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열의 고사성어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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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형난제 (難 兄 難 弟)
▶ 한자풀이難:어려울 난兄:형 형難:어려울 난弟:아우 제후한 말의 학자 진식(陳寔)은 태구의 현령으로 적은 녹봉을 받으면서도 덕망이 매우 높았다. 그의 아들 진기(陳紀)와 진심(陳諶) 또한 학식과 덕망이 높아 당대 사람들은 그들 부자를 세 군자(君子)로 불렀다. 어느날 손님이 진식의 집에 머물러, 진식이 두 아들에게 밥을 지으라 했는데 어른들의 토론에 귀를 기울이다 밥이 죽이 되고 말았다. 진식이 그 연유를 알고 물었다. “그래, 우리가 나눈 얘기를 조금이라도 외우고 있느냐?” “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진기와 진심은 요점을 잡아 들은 얘기를 조목조목 설명했다. 진식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럼 됐다. 죽이면 어떠냐.”진기의 아들 진군(陳群)도 역시 뛰어난 수재로 재상까지 올랐다. 진군이 어렸을 때 진심의 아들 진충(陳忠)과 놀다가 서로 자기 아버지의 공적과 덕행을 논했는데 서로 자기 아버지가 낫다고 하여 결말을 짓지 못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인 진식에게 여쭸다. 진식이 답했다. “형이 낫다고 하기도 어렵고 아우가 낫다고 하기도 어렵구나(難兄難弟).”난형난제는 원래 ‘형이라 하기도 어렵고, 동생이라 하기도 어렵다’는 뜻이지만 현재는 사람이나 사물이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슷함을 일컫는다. ‘최근 몇 년 새 축구에서 한국과 일본은 난형난제다’ 등으로 쓰인다.누가 맏형이고 누가 둘째 형인지 모른다는 난백난중(難伯難仲), 어느 것이 위이고 어느 것이 아래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막상막하(莫上莫下), 서로 형세의 우열을 가리기 어려움을 일컫는 백중세(伯仲勢)나 백중지세(伯仲之勢), 역량이 우열을 가리기 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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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지교 (刎頸之交)
▶ 한자풀이刎:벨 문頸:목 경之:어조사 지交:사귈 교전국시대 조나라의 인상여는 진나라 소양왕에게 빼앗길 뻔했던 천하의 명옥인 화씨의 구슬을 무사히 보전해 돌아온 공으로 상대부직에 올랐다. 그리고 3년 뒤 상경(上卿) 자리까지 꿰찼다. 상경은 조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친 염파의 직위보다 높은 벼슬이었다.염파가 화를 냈다. “나는 목숨을 걸고 싸움터를 누볐는데 입만 놀린 인상여 따위가 나보다 윗자리에 앉는 게 말이 되는가.” 그는 인상여를 만나면 크게 모욕을 줄 거라고 떠벌렸다. 이 말을 전해들은 인상여는 염파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다. 병을 핑계로 조정에도 나가지 않고, 길에서도 염파가 보이면 멀찌감치 피해가곤 했다.인상여를 따르는 자들이 불만을 토로했다. “나리는 염파가 두려워 피해만 다니십니다. 이것은 범부에게조차 부끄러운 일입니다.” 인상여가 말했다. “내가 어찌 염 장군을 두려워 하겠소. 막강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나와 염파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오. 지금 두 호랑이가 다투면 둘 다 살아남지 못할 것이오. 내가 그를 피하는 까닭은 나라의 위급함을 먼저 생각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뒤로 하기 때문이오.”인상여의 말을 전해들은 염파는 맨몸에 가시채찍을 짊어지고 인상여의 문 앞에 이르러 사죄하며 말했다. “비천한 제가 상경의 넓은 도량을 미처 몰랐습니다. 앞으로는 ‘목숨도 내어줄 벗(刎頸之交)’이 되고자 합니다.” 목을 베어 줄 수 있을 정도로 절친한 사귐을 나타내는 문경지우(刎頸之交)는 <사기>의 이 고사에서 유래한다.미국 역사가이자 작가인 헨리 애덤스는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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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지십 (聞 一 知 十)
▶ 한자풀이聞:들을 문一:한 일知:알 지十:열 십세계 4대 성인 중 한 명으로 꼽히는 공자는 인(仁)을 강조한 유가(儒家)의 창시자다. 그의 유가적 사상은 동양적 사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음악 주역 시(詩) 등에도 두루 조예가 깊었다. 제자만도 3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제자들의 재주도 각자 달랐다. 누구는 학문에 뛰어나고, 누구는 장사에 밝았다.자공(子貢)은 재산을 모으는 데 남다른 재주가 있어 공자가 세상을 돌아다니며 유세하는 자금의 대부분을 뒷받침했다. 안회(顔回)는 가난했지만 총명하고 영리할 뿐만 아니라 효심이 깊어 공자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하루는 공자가 자공에게 물었다. “자공아, 너는 안회와 비교해 누가 낫다고 생각하느냐?” 자공이 답했다. “저를 어찌 안회와 비교하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깨치는(聞一知十)’ 사람입니다.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깨칠 뿐입니다.” 겸손한 듯하지만 실은 자기도 꽤 안다는 의미의 답변이었다. 자공은 스스로의 재주를 믿고 자만심이 강해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過猶不及)’는 지적을 듣기도 했다. 자공의 속내를 떠본 공자가 말했다. “그래, 어림없느니라. 너만이 아니라 나도 한참 미치지 못 하느니라.”‘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으로 매우 영특함을 의미하는 문일지십(聞一知十)은 <논어> 공야장 편에 나온다. ‘그는 문일지십의 영재다’ 등으로 쓰인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책을 통해 스스로 익히는 것은 하나를 들으면 둘 셋을 깨치려는 ‘지적 내공’을 강화하는 훈련인 것이다.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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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삼모사 (朝三暮四)
▶ 한자풀이朝:아침 조三:석 삼暮:저녁 모四:넉 사중국 전국시대 송나라에 저공(狙公)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그는 원숭이를 너무 좋아해 집에서 수십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는 가족의 양식까지 퍼다 먹일 정도로 원숭이를 아꼈다. 원숭이들 역시 저공을 따랐고 사람과 원숭이 사이에는 의사소통까지 가능해졌다.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이처럼 많은 원숭이를 기르다 보니 먹이는 게 여간 부담이 아니었다. 고민 끝에 저공은 원숭이의 먹이를 줄이기로 했다. 그러나 먹이를 줄이면 원숭이들이 자기를 싫어할 것 같아 머리를 썼다. “앞으로는 너희들에게 나눠주는 도토리를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씩 줄 생각인데 어떠냐?” 그러자 원숭이들은 펄쩍 뛰며 “아침에 하나 덜 먹으면 배가 고프다”며 화를 냈다. 그러자 저공이 슬쩍 말을 바꿨다. “그렇다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씩 주는 건 어떠냐?” 그 말에 원숭이들은 모두 좋다고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朝三暮四)’라는 뜻의 조삼모사는 당장 눈앞의 차별만을 따지고 그 결과가 같음은 모르는 어리석음을 비유한다. 간사한 잔꾀로 남을 속이고 희롱함을 일컫기도 하다. <열자> <장자>에 함께 나오는 얘기다. ‘무분별한 복지정책은 조삼모사로 국민을 현혹한다’ 식으로 활용된다. 스스로가 어리석으면 조삼모사에 넘어가기 쉽고, 때로는 정치인들이 조삼모사식 정책으로 유권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고친다’는 조령모개(朝令暮改)와는 뜻이 다르다. 조삼모사는 ‘간사한 잔꾀’에, 조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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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출어람 (靑 出 於 藍)
▶ 한자풀이靑: 푸를 청出: 날 출於: 어조사 어藍: 쪽 람중국 전국시대 사상가 순자(荀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했다.인간은 태어남과 동시에 순수함에서 멀어지니 예(禮)로 선함을 바로세워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인간이 선(善)의 씨앗을 품고 태어났다는 맹자의 ‘사단지심(四端之心)’과 대비되는 주장이다.순자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긴 <순자> 권학편에는 학문의 중요성을 깨우치는 글이 나온다. ‘학문은 그쳐서는 안 된다(學不可以已). 푸른색은 쪽(藍·한해살이 풀로 잎은 염료로 쓰임)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靑取之於藍而靑於藍), 얼음은 물에서 비롯됐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氷水爲之而寒於水).’ 학문이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이므로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푸른색이 쪽빛보다 푸르듯이, 얼음이 물보다 차듯이 면학을 계속하면 스승을 능가하는 학문의 깊이를 가진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여기서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인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나왔다. 원래 ‘청출어람 청어람(靑出於藍 靑於藍)’이라고 해야 ‘쪽빛보다 더 푸르다(靑於藍)’는 의미가 갖춰지지만 일반적으로 줄여서 청출어람으로 쓴다. 또 이런 재주 있는 사람을 ‘출람지재(出藍之才)’라고 한다. ‘뒤에 오는 사람은 두려워할 만하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후생가외(後生可畏)도 의미가 같다.청출어람을 보여주는 구체적 사례 하나. 북위(北魏)의 이밀은 어려서 공번을 스승으로 삼아 학문을 닦았다. 그의 학문은 몇 년이 지나자 스승을 능가하게 됐다. 공번은 이제 그에게 더 이상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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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연지기 (浩然之氣)
▶ 한자풀이浩: 넓을 호然: 그럴 연/불탈 연之: 갈 지氣: 기운 기맹자가 제나라에 머물던 어느 날, 제자 공손추가 물었다. “선생님이 제나라 대신이 되어 도(道)를 행하시면 제를 천하의 패자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시면 선생님도 마음이 움직이시겠지요.” 맹자가 답했다. “나는 마흔이 넘어서부터는 마음이 움직인 적이 없다.” 공손추가 다시 물었다. “마음을 움직이지 않게 하는 방법이 있으신지요.” “그건 용(勇)이니라.”맹자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음속에 부끄러운 게 없으면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게 대용(大勇)이다.” 공손추가 재차 물었다. “그럼 선생님의 부동심(不動心)과 고자의 부동심은 무엇이 다른지요.” 맹자가 답했다. “고자는 이해되지 않는 말을 애써 이해하지 말라 했다. 하지만 이는 소극적 태도다. 나는 말을 알고 있고(知言), 호연지기(浩然之氣)도 기르고 있다. 호연지기는 평온하고 너그러운 화기(和氣)다. 기(氣)는 광대하고 올바르고 솔직한 것으로, 이것을 기르면 우주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 지언(知言)은 편협하고 음탕한 말, 간사하고 꾸미는 말을 구별하는 밝음(明)이 있다는 의미다.고자(告子)는 맹자의 논적(論敵)으로 사람의 본성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고 주장한 사상가다. 그는 “출렁대는 물은 방향이 없으며 동쪽을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을 터주면 서쪽으로 흐를 뿐”이라며 맹자의 성선설을 반박했다. 이에 맹자는 “물은 아래로 흐른다. 아래를 막으면 물이 거슬러 오르고, 손으로 때리면 물이 허공으로 솟구치지만 그건 인간이 본성에 인위를 가한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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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포자기 (自 暴 自 棄)
▶ 한자풀이自: 스스로 자暴: 사나울 포自: 스스로 자棄: 버릴 기모든 건 안에서 먼저 비롯된다. 스스로를 업신여기면 남도 나를 깔본다. 가족 간 화해가 깨지면 이웃도 내 집을 무시한다. 군신 간 질서가 무너지면 주변도 내 나라를 얕본다. 모든 건 스스로에게서 말미암는다.맹자가 말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自暴) 자와는 더불어 이야기를 나눌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自棄) 자와는 더불어 행할 수 없다. 입만 열면 예의를 헐뜯는 것을 자포라고 하고, 인(仁)에 살지 않고 의(義)를 행하지 않는 것을 자기라고 한다. 인은 사람의 편안한 집이고, 의는 사람의 바른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살지 않고, 바른길을 버리고 행하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맹자》 이루편에 나오는 얘기로, 자신을 학대하고 돌보지 아니함을 일컫는 자포자기(自暴自棄)가 유래한 구절이다.맹자는 자포를 ‘스스로 학대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스스로 학대한다는 건 예와 의를 버리는 것이다. 유가의 예(禮)는 뜻이 깊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예절 그 이상이다. 그건 나를 자존으로 바로 세우는 일이다. 진항이 공자 아들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스승님(공자)과 남달리 같이 있으니 따로 들은 얘기가 있겠지요.” 백어가 답했다.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뜰을 지나가는데 ‘너는 예를 배웠느냐’ 하시기에 ‘아직 못 배웠습니다’ 했더니 ‘예를 배우지 않고는 바로 설 방도가 없느니라’ 하시기에 물러나 예를 배웠습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내가 나를 돕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돕지 않는다. 설령 그런 나를 누군가가 돕는다 해도 그건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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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장춘몽 (一 場 春 夢)
▶ 한자풀이一:한 일場:마당 장春:봄 춘夢:꿈 몽소동파(蘇東坡)는 송나라 최고의 문장가다. “독서가 만 권에 달해도 율(律·왕안석의 신법을 지칭)은 읽지 않는다”고 해 초유의 필화사건을 일으킨 타고난 자유인이다. 그의 《적벽부(赤壁賦)》는 중국 문학 불후의 명작이다. 자신은 문장의 최고봉이면서 “인생은 글자를 알 때부터 우환이 시작된다(人生識字憂患始)”는 그의 말 또한 아이러니다. 하기야 그 스스로가 문자로 인해 큰 우환을 겪었으니 ‘식자우환(識字憂患)’이 틀린 말은 아니다.그가 해남 창화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큰 표주박 하나 메고 콧노래 부르며 산책을 하다 70대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소동파의 초췌한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문장으로 당대 천하를 놀라게 한 그가 초라한 몰골로 시골길을 걷는 것을 보면서 인생무상이 느껴졌다. 노파가 말했다. “지난날의 부귀영화는 그저 한바탕 꿈에 지나지 않는구려(一場春夢).” 소동파가 태연히 말을 받았다. “맞습니다. 참으로 맞습니다.” 북송의 조령치가 지은 《후청록》에 전해오는 이야기다.일장춘몽(一場春夢)은 여름이 오기 전에 사그라지는 ‘한바탕의 봄 꿈’이다. 덧없이 왔다 덧없이 가는 봄 한철의 아지랑이 같은 꿈이다. 당나라 한단에서 노씨 성을 가진 서생이 도사 여옹의 베개를 빌려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부귀영화 꿈을 꾸었다는 한단지몽(邯鄲之夢), 노생지몽(盧生之夢)도 뜻이 같다. 부귀영화라는 게 부질없고 덧없는 것이니 애타게 매달리지 말라는 거다.허무주의자는 모든 게 덧없다고 생각한다. 비관주의자는 안 될 거라고 염려하고, 낙관주의자는 잘될 거라 믿는다. 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