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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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이야기
랴오둥반도·일본열도에서 발굴한 석기시대 유물 한반도에서도 발견…벼농사도 해양활동으로 전파
신석기 때부터 해양교류 활발제주도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고산리 유적은 바다를 건너온 초기 신석기인들이 만든 문화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본래 육지로 연결돼 있었는데,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빙하가 녹으면서 수면이 150m 이상 상승했다. 대한해협과 대마도 같은 섬들이 이때 생겨났다. 7000년 전쯤에는 인간들이 이 섬들을 징검다리처럼 이용해 오갔다. 부산의 동삼동과 조도의 패총, 울산 서생포 등에서는 일본열도계의 토기와 전략물자인 흑요석 제품들이 발견됐다. 반대로 대마도와 규슈 일부 지역에서는 우리 계통의 토기와 돌제품들이 발견됐다.2004년엔 경남 창녕군 비봉리에서 소나무로 만들어진 길이 3m, 폭 60㎝ 정도의 쪽배유물이 발견됐다. 놀랍게도 약 8000년 전의 것이었다. 그런 쪽배나 뗏목을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다닌 것이다. 동해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하구의 서포항 유적지에서는 고래뼈로 만든 노가 발견됐는데 약 5000년 전의 것이다. 울산의 반구대에는 신석기 시대 말 또는 청동기시대 초로 추정되는 암각화가 있다. 여기엔 수십 마리의 고래 등 어류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부산 동삼동의 신석기 초기 패총에선 상어뼈와 고래뼈가 발견됐다. 선사시대에 동해 전체와 심지어는 남해에서도 포경업이 매우 발달했다는 증거들이다.산둥반도와 랴오둥반도 사이에는 좁은 발해만이 있다. 에게해와 넓이가 비슷한 소지중해다. 징검다리 같은 묘도군도 등 몇몇 섬에선 약 6000~7000년 전의 해양 관련 유물들이 발견됐다. 일부에서는 그 일대에 5000년 전에 해운업이 있었다는 주장들을 한다.해로로 전래된 벼농사역사시대에 들어오면서 바다는 더 많이 활용됐다.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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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고려왕조까지 활발한 해양활동…한반도는 중국·일본열도·바다 잇는 '문명의 통로'
의식이 행동에 영향을 미치고, 의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언어다. 그 언어의 핵심이 단어다. 지금 한국인들은 진실은 상관없고 오로지 ‘단어’만을 선점하려고 기를 쓴다. 일본이 하던 짓거리들을 배운 탓일까? 그들은 우리에게 ‘반도’라는 단어의 굴레를 씌웠고, 그것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덫으로 아직 작동하고 있다.망각된 만주와 해양활동1995년 여름 북만주와 동몽골의 접경지대 초원으로 올라가 튼튼한 말 세 마리를 샀다. 고구려인들 흉내를 내면서 400년 수도였던 국내성(현 중국 지안시)까지 타고 내려왔다. 말 위에서 고구려인의 눈길로 내려다보는 압록강은 깊고 푸른 물이 철철 흐르는 국경의 강이 아니라 청계천 정도에 불과했다. 두만강도 그랬다. 중류에 이를 때까지도 동네 앞 냇가 정도였다. 또 한 번 속은 것이다. 일본인들이 규정한 ‘조선반도’는 역사 용어가 될 수 없었다. 만주와 한반도는 사실상 하나의 땅덩어리이기 때문이다. 만주 일대에 살았던 종족이나 언어, 문화와 유물들을 고려하면 그 지역은 우리의 생활영역, 역사공동체의 일부였다.하지만 그 너른 땅을 빼앗긴 뒤에는 선비족(몽골), 거란족, 여진족을 오랑캐라고 무시하며 선을 그었다. 근대 들어서는 일본인들의 이상한 논리에 넘어가 역사마저 포기했다. 그들이 우리에게 주입한 조선반도는 그리스반도나 이탈리아반도, 이베리아반도처럼 해양활동이 왕성했고, 한때는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런 반도가 아니었다. 해양활동이 전혀 없거나 매우 미약했고, 바다에 포위돼 있는 아주 제한된 공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넓은 만주를 망각했고, 역동적인 해양활동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서해는 내해(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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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초창기 만주부터 일본까지 문화공동체 형성…개방·포용·다양성 발전시켜 세계로 나아가야
이상 지향과 강한 자의식우리에겐 ‘이상(理想)’을 지향하는 순수한 성격이 남달리 강했다. 우리가 살아온 동쪽의 끝(Far East)은 해가 떠오르고 문화의 씨앗이 움트는 터였다. 해는 빙하기 이후에 인간의 생존과 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고 햇빛은 밝음과 지혜를 상징했다. 그래서 이집트인, 인도인, 마야인, 투르크인들처럼 인류는 해를 숭배했지만 우리처럼 집요하게 추구하고 하늘을 숭모해온 민족은 드물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 신라 등의 나라 이름, 심지어 ‘한국’까지도 해와 밝음을 의미한다. 부여와 고구려의 초기 왕들은 태양을 의미하는 ‘해(解)’씨였다. 백제의 동명(東明)도, 신라의 박혁거세도 ‘밝음’을 뜻한다. 백두산, 태백산, 부여 같은 지명들도 해와 관련이 있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 백제의 동명제 같은 의례는 하늘을 모시는 제천행사다. 하늘의 자손(天孫), 해와 달의 자식(日月之子), 천제(天帝)임을 자처했으니 항상 자의식이 강했다. 지나칠 때는 오만과 거드름으로 변성(變性)돼서 안타깝지만 말이다.다양성과 개방성우리 민족성은 한때는 교조적이고 쇄국적이었지만, 원래는 활달하고 개방적이며 다양성이 풍부했다. 문화와 혈연, 언어, 신앙, 설화 등은 유라시아의 전 지역과 연결됐다. 이 때문에 다른 외모와 말을 존중했고 다른 문화와 종교의 가치를 인정하고 수용했다. 더욱이 발전기에는 만주 일대와 한반도, 해양, 심지어 일본 열도의 일부까지 문화공동체였으므로 당연히 개방적일 수밖에 없었다. 무교, 선교(풍류도), 불교, 도교, 유교, 기독교, 서구 사상 등 많은 종교와 사상이 들어와 지금까지 큰 차별과 충돌 없이 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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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유라시아 연결된 개방성이 '한민족 DNA'…탐험정신 넘쳐나 대륙과 해양 진출했죠
나는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궁금증은 참지를 못한다. 그 때문에 고민에 빠질 정도였다. 도대체 나는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내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한 ‘한민족’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을까?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요즘엔 더욱 천착할 수밖에 없는 주제다.한민족이 흉포하거나 사대적이라는 외국인의 시선중국인들은 <삼국지> 동이전 등에서 ‘고구려인은 성질이 흉포하고 급하며 노략질하기 좋아한다, 심지어 말투가 천하다’라고 전했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의식을 교란시키고 길들이기 위해 한민족의 본성을 작위적으로 규정하고 세뇌시켰다. 식민사관에 따르면 우리는 늘 사대적이었고, 당파성이 강했고, 주변부적인 존재였다.스스로는 ‘정이 철철 흘러넘치고, 한(恨)을 지닌 민족’이며 ‘판소리와 창·춤·동양화 등은 민족문화에 내재한 한을 승화시킨 예술’이라고 자찬하기도 한다. 조선 미학의 스승처럼 모셔지는 세키노 다다시와 야나기 무네요시가 말한 ‘애상’ ‘비애의 미’ ‘원한’의 영향 때문이다. 어처구니없고 부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것인데도 우리 머릿속을 점령했다.설사 맞는다 해도 그것은 조선시대의 ‘이상(異常)현상’이지, 전 시대에 일관된 문화이자 정서는 아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 남녀 모두 수의(장례를 위해 고인에게 입히는 옷)를 만들어놓고 살며, 낙천적이고 당당했다. 춤사위는 자유롭고 호방했으며, 여백의 미와 정적인 미를 중시한 수묵화가 아니라 화려하고 동적인 채색화를 그렸다.조선시대·일제강점기만으로 부정적 이미지 강요당해‘은근과 끈기’라는 말이 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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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진계·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등 유입…청동기 시대에 '단일민족' 기본 틀 완성
유라시아 지역에서 ‘8개+α’의 길을 통해 한반도에 이주해온 집단들이 한민족의 기본핵을 만들었다. 큰 갈래만 몇 개 살펴보자. 우선 북방 몽골로이드(몽골 인종)의 몽골어 계통 주민들이 동만주를 제외한 만주 일대와 한반도 북부 일대에 살았다. 몽골의 선조인 선비족과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은 원래는 우리 조상의 범주(방계 종족)에 속했다. 또 발해만과 산둥반도 일대에서 중화문명의 토대를 놓은 훗날 ‘동이(東夷)’로 분류되는 이들은 발달한 농경문화를 갖고 서해를 횡단하거나, 해안을 따라 연안을 항해하거나, 걸어서 서해안 일대에 정착했다. 바이칼호와 주변 초원지대, 알타이 초원과 중앙아시아 일부에 살던 백인종의 피가 섞인 튀르크계 종족들은 말을 타고 청동기로 무장한 채 서북 만주로 진입했다. 이들은 고조선은 물론 고구려 신라 등 우리 역사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한반도와 만주를 연결한 단단한 역사공동체근대 초기에 조선의 산천을 여행한 서양인들은 답사기에서 한결같이 이렇게 서술했다. ‘한국인들은 영리할 뿐 아니라 피부색도 하얗고, 키도 커서 백인에 가장 가깝다.’ 물론 지금도 동아시아에서 서양인과 가장 가까운 외모를 가진 민족은 한국인이라는 데 이의가 없다.또 동만주와 연해주 일대의 숲과 강에는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소위 여진계가 우리와 생활공동체를 이뤘다. 일부는 동해안을 따라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그래서 함경북도 일대와 동간도에는 이들의 흔적이 강하고, 당연히 피가 섞여왔다.이렇게 우리는 주로 알타이어계의 튀르크어, 몽골어,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이 골고루 섞였다. 알타이어계의 핵심 단어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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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살기 시작한 한반도 거주민…신석기 시대 연해주·일본 이주민이 한민족 뿌리 형성
폭풍을 만나 항해할 때엔 선장이 중요하다. 소위 ‘리더론’이다. 하지만 잘못된 선장을 만난 위급 상황에서는 선원들의 자질도 중요해진다. ‘모두론’이다. 지금은 모두가 자각한다. 스스로가 한국호를 운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문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으며, 언제, 어떻게 이곳에 정착했는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정체성에 대한 관심은 본능적이고, 무의식 속에서도 던지는 물음이다. 생존전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인종·언어·문화 등이 민족 정체성 규정해우리는 ‘한민족’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하다. 또 당연한 듯이 ‘단일민족’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문화 가정과 외국인 거주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글로벌화 흐름 속에 ‘민족’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향이 생겨났다. 세계질서에 ‘자(自)집단주의’가 강화되면서 정반대로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요구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한국에서는 정치적 상황들과 맞물리며 때론 갈등을 증폭시키기도 한다.동아시아에서는 ‘민족’이라는 용어와 개념을 기계적으로 사용하고, 문명이나 역사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일본이 서양어(nation)를 번역해 만든 조어인 ‘민족(民+族)’을 공통적으로 사용해왔다. 실은 중국만 해도 쑨원, 마오쩌둥 시대의 민족 그리고 후진타오 이후의 ‘중화민족론’은 사뭇 다르다. 한국도 좌우가 바라보는 내용과 적용 방식이 다르다. 일부는 ‘종족’과 ‘민족’을 동일시하며 반일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이고 있다. 북한의 경우 체제 유지 같은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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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종의 역사관' 버리고 21세기 정체성 다시 찾자
인류 역사를 살펴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집단·민족·국가가 붕괴한 뒤 사라졌다. 칭기즈칸이 토대를 마련한 ‘대몽골 세계(ULUS)’도 불과 150년 남짓 존재했을 뿐이다. 거대해 보이는 중국사도 ‘국가’와 ‘한족(漢族)’ 단위로 좁혀 보면 실은 패배와 굴종의 역사였다. 하지만 우리는 비슷한 역사공동체로서 장기간 존재해온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족이다. 항상 심각한 문제들을 극복해왔고, 특별히 그런 의지도 강했고, 능력도 남달랐다. 현대에 들어서도 마찬가지다. 6·25전쟁이라는 상상할 수 없는 참화를 겪으며 절망 속 폐허만 물려받았지만 50년이란 짧은 기간에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이뤄내는 기적을 일궜다.부숴야 할 ‘반도적 숙명론’불편한 진실이지만 우리는 지난 600년간(어쩌면 1000년일 가능성도 있다) 자신을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자신의 기호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렸고 자기 의지로 역사를 운영하는 기회를 터무니없이 양보했다. 중국, 일본, 서양의 여러 나라와 문화 같은 정체불명의 실체에 그랬다.그래서 나는 ‘한반도 멸망론’이란 다소 섬뜩할 수 있는 논(論)을 제기한다. ‘한반도’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식민지로 삼는 간계를 숨긴 채 지은 ‘조선반도’를 살짝 변형시킨 말이다. 조선인이 만든 반도국가는 큰 대륙에 붙어 있는 쓸개 같은 존재라는 얘기다. 대륙의 그늘 아래서 간섭을 받고 생존을 위해선 사대를 할 수밖에 없다는 ‘반도적 숙명론’이다. 당연히 역사를 자율적으로 운영한 것이 아니라는 ‘타율성이론’을 만들었다. 고인 물처럼 정체됐다는 패배의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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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롤스의 ‘정의론’
정의란 무엇인가? 서양 철학에서 정의에 대한 고전적 의미는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몫’을 결정하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각자에게 그의 몫을 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자의 몫’이 무엇인지 밝히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면 ‘각자의 몫을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먼저 답해야 한다. 이 물음은 정의론의 핵심 질문이며 사실 오늘날 정의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은 ‘각자의 몫’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피자를 나누는 방법롤스는 그만의 독창적인 발상을 통해 ‘각자의 몫’을 어떻게 분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정의론을 제시하였다. ‘단일 주제의 철학자’라는 별명을 가질 만큼 평생 ‘정의’라는 한 주제만 연구한 롤스가 택한 방식은 어떤 실질적인 정의 기준을 제시하기보다는 정의로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절차를 모색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롤스의 절차적 정의는 어떤 정의로운 절차를 정해두고, 이에 따라 나오는 결과들은 모두 정의롭다고 보자는 것이다.이제 두 사람이 피자를 나누는 예를 통해 롤스의 절차적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 경우 절차적 정의는 한 사람은 자르고, 다른 한 사람이 먼저 고르는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이 절차에 따라 나온 결과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다. 피자를 나누기 위해 절차를 거쳐 정의로운 분배 상태를 만든 것처럼, 롤스의 정의론도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를 찾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온 개념이 바로 그 유명한 ‘무