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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니부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사회와 개인은 누가 더 이기적라인홀드 니부어의 명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는 개인 윤리의 한계를 밝히고 사회 윤리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므로써 윤리학사에 큰 획을 그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니부어는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극명하게 대비하고 있다. 니부어가 이렇게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은 사회 문제에 대한 개인 윤리적 입장을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위함이다.그런데 여기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 제목만 보고 ‘인간은 도덕적이고 사회는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그가 인간을 ‘도덕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간이란 어떤 행위를 할 때 비교적 집단적 사회보다는 타인을 배려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존중할 줄 안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라는 것이다. 이에 반해 ‘사회는 개인보다 훨씬 더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란 인종, 민족, 계급, 국가 등 개인을 넘어서는 일체의 집단을 뜻한다. 그리하여 개인이 일단 집단이 되면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성향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니부어가 나중에 자신의 책 제목에 대해 말한 대로 ‘비도덕적 인간과 더욱 비도덕적인 사회(Immoral Man and Even More Immoral Society)’라고 붙이는 것이 책 제목으로서 더 적절하지 싶다.개인 윤리와 정치 영역개인과 집단의 도덕적-사회적 행위가 다르다는 니부어의 분석은 집단에는 개인적인 윤리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정치 영역이 존재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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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가로 더 유명사르트르는 ‘제도화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로 수상에 대한 거절 이유를 밝히긴 하였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권위에 의해 규정된 자신으로 살기보다 글을 통하여 자유롭게 의미를 창출하는 실존주의 작가로서의 삶을 선택한 그의 실존주의 철학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핵심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고 한 사르트르의 명언에 잘 압축되어 있다. 이 한 문장에 실존주의 철학이 압축되어 있느니만큼 이를 이해하는 데에는 보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고려해야 할 것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실존주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르트르의 이 명언이 실존주의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것은 그것이 사물과 대비되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사물의 존재 양식과 달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인간의 존재 양식을 개념적으로 구분함으로써 이로부터 실존주의의 핵심 개념인 인간의 주체성을 이끌어내고 있다.그렇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먼저 그 반대인 ‘본질이 사물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교실의 의자를 생각해보자. 의자는 교실에 존재하기에 앞서 그 책상을 제작한 사람의 머리 속에 그 본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무엇 때문에 이 의자를 만들며, 의자의 재료는 무엇으로 할 것이며,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와 같은 의자에 대한 구상이 제작자의 머리 속에 먼저 그려진 다음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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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하): 언어게임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그런데 비트겐슈타인 언어관에서 ‘그림’에서 ‘게임’으로의 전환은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극적이다. 그는 후기에 오면서 자신이 그토록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인 그림 이론을 스스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다시 철학계로 발을 돌리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아직 철학계에서 풀어야 할 문제가 그에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완벽하다고 믿었던 전기의 언어관인 그림 이론에서 비트겐슈타인이 문제를 파악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크게 잘못됐다고 비판한 일상 언어에서 나왔다. 새로운 관점에서 일상 언어를 살펴본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획일적인 법칙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하게 다양한 양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한 언어는 어떤 대상이나 사실을 그려주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엄마에게 “나 배고파”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그림 이론에서라면 ‘나 배고파’란 말의 의미는 ‘나’는 현재 배고픔이란 상태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그렸다고 설명할 것이다. 하지만 후기의 언어 게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이라면 그것은 굉장히 우스운 설명이 될 것이다. ‘나 배고파’라는 말은 엄마에게 “빨리 밥을 줘”라고 요청하는 말일 뿐, ‘나’가 현재 느끼는 배고픔 상태를 지시해 보여 주는 데 사용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용됐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의 그림 이론이 간과한 점이다.철학계로 돌아오다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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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상)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영국 철학자로서 언어 철학의 대표적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철학을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항공공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논리학과 수학에 흥미를 느껴 당시 수리철학 교수였던 러셀을 만나게 되면서 그 영향을 받아 철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포로가 되었을 때 수용소에서 집필한 책이 《논리 철학 논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언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용을 통해 세상의 진리를 규명하고자 하였다.수용소에서 쓴 ‘논리철학논고’“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는 말은 비트겐슈타인의 명저 《논리 철학 논고》라는 책에 나오는 명언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도 같은 이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또 그것에 대하여 침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초기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이 반영된 《논리 철학 논고》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된다. 이제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들어보자.“이 책은 철학의 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내가 믿기에는, 그 문제들이 우리가 언어의 논리를 오해한 데에서 생긴다는 점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의 전체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요약될 수 있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중략) 따라서, 나는 모든 본질적인 점들에 대한 문제의 최종 해결점을 찾았다고 믿는다.”기존 철학의 한계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기존의 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함으로써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비트겐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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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패러다임이란 원래 사물의 현상을 이해하거나 설명하는 생각의 틀, 또는 사물을 보는 방식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라데이그마’라는 말에서 유래하였지만, 쿤의 영향으로 요즈음은 과학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정치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특정 시대와 공간에 있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가리킬 때도 이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은 사물을 보는 방식 또는 문제의 인식과 해법에 관한 특정 시대의 과학자 집단의 공통된 이해를 가리킨다. 어떤 영역 전문가들의 공동체를 지배하고 그 구성원 사이에 공유되는 사물을 보는 방법, 문제를 삼는 방법, 문제를 푸는 방법을 말한다. 쿤이 말하는 과학 혁명이란 이와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의미한다.패러다임의 변화쿤은 어떤 근거로 과학의 변화는 혁명적이라고 주장했는가? 쿤이 과학의 변화에 혁명이라는 정치적 비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과학의 변화에서도 정치에서 말하는 혁명과 같은 현상이 있음을 드러내고자 함이다. 혁명이라는 말은 ‘갑작스럽고 급격하고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며, 따라서 과거와의 단절을 뜻하는 정치적 용어로서 점진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개량과 대비되는 개념이다. 예컨대 고려 말 온건 개혁파인 정몽주와 같이 당시 사회의 문제와 혼란은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라고 판단해 고려를 무너뜨리지 않고 제도를 바꿔 개혁하자는 입장이 ‘개량’이라면, ‘혁명’은 급진개혁파인 정도전 같은 이의 견해로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워 나라 자체를 바꿔버리자는 입장이다.‘점진적 개량이냐, 단절적 혁명이냐&rsq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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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포퍼(하): 열린사회와 그 적들

    포퍼의 저서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 제목은 도발적이다. ‘적(敵)’이란 맞서 싸워야 할 상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적’들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며 그것은 왜 투쟁의 대상인가? 먼저 ‘열린사회’의 철학적 성격이 무엇인지를 밝히면 그에 대립하는 ‘그 적들’의 정체도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반증이 허용되는 열린사회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이론적인 토대는 그의 반증주의 과학철학이다. 말하자면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라는 책은 그가 과학철학에서 정리한 논리를 사회철학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다. 따라서 포퍼의 과학철학에서 ‘반증’이라는 개념은 ‘열린사회’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핵심 열쇠가 된다. 그에 의하면 한 이론이 과학적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경험적으로 반증될 수 있어야 한다. 일단 어떤 과학 이론이 제시되면 그 이론은 엄격한 테스트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반증되면 그 이론은 폐기되지만, 반증되지 않는 것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반증을 위한 비판과 토론이 살아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이 점에서 보면 과학자 사회야말로 ‘열린사회’의 표본이다.포퍼가 제시하는 열린사회의 모습은 그의 비판적 합리주의 사상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비판적 합리주의란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주의의 전통을 따르되, 이성을 절대적으로 간주하기보다 ‘인간의 이성은 원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지도 모르며, 노력에 의해서 우리는 진리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라며 오류 가능성을 제시한 포퍼의 주장에는 그의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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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포퍼(상) 반증주의

    “과학실증주의는 틀렸다”논리 실증주의자들은 “논리적으로 자명하거나 경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명제만이 의미있다”고 주장함으로써 형이상학을 의미없는 것으로 보고 과학 지식만을 철학의 대상으로 분명하게 선포했다. 하지만 포퍼가 보기에 그들이 내세운 검증 원리는 결정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먼저 무엇이든 엄밀하게 검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흄이 제시한 질문, “내일 또 해가 뜰 것이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를 보면 귀납 논리로는 이제껏 셀 수 없는 해가 떠올랐으니 내일도 해가 떠오를 거라고 추정하는 것은 타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같은 결과가 많이 나온다고 절대적인 진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러셀 또한 “칠면조 입장에서는 매일 모이를 주던 주인이 어느 날 목을 비틀어 죽이는 상황은 귀납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며, 귀납적으로 명제의 ‘참’과 ‘거짓’을 확실히 검증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검증 원리는 그들이 몰아내려 했던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그들이 옹호하려 했던 과학적 지식까지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까마귀는 검은색’ 반증될 수 있어그래서 포퍼가 과학 이론을 정당화시킬 새로운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반증 가능성 원리’다. “과학 이론은 검증될 수 없어도 반증될 수 있다”는 말 속에는 그의 반증주의 원리가 잘 요약돼 있다. 이 말은 아무리 많은 실험의 반복도 과학 이론을 확실히 검증해주지는 못하지만, 이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는 단 한 번의 부정적인 실험결과로 충분하다는 의미다. 가령 ‘모든 까마귀는 검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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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래그머티즘(하)-듀이의 도구주의

    미국 실용주의 ‘완성’듀이는 자신의 실용주의를 도구주의라 불렀다. 여기서 도구주의란 모든 가치를 유용성 입장에서 파악하고. 인간의 지식을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로 보는 입장을 말한다. 듀이의 이러한 지식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다윈의 진화론이었다. 공교롭게도 듀이가 태어난 1859년은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해이기도 하다. 듀이는 다윈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지식을 해석한다. 인간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적응해야 하는 유기체다. 하지만 동물과 달리 인간은 문제 상황에 직면해 ‘사고’를 통해서 문제 해결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 해결에 동원되는 인간의 지식, 이론, 학문 같은 것들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칸트는 틀렸다이와 같은 듀이의 도구주의는 그의 도덕 이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에게 도덕이란 칸트의 주장처럼 인간 내면의 어떤 절대적 법칙이 아니고, 끊임없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현실 생활에서 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유용한 규칙일 뿐이다. 그가 보기에 인간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유용한 것이 옳은 행동이고 좋은 것이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도덕이 한 인간과 그의 사회적 환경과의 상호 작용의 문제라고 하는 것은 마치 보행이 다리와 물리적 환경과의 상호 작용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즉 보행의 성격은 다리의 힘과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그러나 보행은 또한 진흙길을 걷고 있는가 아니면 포장된 도로를 걷고 있는가에 따라 좌우되며, 그리고 양옆에 안전 보도가 있는 길인가 아니면 위험한 자동차 사이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