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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중국 남북조와 '동아시아 4강' 형성한 고구려…전투·외교·무역 병행하며 국가 위상 높였다

     장수왕의 해양 진출광개토대왕으로부터 광대해진 영토를 물려받은 장수왕은 꾸준히 요서를 공략하는 한편 북연과 북위, 송나라가 벌이는 중국의 질서재편전에 참여해 국가의 위상을 크게 높였다. 427년에는 400여 년 동안 북방 진출의 거점이었던 국내성을 떠나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1866년에도 미국 기선인 제너럴셔먼 호가 입항한 서해와 연결된 항구도시인 평양은 남진정책을 강화하는 동시에 해양 진출과 해양 외교를 유리하게 추진하는 교두보였다.장수왕은 475년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한 뒤 남진을 계속했다. 서쪽은 금강 이북과 대전 일부 지역을, 동쪽은 경북의 순흥 안동 청송을 지나 영해까지 영토로 삼았다. 481년에는 포항 외곽까지 공격해 육지 영토를 넓혔다. 동해 중부 이북, 서해 중부 이북, 요동만에서 해양력을 강화했고,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은 경기만을 안정적인 내해로 삼아 평양, 강화, 남양(화성시) 등을 항구로 삼았다. 중국 남북조와 치열한 해상권 다툼서해를 중심으로 한 동아지중해 각국의 해상권 다툼도 치열했다. 북위는 480년 고구려가 남제에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했으며, 6세기 초에는 남제가 고구려 안장왕에게 파견한 사신선을 나포하기도 했다. 고구려가 서해 해상을 봉쇄한 적도 있었다. <위서> 백제전에는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가 펴는 일종의 해상봉쇄에 위기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고구려는 무역 규모가 컸을 뿐 아니라 황금, 은, 모피, 무기, 말, 인삼 등 수출품의 질도 뛰어났다. 제주도(涉羅)에서 ‘가(珂)’라는 보물을 구해 북위와 무역하기도 했다.4세기부터는 일본 열도와도 교류했다. 지금도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기마군단 못지 않은 정예 수군 보유한 고구려…왕성한 정복·외교활동 펼친 '해륙국가'였다

    고구려는 광활한 만주 벌판을 달리던 기마민족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약소국의 설움 속에서 우리가 꿈꾸고 닮고 싶었던 나라의 이미지다.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주장한 ‘기마민족국가설’이 불을 지른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고구려는 뛰어난 무장력을 갖춘 기마군단을 운용하는 동시에 정예 수군과 왕성한 해양활동으로 이름난 ‘해륙국가’였다.한반도에선 20세기 초까지도 큰 배가 다닐 수 있는 18개의 강을 이용해 교통과 물류가 발전해왔다. 만주는 서북쪽 일부 초원과 건조 지대를 빼놓고는 송화강, 요하, 흑룡강, 모란강을 비롯한 60여 개의 강에서 큰 배들이 다녔다. 비록 사료에는 없지만 자연환경, 역사적 상황,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을 보면 고구려 시대에도 강상(江上) 수군이 활동했다. 훗날 조선시대에 와서도 효종이 청나라에 파견한 병사들은 러시아군과 송화강에서 수상전투를 벌여 승리했다. 1930년대 초 일본군은 흑룡강에서 강방함대(일본 관동군의 함대)를 운영했다.3세기 오나라와 해상무역고구려는 원조선의 능력을 계승한 데다 전기부터 한반도의 북부와 남만주 일대를 영토로 삼았기 때문에 요동만과 서해 북부, 동해 북부에서 활발한 해양활동을 벌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장거리 항해를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한 사례는 3세기 전반에 처음 나타난다. <삼국지>의 주역인 조조, 유비가 차례로 죽고 손권이 위나라와 전쟁을 벌이던 233년,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구려는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오나라에 값비싼 담비가죽 1000장, 할계피(꿩가죽), 전략물자인 각궁(고구려의 활) 등을 보냈으며 두 나라는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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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계속된 영토 확장은 '원조선 회복 전쟁'…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했다

    ‘원조선 회복’ 나선 고구려<삼국유사>는 왕력 편에 ‘주몽은 단군의 아들(朱蒙…鄒蒙 壇君之子)’이라고 기술했고, <수서>를 비롯한 여러 책에도 고구려의 땅은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라는 글이 있다. <삼국사기>에도 247년조에 ‘평양은 본래 선인인 왕검이 있었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적어 원조선이 고구려와 특별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준다. <삼국사기>는 또 주몽이 벌인 정복사업들을 기록하면서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평가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인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옛 질서와 체제를 회복한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원조선의 질서를 회복하고 옛 영토를 수복하는 일을 일종의 국시로 삼은 것이다.끊임없이 진행한 정복전쟁고구려는 초기부터 백두산 주변에 있는 행인국, 동해북부와 연해주에 걸쳐 있는 북옥저 등을 정복했다. 뒤를 이은 임금들도 양맥·개마·구다·동옥저·갈사·조나·주나 등 크고 작은 소국을 병합했다. 대체로 백두산 지역, 압록강 남쪽 지역, 동해안 일대, 연해주 일대, 그리고 중만주의 부여 영토까지 이르는 넓은 지역이다. 한편 대외전쟁을 펼쳐 2대 유리왕 때부터 북쪽의 선비족을 공격하고, 한나라가 남겨둔 잔존 세력들을 몰아냈다. 5대 모본왕은 서기 49년에 요동지방과 요서지방을 지나 현재의 베이징 근처와 그 이북인 북평·어양·상곡·태원 등을 공격했다. 뒤이어 6대 태조대왕은 요서지방에 10성을 쌓아 관리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9대 광개토태왕은 22년간 재위하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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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에 패했지만 자의식 보존한 원조선 유민들…유사한 언어·문화·종족 바탕으로 수복전쟁 나서

    근래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놓고 다른 견해가 돌출하거나 그 의미를 훼손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 독립군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됐고, 우리는 이를 계승했다. 반면 북한은 ‘조선’을 국호로 택했다. 민족을 강조하며 ‘주체사관’을 정립한 뒤에는 단군릉을 만들고 ‘조선 계승’ 사실을 강조했다. 비록 잘못된 방식으로 이용하고 있지만, 역사의 계승성과 정통성이 체제 경쟁에서 효과적임을 알고 있다는 방증이다.불분명하게 기술된 원조선개인은 물론 나라와 민족에도 정통성과 계승성은 존재 방식과 관련해 매우 중요하다. 뿌리야말로 존재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4000여 년 역사 속에서 수백 개의 나라가 명멸했고, 전혀 다른 종족과 언어집단들이 번갈아가며 나라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라는 이름 아래 계통을 분명히 하고 역사책에 서술했다. 지금도 ‘중화’라는 자신감을 토대로 국가를 경영한다. 일본은 고대에는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고, 현재 일본도 19세기 중반이 지나서야 비로소 완성됐다. 이런 상황에서도 ‘만세일계’라고 하며, 기원전 660년 전부터 현재까지 한 영토에서 하나의 역사가 이뤄졌다고 계통성을 분명하게 선언한다.그러면 지금 우리는 역사 속 계승성과 정통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국립중앙박물관 앞 전시실에 설치한 연표에 고조선 조항이 들어간 것은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역사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쓴 시민들의 주장 덕분이었다. 역사책에서는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등이 ‘부족국가’에서 출발했다고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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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농토·풍성한 수확물 찾아 대항해 나선 한반도 남부인…1000년 동안 철기와 볍씨 쪽배에 실어 남해 건넜다

    야요이시대 사람의 생물학적 유사성일본 야요이문화를 발전시킨 이주민들의 정체는 생물학적인 성격을 분석하면 더욱 확실해진다. 유골들은 키가 크고, 얼굴이 길며, 코가 높다. 하니하라 가즈로 일본 도쿄대 교수는 몇 가지 실험을 했다. 인구 모델을 적용했더니 기원전 300년 경부터 기원후 700년까지 원주민의 비율과 도래인(진출자)의 비율은 1 대 9.6이었다. 또 두개골의 형태를 비교했더니 원주민과 이주계의 혼혈 비율이 서부 일본은 1 대 9 내지 2 대 8에 가깝고, 간토(關東) 지방은 3 대 7이었다. 1000년 동안 사람들이 대규모로 험한 바다를 건너와 정착한 것이다. 또 신라계 주민들이 주로 개척한 돗토리현의 야요이인들의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조사한 결과는 놀랍게도 혼슈지역 사람들은 물론이고, 현대 한국인들과 유사했다.이런 역사를 안 일본인들은 ‘내선일체론’ ‘일선동조론’ ‘동조동근론’, 즉 일본과 조선은 한 뿌리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천황의 신민인 우리는 창씨개명해야 한다며 동화정책을 폈다. 하지만 그들은 주(主)와 부(副)를 속였다. 우리가 주이고, 일본인의 원형이었다.조한(朝漢)전쟁과 한민족의 이주왜곡된 역사의 진실을 확인하는 일은 재미가 있고, 의미도 크다. 하지만 지금 더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가 있다. 왜 선조들은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넜을까? 그 동기를 알고, 신천지를 개척한 이들의 용기와 지혜를 배우는 일이다.우선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동아시아 세계는 대혼란기에 접어들었다. 중국 대륙은 진시황이 통일전쟁을 계속했다. 북방의 흉노가 침공하면서 숱한 유민이 생겨 동쪽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원조선(고조선)에서는 이주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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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C 4세기 무렵부터 한반도 남부에서 출항…일본열도에 상륙한 항해자들, 日 '야요이시대' 열었다

    우리는 정말 1000회 가깝게 침략만 받았는가? 우리는 한 번도 다른 지역으로 진출하거나 개척한 적이 없었는가? 이렇게 자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기이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고대에 망망대해를 건너 일본열도에 상륙한 사람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본인들의 주장처럼 ‘귀화인’일까, 또는 ‘도래인’일까. 아니면 ‘개척자’나 ‘정복자’였을까.일본 고서에 비치는 외부 정복자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왜’ ‘왜인’ ‘왜병’ 등으로 표현된 집단에 쉴 새 없이 침략받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반면 일본열도를 공격하거나 진출한 기록은 없다. 실성왕 때(407년) 대마도를 정벌하려는 계획을 빼놓고는 그랬다. <삼국유사>가 그나마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를 실었다.이와 달리 일본의 <고사기>(신화를 담은 역사책의 일종, 712년)와 <일본서기>(역사책, 720년)에는 초기부터 외부 사람들이 일본열도를 정복한 상황이 표현돼 있다. 일본의 국기인 히노마루로 상징된 태양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폭풍(또는 대지)의 신인 스사노오 노미코토, 천손(天孫)인 니니기노 미코토처럼 ‘천(天)신’ ‘해(海)신’ ‘지(地)신’들은 일본열도의 바깥에서 온 집단들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면 지금껏 풀기 어려운 미묘한 관계로 남은 일본 민족과 일본 문화는 언제부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우리와는 어떤 관계로 출발했을까.일본열도에는 군마현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구석기 시대인들이 살았다. 신석기 시대에는 조오몽인들이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크고 문양이 복잡한 토기들을 만들었다. 그런데 기원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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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일본 소국 차단하며 환황해무역 독점한 원조선…BC 2세기 漢나라와 동아시아 해상권 놓고 무력충돌

    춘추전국시대는 물론이고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진(秦)나라도 광저우시에 적재량 30t짜리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세웠으며, 동남아시아 지역과 물소 뿔, 상아, 비취, 진주 등의 상품을 무역했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 무렵에 들어와 동아시아 정세는 요동치기 시작했다.페르시아에서 일본까지 무역망 구축 나선 한나라한나라는 건국 이후 60여 년 동안 유목민족인 흉노국에 굴욕을 당했는데, 한무제가 등장해 40여 년 동안 공격한 끝에 분할 지배(devide and rule)하는 데 성공했다. 또 남쪽으로는 기원전 112년에 양복에게 수군 10만 명을 줘 광둥(廣東), 광시(廣西), 베트남 북부지역인 남월(南越)을 멸망시킨 후 동남아시아로, 페르시아로 이어지는 무역망을 구축했다. 서쪽으로는 장건을 파견해 흉노를 압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실크로드로 진출할 수 있는 정보와 경험 등을 얻었다. 동쪽으로도 관심을 기울였다. 서력 기원을 전후해 한반도의 삼한 소국들 및 왜 소국들과 교류한 기록이 많고, 여러 지역 심지어는 제주도 등에서도 연나라, 한나라의 화폐가 발견된다.사실은 진시황도 해양과 동방에 관심이 많아 네 차례나 해안가 요충지들을 순시했는데, 무려 세 번에 걸쳐 산둥해안과 발해를 방문했다. 그가 파견한 서복(徐福)과 동남동녀(童男童女) 3000명은 황해를 건너 남해안을 거쳐 제주도에 머문 후 일본 열도에 상륙했다. 불로초를 구한다는 명분으로 치장했지만 실제로는 동쪽지역의 지리, 산물, 정치 상황 등의 정보 수집과 무역을 추진한 사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마치 시진핑 정부가 중국을 가운데 놓고 동서남북으로 대륙과 해양에서 경(經)·정(政)·군(軍)을 동시에 작동시키는 ‘일대

  •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요동반도·대동강 주변서 유물 대거 출토되는 원조선…환황해 해륙 교통로 확보하고 말·호피 등 중계 무역

    내가 가끔 부르는 독립군가에는 ‘부평초 신세’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조국을 잃은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 허무감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인간에게 뿌리를 확신하는 일은 중요하다.우리가 중국을 넘보거나, 일본보다 우월감을 느낄 때 하는 말이 있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고조선(왕검조선)’ 부분 말미에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한 시기를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되는 경인년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역산하면 기원전 2333년이고, 그래서 올해는 단기 4353년이다.BC 7세기 중국 기록에 처음 등장한 원조선역사와 연관된 정확한 연대(年代)는 알 수 없지만, 조선이 실재한 사실은 다양하게 증명할 수 있다. ‘조선’이 국명으로 처음 나온 것은 기원전 7세기경에 쓰였다는 <관자>라는 책에서다. 또 멸망 후에 쓰인 <후한서>의 ‘예전’에도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다 조선의 땅이다’라고 했다. 우리 기록들은 대부분 후대에 쓰였다.그런데 기록의 유무와는 관련 없이 한때는 원조선(고조선)의 중심부 또는 근처였을 가능성이 높은 요서지방에서 발전한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등을 고려하고, 요동반도와 대동강 유역에서 발견된 수천 기의 고인돌과 토기 등 유물 연대를 보면 늦어도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해서는 중국의 ‘하(夏)’나 ‘은(殷)’처럼 도시국가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원조선은 소위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 등의 몇 단계를 거쳐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와 벌인 전면전에서 패배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원조선 중심지로 거론되는 안시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