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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탐라, 유구국 등 아시아 남방지역과 활발한 교류…당나라 거주 신라인들의 경유지 역할 했을 수도

    해양 소국 탐라(耽羅)는 고대 국가들의 흥망성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탐라는 고구려와도 연관을 맺었다. 《위서(魏書)》에는 문자왕 때 북위에 파견된 사신이 “황금은 부여에서 나고, 가(珂·진주라는 설)는 섭라(제주도)에서 생산됐는데, ‘가’는 백제가 점령해 못 보낸다”고 변명하는 내용이 있다. 또 제주의 삼성신화(三姓神話)를 수록한 《영주지(瀛洲志)》에는 시원신화를 소개하면서 삼성혈에서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가 솟았다고 했는데, 비슷한 이야기가 실린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는 고씨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제주도와 고구려는 경제적인 교류는 물론 주민들 이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신라에 항복…801년 이후 국가 관련 기록 없어탐라는 신라와는 비교적 늦게 관계를 맺었다. 《영주지》에는 고을나의 15대 손인 고(高)씨 3형제가 신라에 입조해 왕에게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는 662년에 탐라국주가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신라와 교섭을 벌였지만, 801년을 끝으로 기록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장보고를 비롯해 당나라에 거주했던 ‘재당 신라인’들은 일본을 오고갈 때 제주도를 경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키나와와 교류해 주목탐라는 일본 열도와도 교섭이 활발했다. 《영주지》에 따르면 3성혈에서 나온 ‘고·양·부’ 3인과 결혼한 삼신녀는 일본으로 알려진 동해 벽랑국에서 왔다. 661년 5월에는 왕자인 아파기 등이 왜국에 공물을 바쳤고, 665년부터 693년까지 빈번하게 사신단을 파견했다. 또 저장성 해안을 출항한 4차 일본 견당선이 표류 끝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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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 대륙과 해양 연결하는 물류망 거점 역할

    우리 역사에서 신비롭고 역동적이며 국제적인 나라가 있었다. 독특한 가치를 지녔던 해양 소국 탐라(耽羅)다. 고려 후기 삼별초 세력이 최후의 항전을 펼쳤으며, 뒤따라 들어온 몽골인들이 말을 사육하면서 속지로 삼았다. 바다를 소외시킨 조선에서는 유배지로 사용되면서 기피의 땅이 됐다. 현대에 들어와 발생한 비극들은 아직 치유가 덜 됐다.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지 않더라도 해륙적인 관점에서 제주도는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동아지중해 해륙교통망의 인터체인지에 있다. 몽골과 북만주, 랴오둥반도, 산둥반도에서 육지와 해안, 짧은 서해를 이용해 한반도에 닿은 후, 추자군도를 중간에 두고 100㎞ 정도 건너면 상륙할 수 있다. 중국의 저장성, 푸젠성에서 해류와 서풍계열의 바람을 이용하고, 또 동남아시아에서는 흑조(구로시오)에 올라타고, 봄철에 부는 남서계절풍을 이용해 오키나와를 거쳐 동북상하면 제주도에 닿는다. 물론 고려나 조선시대의 표류 기록들에 나타나듯 반대의 현상도 있었다. 中·日·삼한과 활발하게 무역제주도에서 대마도(쓰시마섬)까지는 대략 255㎞로 멀지만, 항해 조건은 좋은 편이다. 북부의 사고 마을에 보존된 ‘오카리부네’는 제주도의 ‘테우’와 같은 종류의 뗏목이다(정공흔 설). 규슈 서쪽의 고토열도는 근대에도 뗏목을 타고 오갔을 정도로 밀접했다. 2003년 대포항을 출항한 뗏목 장보고호는 폭풍 속에서 표류했는데도 13일 만에 나루시마에 안착했다. 해발 1995m인 한라산은 시인거리가 약 160여㎞이므로, 원양 항해하는 선박들의 이정표 역할을 했다. 동서 73㎞, 남북 41㎞에 면적이 1845㎢로 사람들이 모여들어 거주하면서 교류하기에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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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대마국과 해양·무역권 다퉜던 우산국…신라, 우산국 확보 힘입어 북진정책 '성공'

    신라가 우산국을 복속시킬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전해주는 이야기도 있다. 우산국은 작지만 바다에서는 힘이 셌고, 우해왕은 기운이 장사였다. 대마도의 왜구들이 우산국을 노략질하자 우해왕은 수군으로 원정을 감행했다. 겁먹은 대마국왕은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셋째 딸인 풍미녀를 바쳤다. 우해왕은 왕비로 삼은 풍미녀의 변덕과 사치를 위해 신라까지 노략질했으며, 정치를 게을리했다. 심지어는 신라가 공격한다는 정보를 보고한 신하까지 바다에 처넣었다. 섬사람들은 풍미녀 때문에 나라가 망할 것이라며 근심에 빠졌다. 결국 몇 해 뒤 우산국은 망하고 말았다(《울릉문화》).비록 설화지만, 우산국이 단순한 어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군사력과 경제력을 보유한 동해의 해양소국임을 알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해상권과 무역권을 놓고 동해와 남해에서 대마국과 충돌한 상황도 추측하게 한다. 실제로 그 무렵인 544년에는 연해주 해안에 살던 숙신인(여진 계통)들이 봄과 여름에 사도섬(니가타현)에서 어업을 했고, 이후에도 대화 없이 물건들을 교환하는 ‘침묵교역’도 벌였다(《일본서기》). 동해에서도 원양항해가 활발했던 것이다. 해양전략적 가치 큰 요충지그 뒤 신라는 동해 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진흥왕은 북진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만큼 우산국은 해양전략적인 가치가 컸다. 항복한 우산국은 신라에 매년 토산물을 바쳤지만 해양문화의 메커니즘과 국제환경을 고려한다면 정치적인 힘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신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금도 섬의 북쪽과 남쪽에는 6세기 중엽부터 만든 100여 기의 돌무덤이 남아 있다. 경상도의 영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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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국, 일본 가는 동해 항로 '항해 물표' 역할…고구려·신라, 5세기부터 전략적 가치 선점 나서

    우리 역사에는 육지의 나라만 있지는 않았다. ‘해중지(海中地)’, 즉 물의 나라, 섬의 나라도 있다. 사료에는 동해의 우산국, 남해의 탐라국과 대마국, 서해의 대석삭국(강화도)과 소석삭국(교동도)만 나온다. 하지만 랴오둥반도의 동남쪽 아래인 장산군도, 경기만 바깥의 백령도를 비롯한 연평군도, 덕적군도, 또 흑산군도에도 소국들이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동해 유일의 섬, 울릉도해가 처음 떠오르는 동해는 남북 길이가 1700㎞, 동서 최대 너비는 1000여㎞, 면적은 107만㎢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타타르 해협’까지 포함한 것이다.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하나뿐인 섬이 72.6㎢ 면적의 울릉도다. 1032년 ‘우산국주’가 아니라 ‘우릉성주’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우산국(于山國)이었지만, 이후에는 무릉(武陵), 우릉(羽陵), 우릉도(芋陵島 또는 于陵島, 羽陵島), 우릉성(羽陵城), 독섬 등으로 불렸다. 울릉도에서 88㎞ 떨어진 독도는 ‘새끼섬’이다. 생산활동의 중요한 영역이고 피항하거나 항로를 관측하는 데 절대적인 생활공동체다.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도 ‘울릉(鬱陵) 우산(于山)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라고 하나의 역사적 영토로 규정했다.육지에서 울릉도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다. 울진에서 159㎞, 강릉에서 178㎞, 삼척에서 161㎞, 포항에서 217㎞다. 《삼국유사》에는 ‘하슬라주(지금의 강릉)의 바다에서 바람을 타고 2일 정도 가면 우릉도(于陵島)가 있는데, 주변이 2만6730보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선사시대 유적도 발굴돼하지만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은 동해를 건넜다. 섬 안에서 기원전 300년께의 무문토기들이 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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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한반도 동남부와 일본 서쪽지역 지배…대한해협 사이에 두고 원격통치한 것으로 봐야

    5세기 들어 동아지중해에서는 항로 확보 등을 둘러싼 고구려·백제·신라·가야·왜 등 해양력 경쟁체제가 만들어졌다. 국가들의 역학관계에도 질적인 변화가 생겼다. 가야 세력들은 남해항로의 독점권을 빼앗기고 무역의 이익이 분산되면서 그 위상이 약해졌다. 해양국가인 데다 연맹체제를 벗어나지 못해 효율적인 관리와 조직적인 통제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결국 가야의 핵심 세력은 이 한계들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일본 열도로 더욱 진출했다. 남은 세력들 가운데 낙동강 중류의 수로망을 장악한 대가야와 남강·남해안의 항구를 가진 아라가야는 고령의 지산동 32호, 44호분과 함안의 말이산 34호분에서 기마용 장비들이 출토된 것처럼 제철문화를 발전시켰고, 일본 열도와 교류했다. 가야, 양안 국가 체제 선택이런 복잡한 시대 상황과 왜와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이론들이 몇 가지 있다. 임나일본부설(일제강점기 일본학설), 기마민족 정복국가설(에가미 나미오), 부여계 기마인들의 진출설(존 코벨), 일본 열도 내 삼한 분국설(북한의 김석형), 백제 진출설(신채호, 문정창), 전남의 전방후원분으로 인한 새로운 설들이 있다(박천수). 소위 ‘기마민족설’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기마민족이 북규슈로 이동한 후 임나까지 포함해 ‘왜·한 연합왕국’을 형성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왕이 북규슈에 본거지를 두었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는 한반도 남부에서 작전권을 주도한다는 논리이므로 ‘임나일본부설’의 변형이라는 한계가 있다.(천관우)또 하나가 양안 국가설(윤명철 《동아지중해와 고대일본》 1996년)이다. 나는 1994년에 배로 지중해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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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수한 철제무기로 3~4세기 일본 진출한 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과 4국 해양 경쟁시대 열어

    한 집단의 내부 분열이 심해지면 붕괴로 끝날 수 있지만, 간혹 회복될 수도 있다. 반면 외부 충격(침략)을 받으면 멸망에 이르기 쉽고, 재활하기 힘들다. 가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작동했기 때문에 4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에서 사라졌다. 백성들은 어떻게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일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가야는 농업과 수로망이 발달한 낙동강 유역과 어업 생산력이 좋으며 무역에 적합한 남해안을 터전 삼아 12개 이상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해양 무역을 활용해 일찍부터 일본 열도로 진출했다. 부산 대성동에 있는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말의 가야 목곽묘들에서는 철제갑옷과 투구, 마구류, 가죽방패 등이 나왔다. 2호분에서는 대형 철덩이 150점, 철칼 등이 발견돼 기마문화가 존재했고 무역이 활발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파형(바람개비) 청동기물, 통형 청동기물 같은 일본제로 알려진 유물도 출토돼 혼란을 일으켰지만, 제작 시기와 수준을 고려해 가야가 원류라는 주장(김태식)이 있다. 설사 일본제라고 해도 상호 교류하는 해양의 메커니즘 속에서는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우수한 철제무기로 무장한 가야인들은 함선을 거느리고 대한해협을 계속 건넜다. 4세기 무렵에는 관서지방인 야마토 지역까지 진출했다. 일본 열도에서는 4세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벼농사에 적합한 자연환경을 이용해 경제력이 급상승하고, 제철기술이 발달하면서 인구도 증가했다. 무엇보다도 지배자의 성격을 반영하는 큰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이 만들어졌는데, 부장품들은 주로 가야와 연관됐다. 4국의 일본 열도 진출과 해양 경쟁5세기에 들어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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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연결하며 활발했던 가야연맹의 해양 무역…고구려 남진에 대응해 일본 열도로 조직적 진출

    한반도 남동부 해안지역에는 기원전 1세기 초부터 한반도 서북부의 세형동검 등 청동기 및 철기문화와 토기문화가 유·이민과 함께 들어왔다. 이 무렵 만들어진 창원의 다호리 고분에서는 청동검과 중국제 거울, 각종 철제품, 오수전과 토기들, 붓, 화살 등이 출토됐다. 근처 사천의 늑도 유적지에서는 철기류와 토기들이 나왔으며 일본 야요이 중기의 토기도 출토됐다. 1세기 유적인 김해 양동리 일대에서도 철기 유적이 나타났다. 실제로 《삼국지》 변진(弁辰 또는 卞辰)조에는 나라에서 철을 생산하니 한(韓) 예(濊) 왜(倭)가 와서 취하며, 매매할 때는 철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있다. 해양무역 활발한 상업국가또 연나라 명도전(원조선의 화폐라는 주장이 나온다)과 그 후의 오수전, 화천 같은 화폐가 서해 북부 해안지대를 거쳐 한반도 남부 해안을 지나 제주도, 일본 열도까지 발견된다. 일종의 화폐 유통권이 성립된 상황을 반영한다. 삼한 소국의 일부는 바다를 건너 중국 지역은 물론 일본 열도와 무역을 하고 식민지도 건설했다. 일본 열도에는 기원을 전후한 시대에 100여 개의 소국이 있었고, 3세기 전반 무렵에는 30여 나라가 있었으며, 야마대국이 제일 컸다. 당연히 이 소국들의 주체는 한륙도에서 건너간 개척민이었다.이처럼 초보적인 무역권의 범위가 동아지중해 전체로 확산되면서 일본 열도가 그 시스템에 편입되는 역사의 전환기에 남해동부 해안에는 ‘무역도시’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삼한의 해양 소국들은 강력한 선단을 보유하고 안전하고 효율적인 뱃길, 좋은 항구와 선원을 확보하는 해양력 경쟁을 벌여야 했다. 물목을 장악한 구야한국, 즉 금관가야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한강 이남 소국 연합체 '삼한'에서 갈라져 나온 가야…남동해안에 무역선·사신선 머문 여러 국제항 만들어

    모든 정치력이 한데 모인 중앙집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지역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권력을 분산한 지방분권국가가 옳은 것일까? 청동기 이후 인류가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고, 지금도 한국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된다.가야는 서기 42년부터 562년까지 존속했다. 전기에는 백제, 신라와 자웅을 겨뤘다. 가장 먼저 일본 열도로 진출했고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였다. 하지만 중앙집권적 고대국가를 이루는 데 실패해 일찍 멸망했다.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四國)시대’라는 용어를 만들지 못한 가야의 성공과 실패는 해양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아유타국 허황옥 설화가야를 가리키는 용어는 다양하다. 원래 이름은 ‘구야’ ‘가라(加羅)’였지만 불교의 영향을 받은 듯한 ‘가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일본에는 ‘가야’ ‘가라’ ‘게야’ 등의 지명이 있으며 보통 ‘韓’으로 표기된다. 후에는 1870년대에 일본 근대화론자들이 주장한 ‘정한론’처럼 한국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됐다. 건국과 발전의 과정이 복잡하고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은 데서 이 같은 다양성이 나온다.《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는 건국설화가 두 개 실려 있다. 하나는 9간(干, 칸)이 구지봉에서 여섯 개의 알이 담긴 금합을 받았는데, 하나는 수로왕이 됐고, 나머지는 5가야의 주인이 됐다는 내용이다. 또 하나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신비하고 실체를 알기 힘든 허황옥(許黃玉) 이야기이다. 48년 7월 27일,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망산도(지금의 창원 인근)에 닿았다. 배에는 돌탑과 20여 명의 종자, 16세의 여인과 오빠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