황 속에서 불행히 살다 돌을 안고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었다. 그는 평소에 충언을 빙자한 간사함이 임금의 공명정대함을 흐리게 해 진정한 충신들이 미움을 받는 현실을 미워했다.그가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충정에서 지은 <이소>라는 글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이 나온다. “긴 한숨 쉬고 눈물을 닦으며, 사람 일생에 난관이 많음을 슬퍼하노라내 고결하게 살고 조심한다 했지만 아침에 바른말하다 저녁에 쫓겨났네그래도 내 마음이 선하다고 믿어 아홉 번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리.”‘아홉 번 죽었다 살아난다’는 뜻의 ‘구사일생(九死一生)’은 이 글에서 비롯했다. 본래는 ‘구사무일생(九死無一生)’, 즉 아홉 번 죽는 동안 한 번도 살아남지 못함을 뜻하지만, 죽을 뻔했다가 간신히 살아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 흔히 아홉은 수의 끝을 의미한다. 그러니 아홉 번 죽는다는 것은 수없이 죽는다는 뜻으로도 풀이가 가능하다.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기사회생(起死回生)’은 <여씨춘추> 별류편에 나온다. 노나라 사람 공손작이 “나는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 이것은 크나큰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고 장담한 데서 비롯됐다. 원뜻은 말 그대로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 의미지만,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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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實事求是(실사구시)

    ▶ 한자풀이實: 열매 실事: 일 사求: 구할 구是: 바를 시청나라 고증학파가 내세운 학문 방법론실질적인 일에 나아가 옮음을 구한다는 뜻-한서(漢書)한나라 경제에게는 유덕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유덕은 하간왕이 되었는데, 고서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을 좋아했다. 당시에는 진시황이 유학과 관련된 대부분의 서적을 불태운 상황이라서 고서적을 구하기 어려웠고, 책값도 비싸서 적잖은 돈이 필요했다.유덕이 학문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사람이 조상들이 물려준 옛책을 그에게 바쳤으며, 그를 따르는 학자들은 그와 함께 고서를 연구하고 정리했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유덕은 여러 학자와 고대 학문을 연구해 칭송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학문 연구를 즐길 뿐만 아니라 옛서적을 좋아하며, 항상 사실로부터 옳은 결론을 얻어낸다(修學好古 實事求是)”고 했다.‘실질적인 일에 나아가 옳음을 구한다’ ‘사실을 얻는 것을 힘쓰고 항상 참 옳음을 구한다’로 풀이되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출전은 <한서(漢書)> 하간헌왕전에 보이는데, 학문 방법론으로 제기된 것은 청대 고증학자들에 의해서다. 고증학의 학풍은 경전의 일자일구(一字一句)에 대해 정확히 자구를 해석하고 고증하는 것이 특징이다. 고증학자들은 송나라와 명나라의 학문이 경전의 본뜻에 어긋난 주관적인 해석에 빠지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허망한 담론이라고 주장했다.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 김정희의 ‘실사구시론’이 유명하다. 그 개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실사구시라는 말은 학문을 하는 데 가장 요긴한 방법이다. 만약 실사(實事)를 일삼지 않고 공허한 학술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